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다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혹...은 아니었지만, 대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기도 하고... 애초에 완전히 유혹이 아니라고 볼 수도 없나? 호감을 살 목적이었으니... 같은, 태연함 속에 숨겨진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훌쩍 다가오자 잠시 멈칫거렸을까. 순간 당황해서 굳어있는 동안 소녀는 발을 멈췄고, 소녀의 장난스런 시선을 마주하면 그제서야 장난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름을 알면 특별해진다. 라는 말에 그는 잠시 침묵한다. 이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그에게 있어 이름의 교환이라는 것은 통상적인 의례에 가까웠다. 호칭을 정리하기 편하게 만들어주는, 가끔 좀 더 호의를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의례. 하지만 소녀가 그렇게 말해주자 조금 달라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 나는 에이론. 이곳에선 아론이라고도 부르더라. 어느 쪽이든 편하게 불러. "
그는 조금 길게 자신의 이름을 설명했다. 이게 그렇게 특별한 일이라면, 단순히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특별한 일에는 조금이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좀 더 다가가고 싶은 것이었을까.
" 네 이름도 말해줄래? "
고개를 숙인 소년은, 소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려고 하며 이름을 물었다. 깊은 눈동자가 소녀를 응시했다.
입 밖에 낸 이름과 입 안에서 되뇌인 이름이 함께 맴돌았다. 어느 쪽이든 모음으로 시작하는 부드러운 이름이다. 소년의 희고 차분한 인상에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한 번 발음해보고 고개를 끄덕인 소녀가 눈 앞에 가까이 다가온 보랏빛 시선에 살짝 동요했다. 아무리 늘씬한 체격이라고는 하지만 한참 위에 있던 머리가 바로 눈 앞까지 다가오는 것에는 위압감이 있다. 소녀와 같은 위치에서 눈을 맞추려 드는 사람이 드물었기에 더욱 그랬다.
"내 이름은 카미츠바메 잇카야. 카-미-츠-바-메- 이-ㅅ-카."
거친 파열음으로 시작하는 소녀의 이름은 둥글게 발음되던 소년의 이름과 정반대처럼 다르다. 길고 복잡한 이름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또박또박 한번 더 철자를 나열한 소녀가 조금 뒤늦게 물었다.
소녀를 따라하듯이, 홀로 중얼거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름 교환에 이런... 뭐랄까, '조금 가까워졌구나' 하는 건 못 느껴봤는데. 서로가 친구임을 확인할 때에도, 신도를 교단으로 끌어들일 때에도 느끼지 못 했던 감각에, 에이론은 그만 웃어버렸다. 둥글둥글한 이름과 파열음으로 시작하는 거친 이름. 조금 대비되지만, 그 점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자신이 아는 한 동생처럼, 자신과 대비되는 이가 오히려 기억에 더 잘 남는 법이었다.
" 응. 나도 외국에서 왔지. 너도, 라는 건 너 역시구나. "
"아마 마도일본에서 온 거겠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보면 쉽게 추론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보면 자신은... ...별로 신경쓰지 않도록 할까. 과거사를 굳이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잇카. 유난히 긴 성에 비해 뚝 잘라놓은 듯이 짧은 이름은 소녀 자신도 좋아하는 요소였다. 물론 애초에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름으로 삼지도 않았겠지만... 한자로 써도 두 글자를 합해 네 획이면 끝나는 짧은 이름을 돌이키던 소녀가 에이론의 혼잣말에 그러네. 하고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쳤다. 느리고 유구한 헤어짐의 길이었을지 아니면 한순간의 이별일지 모르지만 둘 모두 지금은 천애고독한 방랑자인 셈이다.
"고향?"
그래서 소녀는 에이론의 혼잣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나는 고향을 몰라. 일본 안에서 많이 돌아다녔거든. 그래서 여기에 와서도 많이 힘들지는 않았어. 너는 어때? 고향이 그리워서 힘들었어?"
부정의 의념은 한 군데에 머무르는 것조차도 어렵게 만든다. 때로는 있을 곳이 사라져서, 때로는 마음이 흔들려서 부평초처럼 흔들리며 살던 소녀에게 그리움이란 조금 낯선 감정이었다.
잠시 그 말에 멈칫했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앞서 결국 질문을 해버리고 말았을까. 고향이 그리워서 힘들었냐는 말에 에이론은 잠시 침묵한 채로 고민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젓는다. 외롭거나 힘들진 않았던 걸로 기억했다.
" 처음에는 그랬지만... 그래도 난 기댈 구석이 있었거든. 그래서 그런지, 별로 힘들진 않았어. "
종교라는 것은 비록 거래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있는 것 하나만으로 의지할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신이 항상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신도들이 자신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일 역시 없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믿고, 믿는 대상이 자신을 비호해준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힘이 되었으니까.
"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친구를 사귀는 덕도 있었지. "
혼잣말하듯 말하며 잇카를 빤히 쳐다본다. 친구라고 공인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인정받기엔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친구라는 사이를 인정받고 싶었는지 일부러 잇카를 바라보며 친구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의념이 없이도 가능한 것이니까.' 제대로 발을 디디는 것에 신경을 쓰다보면, 발소리와 인기척 하나 없이 걷는 것이 가능합니다. 걸어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실제로 움직이기 때문이겠지요. 그 목격자가 없기 때문에 걸어가는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가벼움이 깃털이 걸어가는 듯 사뿐하게 특별반 앞까지 다다랐습니다.
'...특별반' 문을 잠깐 올려다보고는 문을 열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교실 안쪽에는 사람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에 조금 움찔하기는 했지만 고개만 까닥여 인사하고는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 사람과 조금 떨어져 있으면서도 수업을 잘 들을 수 있는 교탁과 적절히 가까움 자리로 향하려 합니다. 확실히. 지한의 키를 감안하면 앞자리에서 보는 게 더 괜찮겠지요?
생각해보면 의념으로 시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별 문제는 없어보이긴 하지만 물리적인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뒤쪽에서 느껴질지도 모르는 시선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의자에 앉고는 간단한 책자를 읽으려 꺼냅니다. 책자는.. 그냥 평범한 겁니다. 특별하거나 그렇진 않아요.
사람에게는 거리감이라는게 있습니다. 초면인 사람들은 보통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대화를 나누는게 시작이지요. 심지어 대화를 나누는 것 역시 쉽지 않을겁니다. 특히나 이렇게 과묵한 소녀가 책자를 꺼내 읽으면서 집중하는 잔잔한 분위기의 흐름을 깨트릴만한 강심장은 몇 없을겁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김정수가 막 들어온 소녀를 가만히 둘거라는 뜻은 아닙니다. 잔잔한 분위기는 잔잔하게 깨트리는 방법이 있거든요. 주인공 자리(창가 맨뒤, 태호꺼)에 앉아있던 정수는 발소리를 죽이며 지한에게 다가갔습니다. 누가봐도 거리감이 이상하지요? 어느 정도냐면 그녀의 물 빠진 백색 머리카락이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이고, 흑색 머리카락에 가려진 귓가에 바로 닿을 정도였을지도 모르죠. 혹은 그 이전에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알게 뭔가요.
"저기 있잖아"
그렇게 접근한 정수는 소녀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무슨 소릴 할거냐면요. 별 말 안해요. 그냥 장난치는 거에요. 보통 이러면 놀라기 마련이니까요.
가끔은 이렇게 친구를 사귀는 덕도 있었지. 말이야 혼잣말이었지만 그 말과 함께 앞머리의 그늘 사이에서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냥 넘기기에 지나치게 선명했다. 이 말에 모른 척 고개를 끄덕이면 언제부턴가 둘은 친구가 돼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물쩡 친구가 되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괜찮은 일이겠지. 하지만 잇카는 일부러 그 말을 짚고 넘어가는 쪽을 택했다.
"굳이 혼잣말로 말할 필요 없어. 친구 맞아.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사이잖아? 그러면 친구인 편이 좋지. 아까도 말했잖아. 이름을 가지면 특별해지는 거야. 관계도 그래. 이름을 붙이면 특별해지는 거야, 에이론."
아예 이름이 없는 관계일 거라면 그것도 좋았다. 소녀에게 그렇게 순간순간 맺어졌다 날이 새면 사라진 관계들도 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굳이 관계를 규정할 거라면, 확실하게. 자신의 의념이 흘러넘치고 나서도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
거리감이라는 것은 그런 법입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데에 시간이 걸리는 타입도 있고,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친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한이 어느 쪽이냐면 역시 전자에 가깝지요.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면 교탁에 볼 일이 있거나 혹은 본인에게 볼일이 있는 걸까.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가왔을 때까지 눈치채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만나서 반가워 라는 말 때문이 아니라 훅 치고 들어온 플래시 때문에 순간 의념을 발휘해서 정지를 걸어버리려 합니다. 행동의 정지..라는 거지요. 뭐 걸리지 않게 자리를 옮겼다면 걸릴 리가 없지만요. 그리고 지한이 정수를 바라보면.. 정수는 지한의 눈 색이 검은색이 아니라 보라색으로 보일 거에요.
"어..음.. 미안해요?" 만일 걸리지 않았다고 해도 사과는 할 겁니다. 걸렸으면 으악 안움직여. 미안해요. 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