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무슨 할 말이라도? 웨이는 지한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는 걸 보고 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웨이는 지금까지 딱히 자신이 크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오빠가 언제나 더 컸으니까.) 지한이 눈을 피하기까지의 과정에 자신의 키가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마이페이스 쪽도 그렇지만.
"안 그랬어?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난 혼자 있으면 되게 심심하거든. 너도 똑같이 생각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중얼거리는 말을 놓치는 법이 없는 웨이가 맞잡은 손을 힘있게 흔들었다.
"아, 그렇지! 미안, 자기소개도 안 하고 막 떠들었네. 성은 유고 이름은 웨이야. 여기 출신이 아니라서 조금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편하게 웨이, 라고 불러도 돼! 너는?"
잇카의 제안에, 에이론 역시 고개를 쉽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한다. 잇카가 재미없다고 하는 이유를, 말을 들었을 때 어느정도는 예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 나도 책보다는 네게 흥미가 있으니까, 좋아. "
책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더 좋은 방법을 상대가 제시해 주었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뽑으려던 책을 다시 책장에 꽂고는, 눈짓을 보고는 이해했는지 몸을 돌려 도서관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간다. 소녀와 함께 도서관 밖으로 나와 햇살을 기분 좋게 쬐며 눈을 잠시 감았지.
" 대화라면 어떤 주제가 좋을까. 취미나, 아까 읽던 책이나 좋아하는 책...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든가. 나는 아무거나 좋지만. "
여러 선택지를 제시해두고 잇카의 말을 기다린다. 소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역시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또래인 것 같기도 하여, "진부할지도 모르겠지만, 학교 이야기 같은 것도 좋을 것 같네." 라고 덧붙였다. 원래 진부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기도 했지만?
쉽다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혹...은 아니었지만, 대사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기도 하고... 애초에 완전히 유혹이 아니라고 볼 수도 없나? 호감을 살 목적이었으니... 같은, 태연함 속에 숨겨진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훌쩍 다가오자 잠시 멈칫거렸을까. 순간 당황해서 굳어있는 동안 소녀는 발을 멈췄고, 소녀의 장난스런 시선을 마주하면 그제서야 장난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름을 알면 특별해진다. 라는 말에 그는 잠시 침묵한다. 이름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그에게 있어 이름의 교환이라는 것은 통상적인 의례에 가까웠다. 호칭을 정리하기 편하게 만들어주는, 가끔 좀 더 호의를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의례. 하지만 소녀가 그렇게 말해주자 조금 달라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 나는 에이론. 이곳에선 아론이라고도 부르더라. 어느 쪽이든 편하게 불러. "
그는 조금 길게 자신의 이름을 설명했다. 이게 그렇게 특별한 일이라면, 단순히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특별한 일에는 조금이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좀 더 다가가고 싶은 것이었을까.
" 네 이름도 말해줄래? "
고개를 숙인 소년은, 소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려고 하며 이름을 물었다. 깊은 눈동자가 소녀를 응시했다.
입 밖에 낸 이름과 입 안에서 되뇌인 이름이 함께 맴돌았다. 어느 쪽이든 모음으로 시작하는 부드러운 이름이다. 소년의 희고 차분한 인상에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한 번 발음해보고 고개를 끄덕인 소녀가 눈 앞에 가까이 다가온 보랏빛 시선에 살짝 동요했다. 아무리 늘씬한 체격이라고는 하지만 한참 위에 있던 머리가 바로 눈 앞까지 다가오는 것에는 위압감이 있다. 소녀와 같은 위치에서 눈을 맞추려 드는 사람이 드물었기에 더욱 그랬다.
"내 이름은 카미츠바메 잇카야. 카-미-츠-바-메- 이-ㅅ-카."
거친 파열음으로 시작하는 소녀의 이름은 둥글게 발음되던 소년의 이름과 정반대처럼 다르다. 길고 복잡한 이름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또박또박 한번 더 철자를 나열한 소녀가 조금 뒤늦게 물었다.
소녀를 따라하듯이, 홀로 중얼거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름 교환에 이런... 뭐랄까, '조금 가까워졌구나' 하는 건 못 느껴봤는데. 서로가 친구임을 확인할 때에도, 신도를 교단으로 끌어들일 때에도 느끼지 못 했던 감각에, 에이론은 그만 웃어버렸다. 둥글둥글한 이름과 파열음으로 시작하는 거친 이름. 조금 대비되지만, 그 점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자신이 아는 한 동생처럼, 자신과 대비되는 이가 오히려 기억에 더 잘 남는 법이었다.
" 응. 나도 외국에서 왔지. 너도, 라는 건 너 역시구나. "
"아마 마도일본에서 온 거겠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보면 쉽게 추론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보면 자신은... ...별로 신경쓰지 않도록 할까. 과거사를 굳이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잇카. 유난히 긴 성에 비해 뚝 잘라놓은 듯이 짧은 이름은 소녀 자신도 좋아하는 요소였다. 물론 애초에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름으로 삼지도 않았겠지만... 한자로 써도 두 글자를 합해 네 획이면 끝나는 짧은 이름을 돌이키던 소녀가 에이론의 혼잣말에 그러네. 하고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쳤다. 느리고 유구한 헤어짐의 길이었을지 아니면 한순간의 이별일지 모르지만 둘 모두 지금은 천애고독한 방랑자인 셈이다.
"고향?"
그래서 소녀는 에이론의 혼잣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나는 고향을 몰라. 일본 안에서 많이 돌아다녔거든. 그래서 여기에 와서도 많이 힘들지는 않았어. 너는 어때? 고향이 그리워서 힘들었어?"
부정의 의념은 한 군데에 머무르는 것조차도 어렵게 만든다. 때로는 있을 곳이 사라져서, 때로는 마음이 흔들려서 부평초처럼 흔들리며 살던 소녀에게 그리움이란 조금 낯선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