>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2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19:22:38

>>1

하루동안 열심히 집을 청소하고 정돈해서 겨우 사람 사는 분위기로 만들어놓은 사내는 많이 지쳤는지 마루에 누워있었다. 집 안에 누워있어도 되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집 안보다는 마루가 시원하고 경치 보기도 좋겠지 싶어 한 시간 이상 자세를 유지하며 사내는 근처 경치를 구경했다.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푸른 풍경이 절로 눈을 편안하게 했고,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지 않는 한적한 분위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몸에 쌓여있는 피로를 풀게 하기 딱 좋았고, 시골 특유의 맑은 공기는 지친 정신을 맑게 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쉬었다가 방 안에 만들어둔 아틀리에 정리를 마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집안 정리를 한다고 피곤해서 바로 잠들어버린 바람에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혀 못 했다는 것을 떠올린 사내는 오늘이야말로 꼭 마을을 돌아다니며 제대로 인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누운 몸을 일으켜세워 마루에 똑바로 앉았다.

곧 보이는 얼굴은 어제 집 앞에서 만난 여성의 모습이었다. 옆집이 아니고서야 이틀 연속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도시에선 꽤 힘든 일이었던만큼 사내는 괜히 신기함을 느끼며 벗어둔 신발을 신고 기지개를 쭈욱 켜며 마루에서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또 보네요. 오늘도 산책 가는 길이세요?"

자신이 앞으로 살 집의 앞 길이 누군가의 산책길이라는 것은 역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를 작게 짓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허나 남의 산책길을 방해하는 것은 역시 미안한 일이었기에 그녀가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살며시 옆으로 치워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나도 아침에 보고 깜짝 놀랐지 뭐야. 나 역시 이어둘게!

3 이름 없음 (gQY8EWkymA)

2021-09-13 (모두 수고..) 21:19:10

>>2

천천히, 조금씩 가까워지는 집은 어제보다 좀더 정돈되어보였다. 극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전날과의 차이 정도는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집 안도 정리하느라 바빴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가던 중에 누가 마루에서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흩날리는 회색머리가 인상적이라 잠시 눈길을 빼앗겼다가 사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앗, 아, 네, 안녕하세요..."

약간의 놀람을 담은 자색 눈동자가 사내를 한번 보고 슬쩍 옆으로 피했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종이봉투의 끈을 쥔 손도 알게 모르게 힘이 들어가, 안 그래도 흰 손의 손등이 투명해질 것만 같다. 어영부영 인사를 하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조금 늦게 사내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저, 오늘...은, 그쪽, 한테, 용건이 있어서요..."

산책이 맞긴 했지만 용건이 아니라면 이 길로 오지 않았을테니까. 그러니 오늘은 사내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 거라 말하고 들고 온 종이봉투를 사내에게 내밀었다. 종이봉투 안에는 딱 봐도 직접 만든 건가 싶은 5단짜리 검은색 찬합과 작은 보온병이 가지런하게 들어있었다. 사내에게 그것을 받으라는 듯 든 채로 마저 얘기했다.

"옆집, 사시는 할머니가, 여기 사시던 분하고... 친분이 있었어서.. 그래서 그쪽 주려고 챙긴건데, 일이 생기시는, 바람에, 제가..대신..."

띄엄띄엄에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과 왜 그녀가 이걸 가져왔는지 정도는 이해가 될 만큼은 얘기를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말은 했다는 약간의 안도감에서 나온 한숨이랄까. 이제 사내가 이걸 받기만 하면 그녀의 용건은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일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산책로를 바꾸면 될 거라고.

4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21:52:17

>>3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단 하루만에 무슨 용건이 생겼을지 의문을 품었다. 눈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에 뭔가 안 좋은 말이라도 하려고 온 것일까 싶어 약간의 불안감이 사내의 마음을 채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사 온지 이제 하루가 지났는데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느낌으로 있는 것은 사내로서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허나 그 또한 자신의 추측일 뿐이었기에 우선 용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내는 생각을 돌렸다.

손에 쥐고 있는 종이봉투를 내미는 그녀의 행동에 사내는 얼떨결에 종이봉투를 받았다. 안을 들여다보니 검은색 찬합과 작은 보온병이 들어있었고 자연히 사내는 왜 이것을 자신에게?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 확실한건 이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자신에게 찾아온 용건임은 분명하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옆집 사는 할머니요? 이걸 저에게?"

자신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어떤 사람일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시골집에 왔을 때 여러 어르신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아왔던 것 같은데. 그 중 한 분이실까? 정말로 하루빨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지으며 우선 종이가방을 내려놓았다.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이렇게 뭔가를 주는 어르신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꼭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해야겠네요. 괜찮다면 어느 곳에 사는 분인지 물어도 될까요? 아. 그리고 이렇게 전해주러 와서 고마워요."

찬합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먹을 것이 들어있을 것 같다고 추측하며 나중에 식사를 할 때 먹으면 되겠다고 결론을 지은 사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 말을 이었다.

"혹시 산책을 자주 즐기신다면 괜찮은 풍경이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 별 건 아니고 그림을 그리러 내려왔거든요. 그래서 혹시 좋은 풍경이 있으면 소재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5 이름 없음 (gQY8EWkymA)

2021-09-13 (모두 수고..) 22:57:35

>>4 좀 피곤해서 그런가 답레가 안 써지네. 내일 들고올게.

6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23:06:40

>>5 빨리 빨리 이어야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해줘도 괜찮아! 물론 이야기의 끝을 맺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으니 정말로 편하게 해줘!

7 이름 없음 (KLx1EPiy5I)

2021-09-14 (FIRE!) 00:52:24

(길가 중간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당신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손은 조수석에 놓여져있는 샷건 쪽을 향해 뻗으면서 당신 앞에 세우고는 차 창문을 스르륵 내린다. 까만 미러 선글라스를 슬쩍 아래로 흘려 당신을 바라보다, 씩 웃는다.) 이런 곳에 손님이라니 드문데. 어디까지 가십니까?

/좀아포! 급작스런 전개나 맥커터만 아니면 괜찮아~

8 이름 없음 (3GPpEJWZ8w)

2021-09-14 (FIRE!) 02:49:09

>>7 모든것이 시작되고 모든것이 끝날지 모르는 곳으로 (처량한 얼굴에 눈물,먼지 범벅이된 하얀 가운의 여자가 무거운 서류가방을 든채 샷건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우던 시가를 더 깊게 들이마시며 읖조린다. 옆구리에 낀 철로된 서류가방을 보여준다. 그 위로 유명 메이커가 선명하게 빛난다.)어때, 같이 가볼래? (같은 시각 그녀의 뒤에서 커다란 폭발이 터지면서 막무가내로 차에 타려든다. 그리고 큰 폭발 소리에 좀비들이 점점 모여든다.) 일단 가면서 이야기 하지 문좀 열어!

9 이름 없음 (SHdse3byhc)

2021-09-14 (FIRE!) 05:07:19

>>4

사내에게 종이봉투를 넘겨주고나자 빈 손이 새삼 가볍게 느껴졌다. 그녀의 집에서 여기까지라고 해도 고작 십여분에 불과한 거리를 들은게 전부인데. 그녀는 어쩐지 허전함이 느껴지는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사내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자초지종까지는 몰라도 할머니가 그리 말하셨으니 들은 대로 전할 뿐이었다.

그녀는 사내가 종이가방 내려 놓는 모습을 힐끗 시선으로만 쫓다가, 이어진 물음에 시선을 돌려 사내를 보았다. 타인의 주소를 멋대로 알려줘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 연관도 없다면 알려주지 않겠지만, 나중에 빈 찬합을 돌려드리려면 미리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혼자 생각을 해보고 괜찮겠다 싶어서 다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그녀가 왔던 길을 보며 간단히 길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서, 쭉 간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 있어요. 거기..에요."

혹시 모르니 명패에 써있을 할머니의 성씨도 같이 알려주고 그럼 이만, 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내의 다음 물음이 그녀의 말보다 빨랐다. 미처 끊지 못한 말을 그대로 들은 그녀는 풍경과 그림이란 말에 살짝 흥미가 도는 눈빛을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림...인가요. 괜찮은 풍경, 이라면..."

대답하기에 앞서 또 잠시간 시간을 들여 생각에 빠졌다. 근 1년간, 마을 밖으로 나가진 않아도 걸어갈만한 곳은 여럿 가보았다. 딱히 좋은 풍경을 찾기 위한 것도, 그만큼 산책을 즐겨서인 것도 아니었지만. 몇 군데 인상에 남는 장소는 있었다. 그곳들을 떠올린 그녀는 못다한 대답을 마저 이었다.

"일출이 잘 보이는, 절벽 같은 곳이나, 저기, 안개가 낀 늪이나... 노을이 잘 드는 곳, 정도는, 알고 있어요.."

기억나는대로 몇군데를 말하고 보니 별로 좋은 곳들은 아닌거 같아서, 그냥 흔한 곳이라고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시골 풍경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고.

10 이름 없음 (Bg1UuNSkIk)

2021-09-14 (FIRE!) 19:27:17

>>9

여기서 쭉 간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시작되는 말을 들으며 사내의 눈동자는 그녀가 설명하는 길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명패의 이름까지 알려줬으니 찾는 것은 상당히 쉬울 거라고 사내는 판단했다. 적어도 길치는 아니었기에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라고 사내는 확신하며 이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을 전했다.

이어 자신의 질문의 답이 들려오자 사내는 자연히 그 풍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안개가 낀 늪이 있다는 말에 늪도 있구나라며 신기해하며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긴 꼭 가봐야겠다고 사내는 다짐했다. 물론 출발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아직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했고 집 정비도 다 끝나지 않았으니까. 겉은 어떻게든 정비했다고 해도 비가 새는 곳이 없을지, 혹여나 문제가 되는 곳은 없을지 등등 확인해야 할 곳이 많았고 아직 아틀리에 정비도 마치지 못했으니 해야 할 것은 많았다.

"이곳에선 흔할지도 모르지만 막 여기로 온 저에겐 흔한 곳이 아닌걸요. 어릴 때 여기에 여러 번 오긴 했지만 사실 이 시골집 근처에서 멀리 벗어나본 적은 없어서요. 아무튼 알려줘서 고마워요."

계속 고맙다는 인사만 한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괜히 소리를 작게 내서 웃었다. 허나 그 웃음소리를 어떻게든 잠재우며 고개를 돌려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늪이나 노을이 잘 드는 곳 등의 위치를 상상해서 있을법한 장소로 고개를 돌리다 아래로 내리며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림 좋아하시나요? 만약 좋아한다면, 일단 정리가 다 끝나고 마을 어르신들에게 인사가 다 끝나면 추천해준 장소 같은 곳에 혹시 가게 된다면 풍경화 한 장 받아보실래요? 저도 손을 풀고 싶고, 삽화가를 꿈꾸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보일지도 궁금해서요."

물론 좋아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하며 사내는 두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11 이름 없음 (SHdse3byhc)

2021-09-14 (FIRE!) 20:35:13

>>10 제대로 마무리짓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안 써져서 이쯤해야 할거같아. 미안.

12 이름 없음 (Bg1UuNSkIk)

2021-09-14 (FIRE!) 20:53:42

>>11 아니야! 괜찮아! 짧지만 그래도 잇는다고 수고했고 재밌었어!

13 이름 없음 (IjxXO5lTew)

2021-09-16 (거의 끝나감) 02:01:29

" …내 이름이요? "

술기운이 오른 듯 붉어진 얼굴로 여자가 되물었다. 영 탐탁치 않아하는 어투였다. 게슴츠레 뜨인 눈으로 당신을 서너번 훑어보던 그녀는, 이내 싸구려 양주가 찰랑이는 유리잔을 기울인다.

" 제냐, 제냐예요.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가명이 아니라 진짜 이름 맞으니까. 정확히는 애칭이지만. 워낙 특이한 이름이라 알려주기 싫었는데. "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 잔이라 그런지 술이 유난히 쓰다. 말을 멈춘 채 몇 번 숨을 들이키던 여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잇기 시작했다.

" 뭐, 처음 본 사람 치고는 내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재미있었으니까 알려주는거예요. 풀네임은 안 알려줄거니까 그렇게 알고. "

이국적인 이름 치곤, 전형적인 한국인의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검은 머리칼과 적당히 흰 피부. 짙은 갈색빛 눈동자에 특유의 분위기가 담긴 홑꺼풀 눈매. 평균을 겨우 웃도는 키와 여느 대한민국 20대들이 좋아할 법한, 짧은 유행을 함축한 옷가지. 여자가 자세를 고쳐잡았다. 지갑을 챙겨드는 눈치다.

" …집 가기 전에 담배 한 대 필건데, 그 쪽도 펴요? "

여자가 나른히 물었다. 희미하게 알싸한 술냄새가 풍겨온다.

14 이름 없음 (OnJloPxmc6)

2021-09-16 (거의 끝나감) 03:07:31

>>13

"응, 당신 이름이요."

눈가에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여자는 푸슬거리며 헤프게 웃는다. 그러다 동그란 눈으로 당신 얼굴을 살핀다. 시선에 몸을 조금 움츠린다. 우물쭈물거리면서도 그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이상한 구석에서 묘하게 고집이 있기라도 한가 보다.

제냐, 제-냐. 그 이름을 입 속에서 둥글둥글 굴려보던 여자는 당신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안 봤어요! 하고 변명하는 말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커다란 두 눈을 두어번 꿈뻑거린다.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싫었다면 미안해요...그래도, 들으니까 기쁘네요."

그리곤 예의 그 헤프고 무른 웃음을 지어보인다. 꼭 그 기쁘다는 말이 온전한 진심인 것처럼. 여자는 손을 팔락거려 옷소매를 조금 아래로 한다. 양 손으로 잔을 잡고 홀짝이며 남은 술을 마신다. 그러다 당신을 말을 하노라면 술을 내려놓고 가만히 듣다가, 한참을 고민하듯 있는다.

"그,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까 전에요...이상하게 본 게 아니라."

그 고민 끝에 나온 말은 실없는 종류다. 그리고, 라며 여자는 말을 잇는다.

"제 이름은 비예요. 비 온다, 할 때 그 비요. 따지자면 애칭이에요."

제냐처럼요. 짧게 덧붙인다. 여자가 작게 웃자 갈색 머리카락이 그에 맞춰 흔들린다.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빛이 닿자, 호박색에 가까운 색채로 눈동자가 반짝인다. 나잇대에 비해 상당히 작은 체구다. 그래서인지 작은 웃음에도 쉽게 흔들려 보인다.

"음, 네. 가끔요."

조막만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답한다. 눈동자를 데굴 굴린다.

"괜찮다면, 불만 조금 빌려주지 않을래요?"

그러다 변명조로 중얼거린다.

"...라이터를 두고 와서요."


#이런 것도 괜찮을까?

15 이름 없음 (dJDNk9i6tI)

2021-09-17 (불탄다..!) 01:16:39

>>14

" 뭐, 미안해 할 필요는 없고. "

여자가 힐긋 당신을 바라보다 오묘히 입꼬리를 접어 올렸다. 여자는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제법 따스히 웃을 줄도 아는가보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텅 빈 술잔이 어딘가 아쉽다. 기껏 오른 취기가 곧장 사그라질 듯한 그 감각이 싫었다.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턱을 괴었다. 별안간 들려온 당신의 목소리 때문이다.

" 그래요? 고마워라. "

여자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술기운이 가득한 웃음이다. 제정신이라면 결코 그런 미소를 보이지 않았겠지. 평소의 여자는 웃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비—. 여자가 길게 입술을 늘려 당신의 이름을 중얼였다. 가볍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며, 당신의 이름이 톡 터져나온다.

" 좋은 이름이네. 내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거든. "

여자가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여자의 눈동자는 칠흑처럼 검었다. 그래서 꼭, 그녀의 눈을 볼 때면 깊이 모를 심해에 빠져드는 기분인지라, 그녀와 눈 맞추길 피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새카만 어둠 속에 제 속내를 읽히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을테니. 눈은 마음의 창문이라 했던가. 인간은 눈과 눈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던데, 그녀의 눈은 아무리 들여다본들 그 무엇도 읽히질 않았다. 모든 불을 끄고 달빛 들어올세라 창문까지 닫고, 속마음이 적힌 공책을 꽁꽁 숨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자는 그리도 투명한 눈빛을 좋아했다.

" …따라와요. "

여자가 한참을 침묵하다 대답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니 세상이 어지럽다. 세상이 붉은건지, 가게의 조명이 붉은건지, 그녀의 눈동자가 붉은건지. 알 길이 없다. 여자는 비틀이는 걸음으로 뒷쪽 출입구의 문을 밀었다. 곧장 서늘한 공기가 들이치며 세상의 소음이 밀려들었다. 쇠어가는 가로등의 불빛이나, 낡은 자동차의 모터음이나, 뭐 그러한 것들.

여자가 품에서 담배갑을 꺼낸 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살며시 깔린 시선 사이로는 거친 아스팔트 바닥이 보였다. 라이터를 몇 번 달칵대며 담배에 불을 붙인 여자가 그대로 첫 숨을 길게 내뿜어낸다. 그리곤 잠시 당신을 보고서는, 제 담배갑을 기울이며 한 대 가져가라는 듯 흔들대는 것이다.

" …솔직하게, 담배 피는 거 맞아요? "

여자가 다시 한 번 연기를 뿜어낸 뒤 물었다. 여자는 불안정한 자세로 딱딱한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멍하니 울려오는 머리에 여자가 잠시 몸을 비틀였다. 글쎄, 그정도로 취한 건 아닌데…

" 아니 뭐, 꼭 한 번도 안 펴본 사람 같아서. "

입술을 오물대며 대답하는 그 모습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 괜찮아!

16 이름 없음 (07R./bVFm6)

2021-09-18 (파란날) 00:45:18

14살. 살던 마을을 떠난 소년은 10년이 지나 24살의 청년이 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검술과 마법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전문 아카데미에 들어간 그는 아카데미를 정식으로 졸업했다는 제국의 사자 문양이 그려진 붉은색 완장을 왼팔에 차고 있었다. 제국에서 청년의 검술과 마법 실력을 인정했다는 그 증표는 제국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자격 그 자체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받을 수 있는 그 증표만 있으면 제국의 유력 가문을 지키는 기사가 될 수도 있었고, 제국 그 자체를 지키는 기사단에 들어가서 활동할 수도 있었다. 허나 사내는 아카데미에서 들어온 모든 권유를 거절하고 자신이 살던 마을, 즉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0년만이지만 옛 모습 그대로네."

14살 때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사내는 미소를 작게 지으며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나름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게 유력한 가문도 아니었던만큼 사내를 알아보는 이는 적어보였다. 마을 북쪽에 위치한, 귀족들이 살고 있는 거주구에 사는 작은 여러 가문 중 하나였을 뿐이었으니 어지간하면 이런 반응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우선 마을 북쪽으로 향하려 했다.

"앞으로 뭘할지는 일단 집에 돌아가면 생각해볼까. 오랜만에 인사를 드려야 할 곳도 많으니 말이야."

/뜬금없는 맥커터만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이어도 오케이야! 10년 전에 친하게 지냈던 귀족 친구중 하나가 나와도 상관없고, 어떻게든 영입하려고 제국에서 몰래 미행해서 따라온 이로 이어도 별 상관없어!

17 이름 없음 (KcVvObqu.w)

2021-09-20 (모두 수고..) 01:17:17

>>15

당신의 말에 뒤늦게 따라 웃는다. 약간의 안도가 담긴 미소는 무해해 보인다. 꼭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달달한 디저트처럼, 해치는 법은 모르고 사는 이같다.

"진심이에요."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지금도 그렇다. 자신의 감정을 죄 꺼내 늘어놓는 모습이 무해하다 못해 순진해 보인다. 사랑 받고 자라 환히 웃는 법과 사랑 주는 법을 자연스레 익힌 사람처럼,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비오는 날의 어떤 부분을 좋아해요, 제냐는?"

투명한 눈동자가 당돌하게도 당신을 마주본다. 제가 빛이니 어둠이 두렵지 않다는 양 군다. 얼마든지 읽혀도 상관 없다는 것처럼 바라본다. 당신과는 정반대의 사람 같아 보인다. 어두운 길 가는 사람 길 잃지 말라 창문가에 불을 환히 밝혀놓았다. 어두운 밤 헤매지 말라 하늘에 별 총총 띄워놓았다. 꼭, 그런 사람 같다.

한참을 당신의 답 기다린다. 재촉하거나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당신의 선택을 기다린다. 그러다 목소리가 들려오노라면, 그제서야 종종걸음으로 당신의 뒤를 따라가며 "같이 가요!"하고는 종알거린다. 띔박질에 가까운 걸음으로 뒤따라가자면, 어느새 도시의 냄새가 훅 끼쳐온다. 저물어가는 몇몇 것들의 소리가 거리를 잔잔히 채운다. 여자는 서느다란 고요에 제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그러던 여자는 제 시야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을 되찾는다. 내밀어진 담뱃갑의 로고를 유심히 바라본다. 하나 꺼내가려던 찰나, 저를 향한 질문에 고개를 들어 당신을 올려다 본다.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잘 안 피게 생겼다고들 하더라고요."

옅게 웃는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표정이 흐릿하다. 확실히 여자는 담배와 친하게 생긴 인상은 아니었다. 입에 무는 것은 달달한 막대사탕이 전부일 것만 같아 보였다. 그렇 것 치곤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무는 일련의 동작이 매끄럽다.

"가끔 피곤 해요."

여자는 불 좀 빌려달라 말하듯 턱을 살짝 치켜든다. 그제야 얼굴에 빛이 닿는다. 조금 지친 낯이다.


#말도 없이 늦어서 미안...추석이라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뭐야. 너참치는 즐거운 연휴 보내고 있길 바라!

18 이름 없음 (sdN5hN8djo)

2021-09-20 (모두 수고..) 22:22:43

히어로의 삶도 만만치 않네. 힘내라, 힘내. 일단 마시고, (자연스럽게 술을 따라주고 턱을 괸 채 웃는다.) 빌런 협회는 언제든지 열려있다, 친구야. 적어도 지랄맞은 위계사회는 없더라고. (불판 위의 고기를 구워 당신의 접시에 올려주고는 자신은 집게로 집어든 고기를 입에 넣는다. 중간에 느껴지는 시선에 후드를 뒤집어쓴다.) 유명인이랑 고기 먹기 힘드네 거 참.

/ 히빌!! 맥커터 자제~

19 이름 없음 (UT1lB8JGUk)

2021-09-20 (모두 수고..) 23:20:06

>>18

아니, 저기… (두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살핀다. 다소 당황스러워하는 얼굴.) 일단 따라주니까 마시긴 하는데요. (확신 없는 얼굴로 잔을 매만지다 단숨에 들이킨다.) …건물에 감시 카메라라도 달아놨나? 오늘 뒤지게 깨진 건 어떻게 알았대. (딱히 놀란 기색 없이, 태연히 말을 받아치며 대답한다. 그러다 제 고기를 집어먹는 당신을 얼빠진 얼굴로 응시한다.) 그거 내 고기인데? 고기값 줄거예요? 뼈 빠지게 번 돈으로 산 건데? (다소 인색하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다시 한 번 볼캡을 눌러쓰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든다.) 내가 아니라, 그 쪽 문제인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얼굴 팔리지 않았나? (웅얼거리는 히어로) 근데 담력 대단하다. 어떻게 대놓고 찾아올 생각을 다 해요? 민간인 많아서 내가 깽판 못 칠 줄 알고 그러나? (불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고기를 집어먹는다.)

#이렇게 받아도 괜찮을까...!

20 이름 없음 (Oa6/ev./m6)

2021-09-21 (FIRE!) 10:56:11

>>19
/너참치 미안! 빌런을 아무 생각없고 뻔뻔하고 염치없는 캐릭터로 짠 건 아니었거든~ 찐친 사이를 바랬던 거라서 다른 참치랑 이어보도록 할게! 이어줘서 고마워~

21 이름 없음 (VVfVlMh9Cg)

2021-09-21 (FIRE!) 13:12:41

>>18

(소주를 한 번에 쭉 털어 삼킨다. 쓴 액체가 식도를 태운다.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내 신념이 잘못된 건가? (자유로워 보이는 친구를 바라보다 모자를 눌러 쓰고 왔음에도 느껴지는 시선들에 쓰게 미소짓는다.) 너 여기 있는 거 알려지면 안되는데. 룸으로 갈 걸 그랬나. (후드를 더 푹 눌러 씌워주며 얼굴을 찌푸린다.) 내 방 갈래?

22 이름 없음 (2dS/EdO/ew)

2021-09-21 (FIRE!) 14:23:15

﹘뭐야. 너 누구야.

바다를 닮은 푸른 빛이 맴돌기는 하지만 평범한 검은 머리카락과 평범한 검은 눈, 그리고 평범한 학교의 교복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물 속에서 나풀거리며 명찰이 있을 가슴팍을 가리고 있어 이름은 확인하기 힘들었다. 평범치 않은 부분이야 이따금씩 느적거리는 꼬리 지느러미가 있는 치마 아래 부분이다. 투명하고 맑게 비치는 물 속에서 훤히 보이는 지느러미는 아마도 파랑색인 것 같았다. 빛이 비추거든 비늘이 반짝거렸다. 물 속에 있던 인어는 당신과 눈이 마주쳤고, 그때 당신에게 들린 목소리는 울먹거리는 것 같기야 했다지만 예쁜 목소리임이 확실했다. 신기한 일이다. 인어는 입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인어는 곧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어 처음 봐? 대답 안 해?”

물 속에서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착 내려 앉는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대낮임에도 이런 모습으로 무방비하게 꼬리를 내놓았는데 난데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등장이라니 달갑지 않았다. 경계심이 말투와 목소리에 뚜렷히 드러났고, 그리고 차마 숨기지 못한 불안도 함께했다. 겁을 내고 있는지 가시를 돋친 고슴도치가 벌벌 떨고 있기라도 하는 것마냥 말투와 목소리만이 날서있었다.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두 손이 그 증거였다.

23 이름 없음 (cfiavu88qo)

2021-09-21 (FIRE!) 15:11:55

>>22

하늘은 맑고,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날씨엔 산책을 하지 않으면 역시나 곤란하단 말이지. 하지만 아무런 의미없이 그저 한가한 시간을 때우려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은 아니다. 애초에, 여기 산책 코스가 아닌걸? 그렇게 얼핏봐도 낡아보이는 책을 들고 바닷가에 온 내게 놀랍게도 첫 시도만에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 도감번호 22번, 인어. 인외의 존재이지만 인간들 사이에 섞여 생활하기에 그 존재를 쉬이 눈치채기 어렵다. 가끔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상당히 아름답다고 한다. "

바닷가의 인어가 내게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아 조금 가까이 다가간다. 확실히 아름다운 외모라 사람들이 인어에 왜 홀린다고하는지도 알 것 같았고. 그리고 인어들은 대게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라고 여기 적혀있네.

" 안녕. 혹시 실례지만 네 그림을 여기에 좀 그려도 될까? "

증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던 이 책은 여러 인외의 존재들의 정보와 그림이 실려있다. 그냥 간단하게 도감이라곤 하지만 요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의미가 안좋잖아, 대부분 인간한테 무해한데. 하지만 역시 인외의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많은 그림들이 비어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그림들을 채우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학생이라 이 근처가 전부지만.

"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나는 조금 특별한 인간이고 특이한 사람일뿐이니까. 여기에 그림만 그리고 갈께. "

어떻게, 안될까?

24 이름 없음 (fgwbm1mVF6)

2021-09-21 (FIRE!) 15:36:08

>>23

“뭐?”

도감번호 22번.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예로부터 인간에게 정체를 들켜서, 인간과 얽혀서 좋은 끝을 본 인어는 드물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육지에, 인간 사회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같은 인간조차 구경거리와 희롱거리로 삼아 유희를 즐기던 동물에게 좋은 감정은 없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던 인어의 몸이 뒤로 물러난다. 수면에 이는 파동은 작은 파도 뿐만이 아니라 몸의 떨림도 그 원인이었다. 저 인간의 손에 붙잡히면 해부당하고 마리라. 눈꼬리에 금방 굵은 물방울이 맺히더니, 아룽거리다 바다 위로 데굴 굴러 떨어진다.

“그림만 그린다는 걸 어떻게 믿어. 어린 인간은 더 잔인해.”

이제는 아예 겁을 먹어 움츠린 인어는 날이 선 목소리조차 내지 못 했다. 눈물 방울은 계속해서 맺히고 떨어지고를 반복하였으며, 인어는 도망칠 방법을 강구 중이었다. 바닷속으로 도망쳤다가는 바닷속 저 깊이 원래 인어들이 나고 사는 곳을 들켜버릴까 걱정되었고, 육지 위로 올라 달려보자니 자신의 인간 다리를 다루는게 서툴었다. 어설픈 뜀박질로는 금방 잡히고 말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인간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조차 수치스러운데 울음 소리까지 내기 싫었다.

“이러니까 계속 바다에 살고 싶었던건데….”

이것은 인어의 목소리가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목소리가 울먹거리던 이유였을테다. 조그맣게 울먹거린 인어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채로 푸른 하늘 아래서 눈물 방울을 반짝거렸다.

25 이름 없음 (ir04qPY3N2)

2021-09-21 (FIRE!) 16:06:53

>>24

어, 우는거야? 우는거야?! 정말 단순하게 그림만 그리러 왔는데, 말 몇마디 걸었을뿐인데 갑자기 울어버린다. 아직 아무런 짓도 안했는데 울어버리면 나도 당황할 수 밖에 없다. 펜을 들고 있던 손이 너를 향해 있다가 당황해 펜 끝이 살짝 떨린다.

" 너도 어리잖아! 너 교복이 근처 고등학교 교복인데, 나는 바로 옆학교에 다니고 있거든. "

어린 인간이 더 잔인하단 말에는 동의하는 편이고 지금도 인어가 있다는 말이 들려오면 잡아가려고 난리가 나겠지.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는, 도감을 채워넣는 사람들이 무조건 지켜야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무조건 지켜줄 것'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내 앞으로 떨어진 막대한 유산은 그저 내가 놀고먹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건 목적을 갖고 있으니 나는 그것을 지켜야한다. 그게 할아버지가 어떤 것과 한 약속이라고 했으니까. 그 댓가로 막대한 부를 약속 받았고 아버지까지도 그 의무를 성실히 하고 계셨다.

" 정말 그림만 그릴께. 정 못믿겠으면 어떤 방식으로 약속을 해도 좋아. 인어는 인어만의 방식이 있을테니까. "

증조할아버지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도감은 이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한 서적으로 그 목적이 변했고 아직도 채워지지 못한 많은 그림들을 채워넣어야할 의무가 있다. 내가 채워넣을 수 있는 첫번째 페이지를 이렇게 쉽게 날려보낼 수 없지.

" 약속을 어긴다면 어떤 저주라도 달게 받을께. "

진지하게 너에게 말해본다. 그래도 여기서 도망간다면 기회는 아예 날려버리는 것이겠지만.

26 이름 없음 (fgwbm1mVF6)

2021-09-21 (FIRE!) 16:44:00

>>25

“인어 나이로는 성년 지났어!”

이제는 학교까지 들켜버렸어. 학교를 뒤져서 학생 하나 찾아내는게 어려운 일도 아닐테고, 이제 어딘가로 끌려가서 연구 대상이 되는 건 시간문제야. 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인어가 바닷속에서 저체온증으로 죽었다는 웃긴 이야기가 생기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인어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나 싶더니,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쳐냈다. 눈가는 금방 빨갛게 올라왔다. 인어의 눈물은 진주가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때문에 잡혀가 죽은 인어도 있는데, 인간이 바다를 오염시켜서 인간들과 섞여 살아야한다고 했다. 바다에는 쓰레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고 아무리 깊고 머나먼 바다로 떠나봤자여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인어는 성년이 되면 육지로 올라온다.

“저주같은 거….”

그런 거 할 줄 알 리가 없잖아. 옛날에야 인어로서 계속 바다에 살아가니까 다들 배우고 알아뒀겠지만, 지금은 다들 성년이 되면 육지로 올라오는데 저주같은게 계속 이어진다고 해도 알고 있지는 않았다. 인어는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죽음을 감수하고 너를 믿어야한다면, 너도 죽음을 감수하고 나를 믿어줘. 물기어린 손이 당신을 향해 뻗었다.

“너도 들어와서 약속해. 숨 모자르면 내 숨 나눠줄게.”

인간도 바닷속에서 숨 쉴 수 있는 방법. 인어의 숨을 나누면 된다. 이 방법으로 여러 인어들이 여러 인간을 살렸다. 단순히 손가락만 걸고 약속하겠지만, 바닷속에서는 쉽사리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한 당신이 바닷속까지 따라 들어와준다면 그림만 그리겠다는 말에 대한 믿음은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27 이름 없음 (ZcNQ6BSMpo)

2021-09-21 (FIRE!) 17:29:16

>>26

아, 나랑 비슷해보이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다던가 .. 아니면 인어는 인간보다 성년이 되는 시간이 짧은건가? 뭐가 됐던간에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저렇게 울어버리는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좀 마음이 아프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들을 배척해오곤 했으니까. 호기심이던, 악의던간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라고 도감 가장 첫 페이지에 써있는 할아버지의 메모처럼 인간에 대해 무한한 적대감을 가진 것들도 존재하곤 했다. 기본적으론 무해하다고해도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 물 안에 들어오라고? "

흠칫한다. 육지는 나의 영역이지만 물 안쪽부턴 인어의 영역, 상대가 적의를 품으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수도 있다. 거기에 어릴때 강에 빠져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바다는 서서히 얕아진다곤 하지만 아직까지도 물이 허리 위로 올라오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나에겐 너무나도 나쁜 제안이다.

" 아니, 정말 나는 나쁜 짓을 할 마음이 없는데. "

라곤 말해도 나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게 설득력이 없다. 상대방이 하는건 뭐든 하겠다고 해놓고 물이 무서워서, 인어가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게 어이가 없기도 하다. 물에 젖은 손이 나를 향해 뻗어왔고 흔들리는 눈으로 그 손을 바라보던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서서히 인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자갈이 널린 해변을 지나서 신발에 파도가 스친다. 찰박, 찰박하던 소리는 발가락 사이사이로 물이 들어차는 느낌과 함께 사라지고 차가운 느낌이 발목부터 서서히 올라온다. 인어가 있는 곳은 더 깊은 곳이라 금방 허리까지 차오른 바닷물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 나 정말 물이 무섭거든? 지금도 심장이 쿵쾅쿵쾅거려. "

여러번 심호흡을 해도 심장박동이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보인다. 몇발자국을 더 가야하는데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가 없어서 그저 너를 바라보고만 있다. 아빠, 어쩌면 생각보다 아빠를 일찍 보러갈 것 같아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질끈 감고, 나는 천천히 한발자국을 내딛는다. 차가운 감촉이 서서히 상반신을 덮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보지 않으면 조금은 괜찮은 것 같다. 그렇게 눈을 감고 손을 뻗은채 네가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28 이름 없음 (rH8IoGd9Yk)

2021-09-21 (FIRE!) 23:40:23

그녀는 추위로 얼어붙은 나무 사이를 다람쥐마냥 돌아다니며 습기를 머금은 것 사이에서 능숙하게 크기가 있고 상태 좋은 나뭇가지들을 골라내더니, 짧은 시간에 제법 많은 양을 품에 안아 들고서 작게 중얼거렸다.

" 이 정도면 되려나? "

꼼꼼하게 골랐지만 그럼에도 성이 안 차는지 여자는 나뭇가지의 이곳저곳을 돌려보며 한참을 확인하고 나서야 지금까지 향하던 방향과는 정 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목까지 -사실 발목보다 조금 더 높게 쌓인 눈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여 새하얗고, 비슷한 생김새의 나무로 들어차 있었다. 이처럼 사방이 똑같은 풍경 속에서도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지도를 꺼내지도 않고 주변 한 번 둘러보지 않는 그녀는 마치 이곳의 지리를 전부 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그녀는 저 멀리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나 왔어요-."

그녀가 도착한 곳은 나무로 지어진 -그러나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듯 보이는 집의 문 앞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모닥불의 밝은 빛이 새어 나와 바닥에 쌓인 눈을 주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작은 틈으로는 따뜻한 코코아 향기도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어깨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 너무 뜬금없거나 이상한 상황만 아니면 괜찮으니까 자유롭게 이어줘!

29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00:16:10

>>28

산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마을 뒷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숲이 우거지고 생각보다 위험한 동물들이 많아 이곳의 산장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곳이면서도 위험하다. 마을 대대로 산장지기를 맡아온 그의 집안이었고 그도 산장지기가 된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위험할 때가 종종 있었기에 겨울에는 입산을 금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 한명 있었으니.

" 겨울에는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 "

눈이 오지 않아도 위험한 겨울산에 눈이 이렇게나 잔뜩 왔는데도 올라오다니. 정말 산신령님이 지켜주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에겐 항상 큰 의문이었다. 자신도 돌아다니면서 곰을 종종 만나는데 어떻게 그녀는 한번도 그럴때가 없는지. 그리고 그녀는 항상 땔감이 다 떨어져갈때쯔음 땔감을 한가득 들고 오곤 했다. 마치 여기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궁금증이 생겨가는 항목이다.

" 곰이라도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

이렇게 말한 것도 수십수백번이라 톳씨도 안먹힐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하는 그였다. 자연스럽게 의자를 내어주면서 그녀에게 권유한 그는 코코아 가루를 컵에 넣고선 난로 위의 주전자를 들어 붓는다. 은은하게 퍼지던 코코아 향기가 더욱 진해지고 여자에게 코코아를 건네준 산장지기는 다시 본래 앉아있던 곳에 등을 깊숙하게 묻는다.

" 여기 올라오는 것도 만만치 않을텐데 안힘들어? "

물론 야트막한 산이라 산세가 험하지는 않고 산장까지 오는 길도 잘 닦여있어서 평소엔 괜찮지만 지금은 눈이 잔뜩 와있을때다. 산장까지 올라오는 길은 대충 눈을 치워두긴 했지만 그래도 올라오는게 힘들었을텐데 항상 가벼운 몸놀림으로 슉슉 올라오는 것이 여간 신기한게 아니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30 이름 없음 (9Xy1OOj/xU)

2021-09-22 (水) 02:07:10

>>29

" 괜찮아요. 여길 누가 지켜주는데 제가 위험할까요. "

그녀는 마치 영역을 과시하는 고양이처럼 뿌듯한 표정과 당당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저가 없었으면 그가 귀찮게 나무를 구하러 나가야 했을 거라면서 뻔뻔스럽게 칭찬까지 요구했다.

" 그리고, 이렇게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요. "

상대는 심심하다는 말이나 의견을 내비치지도 않았는데 잘도 혼자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자연스럽게 모닥불 앞으로 향했다. 곧 불에서 얼마의 거리를 두고 천을 깔더니 모아 온 나뭇가지를 말리려는 듯 그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 지금까지 잘 피해왔으니까 괜찮아요. 전 여기서 곰의 'ㄱ'자도 본 적 없는걸요? 그리고... "

가져온 땔감의 정리를 마친 그녀는 그가 권해준 의자에 앉으며 수십수백 번이나 들어온 그의 말을 수십수백 번째 자연스럽게 넘겨버렸다. 곧 고맙다 말하며 코코아를 받아들고는 오히려 중요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려는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조금 숙이며 당신에게도 몸을 낮추라 팔랑팔랑 손짓을 해 보였다. 이 날씨에 이곳에 올 사람도 거의 없고 집에도 이들 이외의 외부인은 없을 테지만,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근처의 누군가가 듣는걸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사실 전 눈의 요정이라서요. 곰이랑 만나도 제가 이겨요. "

어른이 되어서는 한참 작은 어린아이들이나 할법한 -심지어 이젠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는 농담을 진지하게 말하더니 결국 본인도 우습게 느껴졌는지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 전혀요-. 음, 사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코코아만 마시면 전부 사라져서 괜찮아요. "

바로 여기 앉아서요.
자신의 지정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앉은 자리에서 발을 톡톡 구르며 장난스레 웃었다. 눈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어렸을 적부터 겨울만 다가오면 항상 이리저리 쏘다니며 눈을 헤치고 다녔던 탓인지 이런 날씨는 그녀에겐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곳에 찾아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딱 한 번, 눈에 빠져 넘어질 뻔했던 날이 있었지만 이것도 하루가 지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눈의 요정이라는 말도 틀리지는 않는 듯 싶었다.

31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02:38:31

>>30

말해도 듣지를 않으니 포기를 할법도 한데 산장지기는 그럴 생각이 없어보인다. 보통의 산장지기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많이 젊어보이는 그는 이 눈 앞의 여자가 겨울에는 안전하게 따뜻한 집안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엔 산장에서 지내야하는 그도 내심 그녀가 올라오는 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숨기고 있을 뿐이다.

" 그래도 다음부턴 올라오지마. "

항상 이런식으로 잔소리가 끝이 나지만 또 다음에 올라올테고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그렇게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여자가 늘어놓은 나뭇가지들을 솜씨 좋게 다시 놓는다. 조금 두께가 있는 것들은 앞쪽으로, 얇은 것들은 뒤쪽으로. 빠르게 일을 마친 산장지기는 여자가 늘어놓는 말에 헛웃음을 지어버린다. 눈의 요정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 그래도 한번도 곰을 안만나는 것을 보면 정말 뭐가 있나봐. "

물론 곰을 만나는게 쉬운 일은 아니고 주기적으로 총성을 내서 곰의 접근을 막곤 하지만 겨울이라 먹잇감이 부족한 곰이라 겨울에 몇번은 마주치곤했다. 산장지기도 약간의 긴장을 하고 지내는 곳에서 저렇게 천진난만한 태도라니 본인은 아니더라도 정말 눈의 요정이 지켜주는거 아닐까, 하고 산장지기는 생각한다. 그래도 곰이랑 만나는 일은 없게 해야하니까 내려가는 길엔 산장지기 본인이 동행할 생각이다.

" 나도 어릴때 아버지를 따라서 산장을 올라와서 마시는 코코아가 제일 맛있었어. "

산장을 물려받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전 산장지기, 그러니까 남자의 아버지는 산속의 조난자를 구하러 갔다가 곰에게 습격 당해 명을 달리했다. 산에 가까운 마을은 산장을 지키는 자가 없으면 겨울산의 곰이 마을로 내려오는 일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산장을 지켜야했고 결국 대를 이어서 그가 선택된 것이다. 물론 언젠간 자신이 맡아야하는 산장이었기에 불만은 없었지만 그도 긴 겨울을 혼자서 보내야한다는 사실에 간혹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 이장님은 잘 계시니? 듣자하니 몸이 안좋으시다고 하던데. "

마을 소식은 주기적으로 올라와서 식량을 내려놓고 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다. 곰의 습격에 대비해서 여러명이 우르르 몰려와 짐을 내려놓고 안부를 주고 받곤 하는데 산장지기는 그때를 가장 좋아했다. 음식이 생기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잔뜩 있어서. 하지만 이렇게 혼자 올라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또한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거실 겸 부엌과 방 두개로 이루어져있는 작은 산장에서 그는 말린 육포를 가져와 뜨거운 물에 불린다. 산속이라 혹여 불이 날까 난방을 제외하고서 불은 최소한으로 쓰고 있었기에 주로 먹는 것도 이런 육포 같은 저장식들 뿐이다. 그러다 여자를 바라본 산장지기는 찬장에서 작은 과자를 꺼내서 건네준다.

" 너가 좋아하는 과자지? "

저번에 마을 사람들이 가져왔던 것이다. 최근에 눈이 많이 와서 식량을 가져다주는 횟수가 줄어서 이런 간식거리는 아끼고 있었지만 여자에게도 육포를 줄수는 없었으니까.

32 이름 없음 (mL4eO9bFNU)

2021-09-22 (水) 08:49:43

>>31

" 음-. 생각해 볼게요. "

진지한 척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곧바로 가볍게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곤 장난스레 거만한 표정을 보이면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다. 지금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기어코 다시 이곳까지 올라올 테니 사실상 어떤 대답이 나오든 무의미한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한숨에 숨죽여 웃더니 더이상 말도 않은 채로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명화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크기별로 착착 정리되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신기하고 즐거웠다.

그녀는 뭐가 있나보다는 그의 말에도 그저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사실, 뭐라 말해주고 싶어도 그녀 역시 자신이 곰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던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은 혹여 이곳으로 올 때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곰을 쫓아내기라도 하는 건가 싶어 산장으로 향할 때 들고 갔던 물건들을 전부 떠올려보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곤 애초에 마을 사람들도 가지고 있을 것들 뿐이었다.

" 어쨌든, 덕분에 이렇게 만날 수 있잖아요? "

결국 그녀가 내놓은 건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이 되어주지 못했다.

" 그럼 이건 대대로 내려오는, 산장지기의 특별한 코코아네요? "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에 들린 코코아잔을 조금 들어보였다.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는 곰으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을 겪고, 또 겨울이 오면 산으로 올라가는 그들을 보며 산에서 떨어진 곳으로 마을을 옮기면 곰으로 사람이 죽는 일도 없고 누군가가 외롭게 산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장님에게 찾아가 철없이 마을을 옮기자 울며 떼를 쓰기도 했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나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게 되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겨울이 되면 직접 산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약을 드시고, 지금은 조금 나아지셨어요. 별다른 일만 없다면 이제 괜찮을 거라곤 했지만... "

그녀도 이장님의 상태가 쉽게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직접 두 눈으로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는 괜찮다는 말의 대부분이 사실은 희망 사항에 가깝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다른 계절 -이를테면 여름이나 가을보다 유독 겨울에 앓는 병들이 더 지독하고 끈질겼다. 이장님이 앓고 계신 병도 원래는 그리 위험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이 때문인지 계절 때문인지 약을 먹어도 큰 효과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 아, 맞아요! 좋아해요! "

그녀는 컵을 내려다보며 잠시 조용히 있다가, 그가 과자를 건네자 반가운 걸 본 것처럼 좋아하며 말했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녀의 손은 그가 준 것을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본인이 들고 온 가방을 집어 그곳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려했다.

"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요. "

" 바로, 이게 있으니까요. "

그녀는 가방 안에서 와인병과 주머니를 꺼냈다. 그녀가 꺼낸 주머니 안에는 사탕 조금과 비스킷, 아몬드와 호두, 작게 잘려 포장된 치즈 조각 따위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러면서 안주가 되려면 과자도 좋지만 육포가 더 좋지 않겠냐며 웃었다. 가져온 와인은 아직 손대지 않은 새것인지, 살짝만 흔들어도 제법 묵직한 찰랑거림이 느껴졌다. 내려갈 생각을 하고는 있는 것인지 아주 작정을 하고 가져온 듯 보였다.

33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13:15:16

>>32

어차피 그도 여자가 말을 들을거란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한다고 올라오지 않을 사람이라면 진즉에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 장난스럽게 보여주는 표정만 보아도 그녀가 앞으로도 쭉 산을 오를 것이라는걸 누구나가 알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산장지기는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아무리 홀로 지내는데 익숙해졌다고해도 사람인 이상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으니까. 내심 그녀가 올라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남모를 걱정을 하기도 했다.

"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함께 마셨을테니 정말 그 말이 맞을지도. "

물론 들어가는건 평범한 코코아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마시는 코코아는 특별하니까. 어릴땐 산장에 올라가는게 무섭기도 했고 힘들어서 가기 싫다고 칭얼대곤 했지만 산장에 올라와서 마시는 코코아와 아버지가 내어주시던 간식들을 먹으면서 힘들었던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간혹 곰을 마주치면 정말 무섭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지켜주시던 아버지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러다 여자의 말에 산장지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다.

" 이장님도 나이가 많으시니까, 슬슬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시면 될텐데. "

이장님은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지만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정정하신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력이 쇠하셔서 한번 아프시기 시작하시더니 좀처럼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비록 산장에 올라와있었지만 그에게도 꽤나 걱정거리다. 마을 일은 아들에게 맡기고 편히 쉬셔도 괜찮을텐데 고집만큼은 나이가 들어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 그건 또 어디서 가져왔어? "

요즘 같은 세상에 와인 구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렇게 묵직한걸 보면 무거울텐데 저런걸 들고 여기까지 잘 올라오다니. 산을 매일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산장지기에게도 그것은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그가 창 밖을 바라보니 눈이 조금씩 다시 내리고 있었고 바깥 기온을 보여주는 온도계가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다시 추워지려는걸까, 산장지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새 컵을 두개 가져오며 말했다.

" 조금만 마시는거야. "

그녀가 가져온 여러 안주거리들은 여기선 꽤 먹기 힘든 것들이라 맛있어보이긴 했지만 산장을 지키는데 술에 취해버리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하산할때 산 입구까진 같이 내려가줄 생각이라, 적어도 제 정신을 붙잡을 정도까지만 먹어야했다. 하지만 산장에서도 혼자 술을 홀짝대며 마시는 산장지기에게 이 정도 술은 음료수에 불과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여자가 몸을 못가누면 산에서 위험해질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먹이곤 내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술을 받아서 코르크를 딴 그는 잔에 반 정도 채워서 여자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몫도 따라서 와인병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흘리지 않게 마개를 다시 꼭 닫은채로.

" 여긴 왜 자꾸 올라오는거야, 심심해서? "

마을이 좀 더 놀기 좋지 않나, 하고 생각해본다. 그의 친구들도 마을에 있고 그녀의 친구들도 마을에 있다. 그리고 음식점이나 술집 같이 놀기 좋은 공간이 마을에도 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오는지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다.

34 이름 없음 (qbY3nsMYTA)

2021-09-22 (水) 17:46:25

>>33

" 그럼 나중엔 당신의 아들도 코코아를 마시러 오려나요? "

혼자서 멋대로 당신과 작은 -그리고 당신의 머리카락이나 눈 색을 똑 닮은 어린아이가 그와 함께 산장에서 코코아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지 코코아가 담긴 자신의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가, 대충 아이의 키 높이 즈음까지 내려보며 웃었다. 그녀는 조용함이 아니라 사람의 말소리로 가득 찬 산장을 떠올리며 컵의 마지막 남은 코코아를 쭉 마셨다.

"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던 분이니까요. 아마, 쉽게 놓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

그녀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가라앉았다. 자리를 물려주면 된다는 그의 말에, 일은 자신에게 맡기고 쉬시라며 이장님과 그 아들이 실랑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양쪽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 탓에 생기던 그 작은 다툼마저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이장님의 병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꾸만 일깨우게 만들었다. 그녀는 먹먹해진 기분으로 조용히 컵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 당연히 집에 있는걸 가져왔죠. "

그녀의 부모님이 와인을 좋아했던 탓에 집에는 온갖 종류의 와인들이 보관되어 -정확히는 수집되어 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과 동생에게 나이가 차면 조금은 꺼내 마셔도 된다고 했으니 한 병 정도는 가져와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당신을 따라 고개를 들고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그가 가져오는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잔에 술을 따르는 동안 작은 허밍과 함께 주머니를 펼쳐 안에 있는 것들을 골라먹기 좋게 분류해 두었다.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작은 노래가, 그녀가 지금 즐거워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 정말 조금만 마실게요. 걱정 마요-. "

잔을 건네받자마자 벌써 한 모금 마셔버린 그녀는 그에게 한 말과 다르게 혼자 병을 전부 비워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신난 듯 보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마시는 술의 양이 많지도, 속도가 빠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 음, 이유는 없어요. 그냥 보러 오는 거죠. "

보려는 것이 겨울 산의 풍경인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그 대상이 당신이라는 듯 분명하게 그를 보고 웃었다. 그녀의 친구는 분명 마을에도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도 있었다. 그녀는 항상 마주치는 마을의 친구들도 좋았지만, 좀 더 자주 -특히 겨울이 오면 보기 어려운 친구를 보러 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친구란 이유가 없어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맛있는 것을 먹는 그런 사이였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 좋을 대로 그를 친구라 정의하며 계속 그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

" 사실 이 귀한 것도 놓칠 수 없긴 하고요. "

그녀는 술 보다는 달콤한 것을 조금 -아주 조금 더 좋아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곳의 코코아만큼 훌륭하고 완벽한 것은 없었다.

" 왜요? 설마... 내가 오는게 싫은 건 아니죠? "

그의 질문에 잘 대답하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짓궂게 그를 향해 불쑥 질문했다. 말투는 마치 그를 추궁하는 듯 보였지만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볍고 약간 장난스러웠다. 이번에도 그녀는 무슨 대답을 듣더라도 -설령 정말로 싫다는 대답이 들려오더라도 웃어넘기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처럼 언제나 그랬듯 자연스럽게 다음에도 이곳에 올 터였다.

35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21:13:19

>>34

" 아들이 생기면 그렇겠지? "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아들이 생길거라곤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귀어본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가 벌써 1년여전이고, 그렇게까지 오래 사귀어본 기억도 없다. 어쩌면 인생에 여자라고는 연이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하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이렇게 외로운 산장지기라는 일을 대물려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여자의 말에 산장지기는 그저 컵만 만지작거릴뿐이었다. 이장님의 아들은 남자의 아버지의 친구였다. 이장 자리 때문에 이장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여러번 보곤 했다. 큰소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들분도 이장님을 닮아 한 고집하셨기에 그런 자잘한 다툼은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었다. 이제 이장님의 병이 깊어지시고 언젠간 이장 자리를 물려받으시지 않을까, 산장지기는 말없이 생각한다.

" 그 집에는 술이 많았으니까. "

아버지가 가끔 그 집에서 와인을 얻어오곤 했던 사실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이 술도 대충 집에서 가져왔을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거기서 가져왔다니. 그래도 술을 좋아하시는만큼 보는 안목도 좋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조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와인을 바라본다. 그렇게 와인을 따라서 건네주자 말과는 다르게 신나보여서 빠르게 다 마셔버리는게 아닐까 싶어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럴 생각은 없어보여 남자도 와인을 한모금 마신다.

" 보러오면 나야 좋지만. "

산장에서의 삶은 외롭기에 여자가 온다면 그에게는 좋겠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겨울 산길을 계속 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다음부터는 올라오지말라고 하고 싶어도 외로움에 이미 지쳐버린 그가 그렇게 모진 말을 내뱉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산장 밖의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면 느껴지는 설렘도 더이상 막을 방도가 없었다.

" 싫은건 아니지만. "

벽난로의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남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자신이 하는 말이 부끄러워서일까.

" 싫다고 해도 어차피 올라올거잖아. "

그가 아는 여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도 저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싫다고해도 올라올께 뻔했다. 그만큼 뻔뻔스러웠지만 그만큼 능글맞은 사람이라 산장지기가 항상 말려들어가는 그런 사람이다.

36 이름 없음 (Yvdwalg5uE)

2021-09-22 (水) 23:33:53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외국으로 떠나 바이올린 쪽으로 유학을 간 소년은 24살이 되어 7년만에 다시 돌아왔다. 어렸던 소년은 늠름한 청년이 되어 조국의 땅을 밟았다. 유학을 간 동안에는 단 한번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래도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과는 나름대로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연락을 나눠 최소한의 교류는 유지했다. 그 덕분인지, 오늘 귀국할 때 마중 나온다는 친구가 있었고 사내는 정말로 나와줄지 나름대로 기대를 하며 소속을 밟고 자신의 짐이 들어있는 캐리어와 바이올린 케이스를 챙기고 공항을 걸었다.

"정말로 있을까."

최소한의 교류가 있었다고는 하나, 다시 만나는 것은 칠년만이었다. 과연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을 하며, 혹은 그냥 말로만 그런 것이고 아무도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며 사내는 게이트 밖으로 나온 후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얼굴이 눈에 보이진 않았는지 사내는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릴 뿐, 좀처럼 발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있다면 인사를 하겠으나, 보이지 않는다면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역시 한두번은 돌아올걸 그랬나. 공부의 흐름이 끊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쭉 있긴 했는데."

/뜬끔없이 쫓아내는 전개나 맥커터만 아니면 누가 나오더라도 환영!

37 이름 없음 (oT.DHfURi.)

2021-09-23 (거의 끝나감) 06:14:15

>>36 그런 친구가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은지 7년은 넘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주 전화하고 톡을 주고 받아 고등학교 동창이라기보단 지인에 가까워진. 그렇다고 해도 공항 마중까진 좀 과하지 않아? 라고 생각했지만 의미없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그 친구가 귀국하는 날 모두들 기상천외한 일정들이 있어 마침 연주회를 마치고 쉬고 있던 수연에게 바톤이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평일이고 전공을 살려 음악가가 된 친구들 말고도 졸업이며 회사에 일정이 잡힌 친구들도 않았으니까.

얘는 왜 하필 애들 졸업시즌에 귀국했담. 뭐 내 알바는 아니지만. 드뷔시의 달빛을 작게 허밍하며 버릇처럼 유리로 된 펜스를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던 그는, 게이트에서 하나 둘 사람이 빠져나오자 준비해둔 이름 석자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사람이 어느정도 빠지고, 사람들 사이에 아직 두리번거리며 서 있는, 아마도 나와 동년배인 것같은 동양인 남성이 보였다. ...걘가? 마중은 나가겠다고 톡방에는 알렸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나왔을 가능성이 보다 컸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아직 사람이 남아있긴 하니 이상해보이지는 않겠지.

"여...여기."

아, 이거 진짜 어색해. 집에 가고 싶다.

38 이름 없음 (WFD45kwC4Q)

2021-09-23 (거의 끝나감) 07:16:07

>>37 누가 나와도 환영이라고 했지만 마중 나오는 것 자체를 어색해하고 불편해하고 어쩔 수 없이 나왔다는 전개는 조금 애매하네. 일단 흔쾌히 나왔다는 것을 가정해서 써서 말이야. 그러니까 이 답레는 미안하지만 패스할게.

39 이름 없음 (7EILlj9wo.)

2021-09-23 (거의 끝나감) 10:30:09

코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따뜻한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잠결에 무심코 콧물이겠거니 코 밑을 훑었고, 제대로 닦아내 손에 그 무언가 묻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다시금 코에서 무언가 흘렀고, 훌쩍거려도 계속 흐르는게 콧물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자니 퍼뜩 깨달았다. 코피다!

"우와...?"

손으로 코를 막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는 피로 기도가 막혀 질식사할 수도 있다나 뭐라나.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서 다급하게 휴지가 될만한 걸 찾아보려니, 내가 있는 곳은 계단이었다. 무릎에는 내가 필기한 노트와 문제집이 놓여있었고, 옆에는 교과서 두세 권과 다른 문제집 한 권, 또 다른 노트 하나. 맨 위에는 열려있는 필통이 놓여있었는데, 어째 배가 불렀어야 하는게 텅 비어 있었다. 밑에서부터 세칸 위쯤의 계단에 앉아있던 나는 그 아래를 살펴 보았다. 필통에 담겨 있어야할 펜들을 비롯한 필기구들이 죄 쏟아져있었다. 아직 취해있는 잠을 떨쳐내려 하며 생각해보니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졸려서 계단으로 나왔돈 기억이 났다. 그리고 여기에 앉아 차가운 계단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짐에 따라 식고 있는 공기에 서늘함을 느끼면서, 잠이 깨는 것 같다며 공부를 이어하던 것 같은데... 깜빡 잠들며 필통을 엎고, 그것도 모르고 계속 졸다가 코피가 나서 깬 상황이라 추측한다. 그래, 지금 나는 코피가 나는 와중에 계단에다 내 짐을 어질러 놓았고 휴지가 없는 노답 상황이구나!

"오. 어. 아. 조, 좀비 아니에요!"

어이없는 상황에 실성이라도 한 것마냥 웃음이 새었다. 이걸 어쩌면 좋지, 노답이네! 코피 그치면 친구들한테 얘기해줘야겠다, 근데 일단 어쩌면 좋지. 화장실 갔다오는 사이에 누가 계단에 오면 이걸 치우려나. 으악, 이제 코피난 거 손에서 넘치겠는데! 얼 빠진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손으로 그칠 생각 없는 코피만 바치고 있었다. 정말 어쩌면 좋나, 주변에 휴지, 아니 그 대신할만 한 것이라도 없나 두리번거리다 누군가를 발견한다. 계단에 뻗어 있다가 코피 흘리며 일어나 웃음 소리를 흘린 사람이, 모르는 사람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만 같아 다급하게 외쳤다. 좀비 아니라고. 근데 나 너무 쪽팔려! 차라리 좀비할래!

40 이름 없음 (ncngc5gXqQ)

2021-09-23 (거의 끝나감) 12:27:18

>>39

도서관보다는 창고에서 신나게 기타나 치고 싶었지만 이번 시험을 망쳐버리면 내 기타의 넥이 분질러지게 생겼기에, 억지로 도서실에 나와 공부를 하다가 오래간만에 가물가물한 내용들을 붙잡고 씨름을 하자니, 적응을 하지 못한 머리가 아파 도서실을 잠깐 빠져나와서 편의점에 들러 두통약과 에너지드링크를 마시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깥 공기를 조금 쐬니 그래도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꼭대기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부르기 귀찮아 층계참을 돌아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문득 계단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무슨 일이야? 싶어서 후다닥 발걸음을 서두르는 찰나... 층계를 내딛은 발이 노트인지 코팅된 인쇄물인지 모를 뭔가를 밟고 쭐쩍 미끄러졌다. 그대로 세상이 한 바퀴 휘릭 돈다 싶더니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아이고......"

다행히 뒤로 나자빠져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고꾸라져서 책이며 노트들이 엎질러진 층계참에 헤딩을 박은 상황. 난간을 잡고 일어서도 시야가 흐릿하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슬랩스틱 코미디겠지만 1인칭으로 보면 코앞에서 폭탄이라도 하나 터진 느낌이다. 놀라운 사실은 생각보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는 점이다. 놀랍도다, 아세트아미노펜. 그 덕분에 생각보다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난간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었다(내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나보다도 지금 어쩔 줄 몰라하는 저 사람이 좀더 곤경에 처한 것 같아 바라보면 온통 피에 절어있는 손이며 얼굴이.

내가 쪽팔린데다 무엇보다 엄청 실례되는 일이지만,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난간을 붙들고 있어서 망정이지 이번엔 진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우와악."

하고 놀라서 보면, 지금 귀신이나 헛걸 보는 건 아니고.. 코피를 흘리고 있을 뿐인 그냥 사람이다. 띵한 머리로도 매우 실례했다는 자각이 들어 반사적으로 사과가 나갔다. "어... 아니 그... 죄송..." 한꺼번에 여러 일이 벌어진데다 물리적 충격까지 받아 아직 멍한 뇌를 붙잡고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휴지가 있던가? 하고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려 보면 잡히는 거라곤 손수건밖에. 오. 이 상황에서 쓸모있는 물건이잖아.

"저기요, 이거라도."

띵한 머리를 붙잡고, 손수건을 내민다. 그제서야 뭘 밟고 미끄러졌는지 발밑으로 시선을 돌릴 만한 정신이 든다. 노트니 참고서니 교과서니 하는 것들이 땅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이것도 주워줘야겠네.

41 이름 없음 (8TY5.RrNDM)

2021-09-23 (거의 끝나감) 14:42:48

>>40

뭐, 뭐야. 좀비 아니라니까 왜 급해져? 사실 이쪽으로 발을 재촉하는 저 사람이 좀비라서, 내 피 냄새를 맡고서 여기로 오고 있던 거야? 내가 방금 소리 내서 위치 확인하고 오는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좀비가 어딨겠어. 그렇지만, 지금 나와 가까워지고 있는 저 누군가 사람이든 좀비든 당황스럽기는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여기로 갑자기 왜 오는지, 뒤로 물러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책이고 펜이고 다 어질러놨으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가는 분명 코피가 발자국으로 남을 것이다. 옷이나 책에 묻으면 곤란하기 그지없다.

"힉?!"

여러모로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계단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코피 흘리면서 깬 상황도 충분히 잠이 달아날 만 했지만, 내 바로 앞에서 넘어지며 엄청난 소리를 이 사람도 그렇다. 손이 모자라서 넘어지려는 모양새를 봤음에도 잡아주지도 못하고, 크게 넘어지는 소리에는 되레 흠칫 놀라버렸다. 놀라서 크게 떠진 눈으로 보았던 것을 되새겨보자면, 저 사람 분명 계단에 머리 박았다. 으, 아프겠다. 놀랐던 표정은 머리가 띵할 고통이 상상되어 찌푸려졌다. 어, 잠깐만. 다시 되새겨보자. 내 책인지 뭔지 밟고 넘어진 거 아냐? 어?!

"저, 괜찮..."

우와악.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나의 친절은 우와악, 하고 싹둑 잘려 나갔다. 좀비 아니라고 그랬는데! 사람이라고 외칠 걸 후회막심이었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서 엎어버린 말은 되 담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버린, 지금 내 손에 뚝뚝 떨어지는 코피처럼.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과를 받고 나니 고갯짓이라고 세차게 해주고 싶었지만, 코피 때문에 그냥 입꼬리만 끌어올리고 대답했다. "아니, 아녜요! 놀라실 만 한걸요..." 제가 좀 사연이 있거든요. 사람 놀라게 하려고 여기서 코피 흘리고 있던 것도 아니고, 누구 한번 계단에서 굴러보라고 책을 여기까지 가져온 것도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상황이 꼬여버렸네요. 구구절절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사과가 먼저니 저 머릿속 어두컴컴한 구석에 던져 놓았다.

"어. 괜찮...... 고맙습니다."

휴지도 아니고 물티슈도 아니고 손수건의 등장에 한사코 거절하고 싶었다. 저 손수건이 소중한 물건이면 어쩌나 싶어서 이를 악물고 거절하고 싶었는데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기필코 언제 피를 닦았냐는 듯 깨끗하게 빨아서, 정 안 되면 새것이라도 사서 돌려드리고 말겠다 다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코피가 그쳤다는 점이다. 손과 얼굴에 있던 핏자국은 손수건으로 옮겨갔고, 여전히 난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손수건으로 닦았다고 해도 화장실은 한 번 가야 할 거 같고, 계단을 난장판으로 만든 저것들도 치워야 하고, 손수건 주인 되시는 분께 감사 인사도 드려야 하고, 죄송하다는 사과도 드려야 하는데.

"저기. 제가 정말 죄송하고 정말 감사해서요... 1번, 여기서 기다리신다! 2번, 연락처를 넘기신다! 둘 중의 하나 골라주세요!"

42 이름 없음 (sacPqPwCKA)

2021-09-23 (거의 끝나감) 15:03:07

>>35

"음-. 그럼 다음에 올 때는 선물을 가져와야겠네요. 나중에 아이가 이곳에 왔을 때 보고 귀엽다고 할 만큼 아-주 귀여운 인형으로 말이에요. "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커다란 인형을 가져올 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덧붙이고 웃었다. 그리고 동생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처럼 이것저것 다양한 디자인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이야기했다. 사실, 그녀의 진심은 인형을 선물하는 것보다 앞으로 겪게 될 외로움이 -누군가는 끝없이 이어가게 될 산장지기의 고독함이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문제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 없이 하는 말은 그저 떼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조금이라도 이곳이 즐거움으로 채워질 방법들을 이야기하려 했다.

" 이장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분명.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요. "

나지막이 흘러나온 말은 그에게 하는 이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워 보였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빈 컵을 쥔 그녀의 손끝은 희게 질려있었다. 곧 애써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뜬 그녀는 컵을 내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려 했다. 붙잡고 있던 컵을 손에서 놓았음에도 금방 돌아오지 않는 손가락의 색깔은, 그녀가 가진 간절한 마음을 대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 마셔보길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을 거예요. "

그녀는 마을 사람들도 알아주는 부모님의 와인 컬렉션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왜 이렇게 술을 모으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된 후 와인의 맛을 알게 된 뒤에는 그녀도 비로소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기대가 담긴 듯 보이는 그의 눈빛에 당당하고도 확신 있는 말투로 맛있을 거라며 이야기했다.

"그렇죠? 좋죠? "

놀리듯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싫은건 아니라는 그의 말을 듣자, 그녀는 마치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라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살짝 붉어진 것 같은 그의 얼굴과 함께 들려오는 -그녀가 올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담긴 그의 말을 듣고 그대로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럼요, 당연하죠. 내가 누군데요. "

그녀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우아한 -그러나 과장된 몸짓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곤 당신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 마을에서 올라오는게 싫으면, 차라리 나도 이 산에 집 짓고 살까요? "

여기에 집을 더 짓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녀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던지고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오늘 저녁은 뭘 먹을 것인지 물어보는 사람 같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의 태연한 말투와 모습들은 방금 꺼낸 말이 진심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43 이름 없음 (ncngc5gXqQ)

2021-09-23 (거의 끝나감) 17:41:20

>>41

그러니까, 실수의 발단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그만 쓸모없는 오지랖이 발동해 발을 서둘러 놀린 것이고, 실수의 결정적 원인은 좀비 아니에요, 라는 말에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뭐라고 되물어보려다가 발밑을 미처 주시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순간 천지가 뒤집히는 바람에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었는지 잠깐 잊었고, 그 좀비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으로 꺼낸 말인지 깨달은 것은 이미 피범벅이 된 얼굴에 괴성을 질러버린 후였다. 아, 이 무안하고 어색한 공기...

사실 이런 상황에선 휴지나 물티슈를 내미는 게 맞는 일이었다. 가방 안에 여행용 티슈와 물티슈가 한 팩씩 있기도 했고. 다만 문제는 내 가방이 도서실에 있다는 거였고, 무안한 나머지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손수건부터 내민 거였다. 마침 어제 세탁하고 나서 안 쓰고 넣어만 뒀던 거라 천만다행이다.

"이러려고 들고 다니는 물건인데요 뭘."

손수건을 건네주고 나서, 손을 들어서 층계참에 들이박은 이마를 만져본다. 아야야 소리가 나올 뻔한 걸 눌러참는다. 아세트아미노펜의 진통효과는 위대했지만 고통을 전부 다 없애주는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 아무래도 혹이 날 것 같다. 그래도 혹으로 끝났으니 다행이지 이빨이나 콧대를 들이박았으면... 끔찍한 상상을 잠깐 하다가, 얼굴의 피를 다 닦아낸 듯한 네가 건네어오는 말에 다시 시선을 돌린다. 잠깐 어딜 갔다오려는 것 같다. 아까 성대하게 자빠링한 게 어떻게 보였을지 마음에 걸려서, 나는 괜찮다는 의사표현도 할 겸 미소를 지으며(고통 때문에 좀 찌그러진 미소가 되긴 했다만) 선택지 1번을 의미하듯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충분히 지혈하고 오세요!"

그 동안 이 계단에 한가득 엎질러진 이것들을 정리해두면 될 것 같다. 그 정도야 해줄 수 있는 일이고, 혹시나 나같은 칠푼이가 또 자빠질 수 있는 거고. 들이박은 데를 더 만지면 덧날까 봐서 손을 내리고, 차곡차곡 계단에 엎질러져 있는 책이며 노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44 이름 없음 (1kkkxSUQfo)

2021-09-23 (거의 끝나감) 17:45:38

>>42

" 인형 같은게 있으면 밤에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는데. "

등반객들이 묵어가는 산장보다는 조난자들을 대피시키고 곰이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해서 곰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저 소수의 사람들만이 지낼 수 있는 정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 인형이라니 별로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밤에는 정말 조용해 벽난로만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이곳에선 그마저도 무서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산장지기에게는 그 인형이 있던 없던 관심도 없을게 분명하겠지만 말이다.

" 이번에 병이 다 나으시면 진지하게 이장 일을 그만두라고 하시는게 좋겠어. "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도 듣지를 않으시다 이렇게까지 와버렸다. 이젠 본인도 아프셨으니까 깨달으시는게 있을거라 생각하고 산장지기는 달력을 바라본다. 벌써 아프셔서 병상에 누우신지 한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 나을 기미가 안보인다는 것을 오고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악화는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악화 되시면 분명 돌아가실 것이 분명했다.

" 원래 그 집의 와인 셀러에 들어가있는 것들은 고르고 고른 것들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걸. "

그가 성인이 되고나서 와인을 처음 마셨을때는 그 맛이 너무 역해서 안좋은 기억만을 심어줬지만 그것을 송두리채 바꾼게 저 집의 와인이었다. 싼 와인이 안좋은 것도, 비싼 와인이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시면서 건네준 와인 한잔의 맛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을 정도다. 그에겐 그때 마신 와인만큼이나 지금의 것도 마음에 들었다.

" 그래도 너무 자주는 오지마. 진짜 네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니까.

그녀의 자신만만한 표정과 과장된 몸짓을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와인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켁켁거리며 잔을 황급히 내려놓는다. 휴지로 입을 닦은 산장지기는 여자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듯한 말투로 얘기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기 뭐가 좋다고 집을 하나 더 지어. 할 것도 없는데. "

물론 둘이 지낸다면 덜 외롭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산속에 있고 전기도 발전기로 돌리는 곳이다. 대부분을 벽난로의 불빛을 의지해서 살아야하는 곳에 온다니 그의 생각에서는 좋지 않은 짓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제 산장지기를 자신의 대에서 그만두고 싶어했다. 대대로 내려오고 있고 중요한 역할이지만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선 한참이나 짧은 시간을 산장에서 보낸 산장지기였지만 새삼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 마을엔 재밌는 것도 많고 친구들도 많고. 무엇보다 안전하니까. 위험한건 나 혼자로 충분해. "

마을 사람들도 그렇기에 그에게 잘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자의 호의도 산장지기는 마을 사람들의 호의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45 이름 없음 (/P0NEjDf/U)

2021-09-23 (거의 끝나감) 18:52:42

>>43

"진짜 정말 여기서 기다리고 계셔야 해요!"

당부에 당부를 하고서 자리를 비웠다. 도움만 주고서 홀랑 사라져 버릴까, 발걸음이 바빴다. 화장실에 가서 꼼꼼히 얼굴과 손을 다시 한번 닦아야 했고, 도서관에 가방만 두고서 나온 자리에 돌아가야 했다. 가방에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만한 무언가 있지 않을까 당신을 붙잡아 두었다. 그런고로 뭐가 있으려나 가방을 털어보면 죄 주전부리뿐이다. 과일 맛 젤리, 한입 크기 초콜릿, 이런저런 맛이 다 있는 사탕...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그타르트, 제이 좋아하는 코코넛 휘낭시에, 제삼 좋아하는 크렘 브륄레 마들렌... 공부한답시고 저녁에 집을 안 들어가니 저녁 대신으로 집에서 들고나온 것이다. 집이 베이커리라는 이점은 이런 데 있는 거고, 아무튼 저녁을 때우려고 가져온 거라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호불호를 알 수 없으니 일단 전부 다 챙겼다. 알레르기가 있을 수도 있잖아! 죄송하고 고맙다며 받은 걸 먹고 알레르기로 응급실 가면 저주받는다! 어쨌든 우리 집 베이커리 종이봉투에 담긴 구움 과자들과 각각의 젤리, 초콜릿, 사탕 봉지들을 품에 다 챙기니 과자로 만들어진 마녀의 집을 발견한 헨젤과 그레텔이라도 된 기분이다. 그리고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반창고랑... 반창고밖에 없네! 반창고라도 챙긴다.

"다녀왔, 으악!"

이걸 치우고 계시면 어떡해요! 소리치고 싶은 걸 으악, 하고 참아냈다. 이걸 먼저 치우고 갔어야 했나 싶지만, 혹시라도 미처 닦이지 못한 피가 묻는 게 싫다는 생각에 그러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트 중 한 권은 공부하기 위한 필기 노트라거나 오답 노트, 정리 노트가 아니라 그림 노트여서 더욱 그랬다.

"저 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는데..."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사례를, 보답을 할 수 있는 방법. 곰곰 생각해보니 아차 싶어진다. 2번, 연락처를 남기신다! 이 말이 틀렸음을 이제야 알았다. 연락처를 드리는 게 맞았다.

"3번은 어떠세요...? 제 연락처 드리기... 저 때문에 놀라시고, 저 때문에 다치시고, 저 때문에 손수건도 엉망진창에......"

나 엄청나게 사고 쳤잖아...? 새삼 저지른 잘못들을 나열해보니 쪽팔려서 좀비가 되겠다 할 때가 아니었다. 엄청 아프신 거 아냐? 아까도 말 그대로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셨고, 어디 더 안 다치신 건 맞을까? 근데 어른이면 어떡하지. 내 또래면 몰라, 어른이면 학생이 해주는 답례 같은 게 성에 찰까.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세탁비랑 진료비로 쓰라면서 카드로 해결할 수가 없잖아! 자연스레 표정이 울상이 되어간다.

46 이름 없음 (ncngc5gXqQ)

2021-09-23 (거의 끝나감) 23:06:47

>>45

으악! 하는 비명소리에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기분이다. 내 기타에 걸고 맹세컨대 방금 뒷목 털꼬랑지까지 다 곤두서면서 움찔하는 게 보였을 거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뒤를 돌아본다.

"어.. 나도 피 나요?"

무안해할까 봐 농담 한 스푼 얹어서. 근데 진짜로 피 안 나는 거 맞나? 하고 손을 들어서 어루만져본다. 찍은 데가 붓긴 했지만 그래도 상처는 확실히 안 난 모양. 다만.. 혹은 실시간으로 부어오르고 있다. 만지니까 아파서 후다닥 손을 뗐다. 으악 소리가 따라서 나올 뻔했다. 아직 못 주운 노트가 몇 권인가 있어서 시선을 돌리려는데, 네 품에 안겨있는 익숙한 봉투가 보인다. 그리고 그게 답례라나. 어라.

"이런 걸 받자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하필이면...

"내 원픽 단골 빵집.........이잖아..."
─꼬르르르륵.

나에게 있어 식사시간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로고를 보고 훈련받은 파블로프의 개마냥 배꼽시계가 운다. 으악.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편의점에서 약이랑 함께 주먹밥 같은 거라도 먹는 건데 그랬어. 당황스럽게 아래로 고개를 숙이니, 교복 셔츠 웃도리의 단추가 하나 나간 것까지 보인다. 안에 티셔츠야 입고 있다만,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끝나고 집에 들러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올걸! 으악! 만약 내가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다면 오늘 일기로는 두 글자만 적을 거야. 으악!!!

"아니, 그 연락처라뇨,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놀라거나 다친 거야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손수건이야 다시 세탁하면 그만인걸요..."

그렇잖아도 무안해져서 빨개져 있는데 연락처를 주겠다는 말에 붉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림이 어째 이상한 것도 같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손가락 4개를 쫙 폈다.

"4번!"

그래서 난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했다.

"나 그 빵집 아는데 거기서 만나요. 지금 가도 괜찮고? 아니 괜찮나?"

...정말로 이런 대응으로 괜찮은가? 나? 월 수 금마다 부원들이랑 거기 들리긴 하는데, 그런 주제에 거기 언제 닫는지 모르잖아?


# 묘사를 미처 못했지만 이 캐릭터는 갈색 단발의 활기찬 밴드부 메인보컬+리드기타 고교생이며 현재 넥타이만 없는 교복 차림입니다v.v

47 이름 없음 (eFgN0RFsUA)

2021-09-24 (불탄다..!) 00:16:47

>>46

"피 나요?! 반창고를 가져오기는 했는, 아. 그전에 지혈부터, 휴지가... 가방을 가져올걸!"

이것저것 품에 죄다 끌어안은 채로 허둥거렸다. 손을 잘못 풀었다가는 분명히 이 봉지들도 계단에 미끄러질 테니 반창고를 건네지도 못하고, 휴지를 찾자니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해 가져오지도 않았고. 뒤늦게 걱정스러운 시선에 죄송한 마음까지 덧끼워서 상처 부위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어. 어... 피 안 나는 거 같은데. 그것 보다 만지지 마세요! 덧나면 어떡하려고! 흉 지면 어떡하려고! 소리치기 전에 당신의 손이 먼저 아래로 향한다. 그럼 다시 생각한다. 피 정말 안 나는 거 맞지? 여간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눈치다.

"그래도, 이런 거라도...... '원픽 단골 빵집'이요?"

우리 집? 우리 집 베이커리 말하는 거지? 어, 어라. 당신을 쳐다보았다가 끌어안고 있는 종이봉투를 보았다가, 얼빠진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깜빡거린다. 배꼽시계 소리가 울릴 때야 정신을 차린 듯하다. 곰곰 생각해보자니 단골손님 중에 학생 손님들도 있는데, 교복을 보자니 너와 같은 학교 같더라 하고 부모님이 말해주신 기억이 난다. 그 학생 손님 중에 같은 학교인 사람이, 혹시 지금 눈앞에 이 사람인가 싶어졌다. 이제 다시 보니, 진짜 우리 학교 교복이잖아! 지금 나 교복 입고서 자기 학교 교복 못 알아본 거야? 지금 나 지금 부모님 가게 단골손님한테 민폐 3 스택 쌓은 거야?!

"이거, 이거 다 드셔도 돼요! 제 물건들은 제가 치울 테니까 이거 드세요!"

고작 그것 갖고 배 차겠냐고, 겨우 그 양으로 무슨 저녁이냐며 간식에 불과하다 가방에 더 챙겨 넣으시려던 부모님 손길을 만류한 게 후회스러웠다.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절대 만류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직접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 사람한테는 우리 집이 당신의 원픽 단골 빵집이라는 사실을 영영 비밀로 묻고자 마음먹었다. 민폐만 끼친 자신이 싫어져서, 자신의 부모님이 하는 베이커리까지 안 가겠다고 해버리면 부모님은 난데없이 단골을 잃게 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나가 도달한 결론이다.

"4, 4번?"

없던 선택지의 등장에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과 만나고서 몇 분 안에 얼이 몇 번이나 빠지는지 셀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새로운 선택지의 내용은 얼빠지게 하기 좋은 내용이었다. 방금 자신과 베이커리의 관계를 당신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거기서 만나자는 말이 나왔다. 심지어는 지금 가도 괜찮다는 말까지! 이게 바로 혼비백산인가. 지금 시간쯤이면 가게에 누가 있는가 머리를 굴려야 한다. 부모님이 있으면 낭패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다른 누군가 와 있어도 낭패요. 그렇게 되니 지금 상황 자체가 낭패였다. 가게 주인이 가게에 없을 리가 있냐고! 나 또 노답 상황이네!

"가, 가도는 되는데요..."

대답을 안 하고 있으면 더 수상해 보일 거 같고, 4번을 거절한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5번을 만들어보자니 4번보다 더 나은 선택지를 구상하지도 못했다. 원픽 단골 빵집에서 만나자는데, 심지어 지금 가도 괜찮다는데, 내가 을인 입장인데 어떻게 거절이 나오겠어요. 아빠엄마, 정말 미안. 나 단골손님 한 명 없애버릴 거 같아.


/ 교복 묘사가 없다고 사복이구나 생각해버린 채 어른이면 어쩌지 하는 걸 서술했구나 죄송합니다!!!

48 이름 없음 (O4dCYJephw)

2021-09-27 (모두 수고..) 19:31:27

안녕하세요, 저는 이 마을의 유일한 시계공입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 위에서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일 정도로 엄청 작기는 하지만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본 적이 있냐고요? 당연히요! 시계탑이 고장날지도 모른다, 탑에 오르다 다치면 위험하다, 그런 이유들로 시계탑에 오르는 걸 금지해두었는데 어떻게 올라가봤느냐고요? 제가 거기에, 이곳에 사는걸요. 그 이유들은 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제가 사람을 무서워해서가 진짜 이유에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에요, 쉿. 사람들은 제가 시계를 너무 좋아하는 괴짜라서 혼자 시계탑 위에 박혀서 시계만 만드는 줄 알아요. 이것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못 하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저는 시계탑에서 혼자 살고 있고, 그건 조금 쓸쓸하긴 하지만 나름 즐거워요. 저 아래에서 다들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들 제가 만든 시계를 갖고 있거든요. 회중시계, 뻐꾸기시계, 탁상시계, 자명종시계, 째깍째깍 바쁜 초침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준 건 저에요. 시계들의 주인은 저를 못 알아보지만요. 사람들과 만나야할 때에는 남자인 척 변장을 하거든요.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꼭 모자를 쓰고, 안경도 쓰고, 망토를 둘러서 체구도 감춰요.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척 메모를 들고 다닙니다. 시계를 가져오지 못하는 손님들 위해서 가끔 정기적으로 시계를 가지러 가고, 돌려드리러 갈 때도 이 모습으로 다녀요.

...그런데 어쩌면 좋아요. 정체를 들킨 것 같아요. 일단 아닌 척 무작정 잡아떼볼게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나는 당신에게 서둘러 적은 쪽지를 건넸습니다.

49 이름 없음 (aHPA5I61nc)

2021-09-28 (FIRE!) 21:20:11

붉은 사자는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가문의 문장이었다. 오랫동안 가문을 모시고 있던 집사의 아들로 태어난 사내는 6년의 시간이 흘러, 스무살이 되어 다시 자신이 태어날때부터 충성을 다 해야한다고 교육받은 가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사는 아버지가 하고 있으며, 자신의 동생이 좀 더 적성에 맞을 듯 하니, 자신은 그 가문을 지키는 검이 되고 방패가 되고자 하였고 가문을 이끄는 당주에게 허락을 받아 사내는 교육시설에 들어가 검을 배우며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길다면 긴 시간, 오로지 누구보다 강한 검이 되어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에,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도 잠깐 얼굴만 볼 정도로 독하게 마음을 먹으며 단련에 힘 쓴 사내는 늠름한 자태를 보였다. 차분한 밤색 어두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입고 있는 옷의 옷깃을 정리하며 문에 들어선 그는 머지 않아 당주를 마주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돌아온 것을 보고하며, 지금까지 고생했다는 말을 들으며 앞으로 그 실력을 가문을 위해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들으며 오늘은 피곤할테니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다 들으며 사내는 꿇었던 한쪽 무릎을 펼치며 예를 갖췄다.

당주의 방 밖으로 나와 6년 전, 자신이 기억하던 풍경을 떠올리며 저택을 돌아다니던 사내는 자신이 옛날에 쓰던 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6년이 지나도, 이 풍경만큼은 변하지 않는구나."

변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사내는 계단을 막 내려 1층 사용인들이 쓰는 방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했다.

/진짜 뜬금없는 전개나 갑자기 내쫓는 그런 것이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이어도 괜찮아!

50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01:46:13

>>49
슬슬 피아노 레슨 시간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직속 하녀인 샐리가 다가와 다음 일정을 알렸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결과에, 마르그리트는 미련없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래요, 가죠." 차를 즐기고 난 흔적을 치우는 하녀들을 뒤로 하고, 단정한 걸음걸이로 레슨 룸을 향해 걸었다.

문득, 부진한 학문에 시간을 할애하느라 피아노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말았던 것이 떠올라, 마르그리트는 희미하게 콧숨을 쉬었다. 한 소리를 들을 각오는 해두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담담한 표정 너머로 감추며 걷고 있자니,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낯익은 듯 낯선 사내가 보였다. 누구더라? 분명 어딘가 낯익은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샐리가 말했다.

-"집사장의 맏아들이 새로 호위로 왔다는데, 지금 도착한 모양이네요."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몇년 전에 호위가 되기 위해서 수련을 떠난다고 했었지. 인정받았다니 실력은 그만큼 출중하면 좋겠네. 집사장도, 그 둘째 아들도 성실한 사람들이고, 저 사람도 몇년이나 성실히 수련해서 돌아왔으니, 후하게 대접한다면 그만큼 충성하겠지. 새로 들어온 사용인에게는 동기부여가 될 만한 덕담을 건네는 것이 좋다는 것을 떠올리고, 마르그리트는 집사의 맏이를 향해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나직이 말을 건넸다.

"능력을 인정받아 돌아왔으니, 앞으로 잘 일해주리라 믿어요. 좋은 성과를 보여준다면 섭섭지 않을 정도의 대우를 약속하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자세한 업무는 시녀장이 전달해줄 거예요. 그 전까지는 쉬고 있어도 좋습니다."

51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01:50:43

>>50 >>49 아차차 혹시 동생도 아들이 맞을까? 무심코 아들이라고 써버렸는데 멋대로 설정에 손댄 것 같아서 좀 그러네;w;

52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01:54:41

>>51 딱히 설정은 안 정했으니까 아들로 해도 상관은 없어! 일단 지금은 내가 슬슬 자러 가야해서 내일 이을 것 같긴 한데 이은 캐릭터가 가문의 딸인걸까? 그러니까 집안 아가씨? 혹시 내가 착각했을까 싶어서 물을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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