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상 있는 일이었다. 언제나 있는 일이었다. 평범하게 학교가 끝나고, 평범하게 길을 걸으면서, 평범하게 사람들을 스쳐지나가고. 물론 그 중에서는 근처 다른 학교 아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큰길가로 잘 다니지 않았다. 집이 가까워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학교에서 에너지를 거의 다 써버리면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흔히 말하는 '불량아' 들과도 자주 스쳐지나가는 편이다. 보통은 신경쓰지 않는다. 걔들이 뭘 하고 다니던 그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테다. 그러나 오늘은, 스쳐지나가던 학생들 중에 한 명이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야, 우리 근처에 산들고 있는거 알지? -니 옆에 가로등도 알 듯. 왜? *거기 말이야....
뒤이어 이어진 말을 들은 연호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섰다. 별로 문장으로 옮겨적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굳이 간추려서 이야기해 보자면, '산들고에는 예쁜 양이 많다더라', '언제 한번 애들 데리고 다같이 '놀러' 가자' 였다. '놀러' 의 의미는 일부러 순화해서 적었지만.... 대충 알아들을거라 믿는다.
연호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몇몇 아이들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이 사귀었던 양 친구들. 자신이 늑대라는것을 알고도 함께 친구로 지내주던 좋은 아이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입안에 헤이즐넛향 초콜릿맛을 남긴 분홍빛의 아이가 스쳐지나갔다.
" 야. " *? -우리 부른거? " 그래. 니네. "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실하게 전달되었고, 미소를 띄우고 있는, 하지만 확실히 적의가 담겨있는 얼굴의 표정이 그들을 향했다. 긴 머리카락 덕분에 눈이 살짝 가려져서 조금 더 도전적이고, 날카로워보이기도 했다.
" 사람 옆을 지나갔으면 사과를 해야지. " *????
상대는 대략 6명정도 되어보인다. 확실히 덩치큰놈도 한명 있고, 늑대인것 같은(그냥 그의 감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발목을 붙잡지는 못했다.
뻐억! 하고, 그의 주먹이 가장 체구가 작은 학생의 얼굴을 강타했다.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일단은 머릿수를 줄이는게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그 녀석도 그저 팔랑거리는 종잇장 같은 녀석은 아니었는지, 습격을 버티고서 쓰러지지 않았다. 그것에 조금 주춤했던게 문제였을까.
" 어라,"
번쩍. 하고 연호의 몸이 들렸다. 체구가 가장 큰 학생이 그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들어올린 것이다.
" 너 힘 좀 세구나?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뒤로 저만치 던져졌다. 힘이 어찌나 센지 바닥과 한번 마찰을 일으키고서도 두세번 데굴데굴 굴러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 끄응......? "
바닥에 쓰러진채로 눈을 뜨는데, 아무래도 이곳을 지나던 누군가의 발치에서 멈춘 모양이었다.
시선을 들어보면, 거기에는 연호가 복도나 운동장에서 몇 번쯤인가 마주쳤던 아주 인상깊은 새하얀 머리카락의, 아디다스 져지 차림을 한 소년이 있다. 연호가 다른 사람의 인상을 머릿속에 잘 담아놓는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새하얀 머리카락과 끝도 없는 우물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새까만 눈동자가 이루는 기괴할 정도의 극단적인 흑백의 대비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인상이었다.
연호가 문하에 대해 얼마나 인상을 기억하고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문하는 연호를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고, 말을 섞어보는 것도 오늘 처음이지만, 이 별날 정도로 활활 불타는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한 소년이 적어도 '같은 학년의 옆 반에 있는 아직 누군지 모르는 누군가', 다시 말해 '같은 학교 동기' 라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연호를 내려다보던 새까만 눈동자는 힐끔 들려 연호와 시비가 붙은 게 명백해보이는 여섯 명을 힐끔 바라보았다. 연호가 저 친구들에게 한방 먹었다는 것은 문하도 추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싸움이 붙었는지는 당연히 알 리 없었다. 그래서 문하는 다시 연호에게로 시선을 떨구며,
"상황설명 좀."
하고 정말 싸가지없다 싶을 정도로 짧은 질문을 건네왔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흰둥이가 빨갱이와 말을 섞도록 둘 만한 놈이 아니었다. 먼저 연호의 주먹을 버텨낸 체구 작은 놈이, 뭐라고 처지껄이는데- 라는 둥 상투적인 욕설 섞인 고함을 지르며 뛰어든다. 그 순간, 문하의 팔 한쪽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팡! 하고, 빵빵하게 부풀린 비닐봉지를 손바닥으로 있는 힘껏 내리치는 듯한 파열음이 났다. 문하에게 덤벼들던 키 작은 녀석은 그대로 땅바닥에 뒤로 내동댕이쳐지다시피 나자빠졌다. 문하는 평이한 어조로 경고했다.
"...내가 이야기 끝내기 전에 끼어들지 마."
결정타 같은 게 아니었는지 뒤로 떠밀리며 나자빠진 녀석은 약이 단단히 오른 얼굴로 자세를 추스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뒤의 다섯 놈이 상황을 파악하며 눈치를 보고 있다. 문하는 그 동안 연호의 손을 붙잡고 그를 일으켜주려 했다. 그는 앞서 한 말을 반복했다.
"...상황설명 좀."
자신이 링 밖에서 주먹을 휘두른 것에 대한 충분한 명분이 있어야 할 거라는 듯한 어조였다.
난데없는 주방장을 찾고(어딘가의 오마주였다), 도와달라 말했는데.... 당연하게도 그는 상황 설명을 부탁했다. 연호는 문득 문하를 바라보던 와중에 머릿속 한켠에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어느 반인진 모르겠지만 2학년 층에서 몇번인가 스쳐지나간적이 있었더랬다. 저만큼 새하얀 머리칼이나, 저만큼 새까만 눈동자의 대비를 이룬 사람은 그의 인생에서 찾아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 아, 그게 말이야. "
일어나면서 설명해주려 했는데, 아까 연호가 주먹으로 쳤던 학생이 잔뜩 화가 나서 달려들었다. 발로 차버릴까 고민했지만 문하가 더 빨랐다. 아마 손바닥으로 친것 같은데, 연호는 그걸 보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 우리 학교가 워낙 멋지고 예쁜 애들이 있잖아? "
문하가 내민 손을 붙잡고서 읏차, 하고 가볍게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옷에 묻은 흙들을 대충 털어내고서, 문하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 응당 꽃에는 꿀벌이나 나비들이 꼬이는게 맞는데 말이야. "
그리고 아까전에 미처 못했던, 몸풀기를 시작한다. 스트레칭이란 중요하다. 몸이 움직이기 편하게 해주고, 조금이나마 유연하게 해줘서 아까처럼 기습한다면 제대로 된 일격을 먹일 수 있었을테다.
" 어째 모기들이 꼬였네? "
그닥 자세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알아들을 수는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뒤에 부연설명으로 '근데 모기가 6마리가 아니고, 장구벌레들도 꽤나 있는 모양이야' 라고 덧붙였다. 해석하자면 '저 쓰레기들이 입을 닫지 않는다면 더 많은 모기가 튀어니올 것이다' 라는 말이었다.
이제는 일촉즉발. 방금 맞고 날아간 녀석 뒤에 있던 모기들이 슬슬 상황파악을 끝냈는지 전투태세에 들어간다.
" 그럼 다시 한번 부탁하겠는데, 주방장. "
" 10초만 도와줘라. "
하지만 아무리 주방장(?)과 연계하더라도 10초로는 저들을 막아낼 수 있을것 같지가 않았다. 문하가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해적 주방장의 대사를 오마쥬해줄거라고 기대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