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감사합니다." 반납기간에 대해 듣고는 책을 옆구리에 낍니다. 가벼운 소설책을 들고는 학교에 마련된 벤치 쪽으로 발을 옮깁니다. 앉아서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소설 내용을 보여주는 게 그런 이유는 역시 로맨스소설이라서 그런 거였을까요. 아니면 호기심에 들고 나온 소설이어서? 적어도 겉표지가 멀쩡하다는 건 다행입니다.
"...." 다만 지한이 생각지 못한 점이라고 한다면, 벤치가 좀 더러웠다는 점입니다. 고양이가 박박 긁어놔서 앉으면 나무가시가 잔뜩 박힐 것 같은 벤치, 술을 마신 이들이 예쁘게 끼얹어준 그런 것들. 가장 멀쩡해보이는 벤치의 중앙에 앉아있는 사람을 바라보고는 앉을 수 있을까. 하고 다가가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엽니다.
"실례합니다. 혹시. 자리에 앉을 분이 계시나요?" 없다면 앉아도 될까요. 라는 질문을 할 생각입니다.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각자 다 다른 법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섬광이나. 파란색이나.. 지금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얼룩짐? 하지만 그걸 티내지 않으며 지한은 천천히 감사하다고 말한 뒤 자리에 앉았습니다. 습관처럼 앉은 옷의 구김을 정리한 뒤 질문을 던지는 잇카의 말을 들어봅니다.
"안쪽에서도, 밖에서도 책을 읽는 걸 좋아하긴 해요.." 그렇지만 안쪽에 사람들이 몰리는 편이라서요. 라는 말과 함께 흘깃 안쪽이 보이는 창을 보면 추위를 피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하긴. 지금 계절은 1월이니까요.
"당신은 밖에서 그냥 앉아 있었나요." 부드럽지만 무겁게 떨어지는 목소리는 평이한 어조의 말이었지만 그 내용은 의문문이었습니다. 책을 단정하게 무릎 위에 올려놓은 뒤.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있네요.
갓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미리내고 특별반에서는 빈센트의 자유를 약속한다고 했지만, 막상 와보니 좀 더 일찍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가 별로 없었다. 특별반도, 일반 반의 헌터도 평등하게 출입을 틀어막아 버리는 모습을 보고, 좋다고 해야 할 지, 나쁘다고 해야 할 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아끼기로 했다. 함께 입학... 이 아니라, 빈센트의 수행원을 겸해 들어온 베로니카는 제가 할 일을 하게 내버려뒀다.
"...심심하군요."
하지만 심심한 건 어쩔 수가 없어서, 빈센트는 벽에 기대있다가, 누군가와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래서 빈센트가 말을 걸어보기로 한 사람은, 빈센트와는 거울상처럼 다른 것만 같은, 2m 크기의 근육이 빵빵한, 마치 만화에서 과장법을 유감없이 발휘해 그린 근육맨 같은 남자였다.
빈센트는 엷은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질에 대한 편견들(무식하다, 무식하지는 않더라도 '무식한' 해결책을 즐긴다, 머리를 5초 이상 쓰는 것을, 머리를 깊게 쓰는 것을 싫어한다, 무례함과 호탕함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한다)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 눈빛을 보고 편견을 잠시 내려둔 덕분에, 빈센트는 꽤나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딱 좋을 때 고등학교에 입학하시는군요. 운이 좋은 겁니다. 늦게 눈에 띄면, 저처럼 팔자에도 없던 만학도가 되는 거거든요."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인다. 그리고, 혹시 그도 자기처럼 특별반일까, 자신이 어디로 가지는 알리지 않고 ,넌지시 물어본다.
빈센트는 마초적 남성성이 극대화된 태명진의 육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 속의 헤라클레스가, 사람들이 과장하기 위해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이 정도 육체라면 그 누구도 이 사람이 들어가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빈센트는 잠깐 생각하는 척을 하려고 턱을 쓰다듬다가, 다시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같은 반에 들어가게 되었군요. 반갑습니다."
특별반이라는 것을 밝히는 빈센트는, 예의라고 보기에는 꽤나 과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편견과는 다른,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을 만난 탓일까?
아예 몸을 조금 틀어 나란히 앉은 상대에게로 주의를 돌린 소녀가 새삼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가 생긴 이후로 온갖 다양한 눈 색이 자연스레 나타나게 되었고 소녀 역시도 의념 각성과 동시에 이질적으로 파란 눈을 갖게 되었지만, 검은 머리를 곱게 늘어뜨린 소녀의 새카만 눈은 우아하고 몽환적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잖아. 진짜 마음을 비추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눈으로는 많은 걸 보여 줄 수 있고, 그러니까 그냥 검은 눈은 아니야."
정말로, 아무것도 담지 않고 검은 눈을 본 적이 있다. 눈을 감지도 못하고 떠난 노숙자의 눈이다. 그에 비하면 고개돌린 상대의 눈은 얼마나 영롱한가. 마치 작디작은 별무리라도 비친 것처럼... 별무리? 문득 스쳐간 생각에 소녀가 자기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드문 말이네요." 드물게 들었던 말이라는 뜻입니다. (안광이 없이 새카만 심연같은 눈이기는 하지만) 지한은 그런 말들에 미묘한 웃음을 지어보였습니다. 영롱하다거나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많지 않았을 거니까요. 물론 의념을 발휘한다면 이 앞에 있는 사람의 눈이 비춰질 겁니다. 그렇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렇죠." 눈으로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어요. 눈빛이 괜히 중요하게 여겨진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지한입니다. 그러고보니 소개도 없이 이렇게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네요. 책은 지내는 곳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화는 사라질 것만 같으니까요?
인간의 싸움은 여러 종류가 있다. 육체의 강함을 겨루는 격투기, 순간의 반응속도와 상황 판단력을 요하는 총격전, 그리고 인내심과 지성을 극한까지 시험하는 두뇌 싸움까지. 빈센트는 적어도 두뇌에 있어서는, "인간"의 규격을 지키는 인간들 중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태명진도, 적어도 두뇌에 있어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육체는? 확실히 질 것이다. 하지만 두뇌로는 이기지 못할 겁니다, 같은 소리를 굳이 해서 분위기를 망치는 멍청이는 아니었기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너무 쉬울 테니까요. 딱 보면 알것 같지 않나요?"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다가 슬쩍 묻는다.
"저는 불을 씁니다만... 네, 뭐,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손 끝에 가지고 다닌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태명진 씨는 어떤 의념으로 싸우나요?"
"네. 성이 신이고 이름이 지한이에요" 단백하게 말하는 것이 서산 신씨라는 걸 오히려 생각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식과 한국어실력이라는 걸 알지 못하기에 그게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아. 카미츠바메 잇카.. 그러면 카미츠바메라고 부르면 될까요." 특별반이라는 것에 이런 곳에서 특별반 학생을 다 만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건 그렇잖아요. 특별반 학생을 유달리 자주 만나는.. ...아닌가. 시간표가 비슷하다면 그럴 만도 하겠군. 스스로의 납득을 삼키고는 너는? 하고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으며
"저도 특별반에 입학하게 된 학생이에요." 같은 반이 되었겠네요. 라고 말하며 잘 부탁드려요. 라고 말하는 지한은 여전한 얼굴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