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웃는 새슬을 내려다보는 문하의 표정은 부루퉁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새슬을 자기 무릎에서 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귓바퀴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지만... 만일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이렇게 있고 싶다는 생각을, 문하는 얼핏 했다. 새슬이 톡 꺼내놓는 뻔뻔한 응석이 싫지가 않아서, 자신이 예감한 어두운 결말이 조금씩 미지수로 뒤틀려가는 느낌이 이상할 정도로 싫지가 않아서, 그는 서툰 손길로 새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새슬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좋을 대로 해."
그래서 문하는 잠깐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나는 이래도 되는가?
그러나 누군가 명백한 답을 줄 사람은 없다. 아버지는 아직 머나먼 이국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테고, 트레이너가 자신의 연애사에 관심을 보일 리 만무했다(이것은 문하의 오산이지만). 그리고 딱히 누군가에게 조언 같은 것을 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의문이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 가치 없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이 이것을 멈춰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문보다 이 순간을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영원 따위는 바라지도 않아. 지금만한 내일은 없어.
문하는 많은 것을 하지 않고, 새슬의 손 위에 머리를 올려둔 채로 새슬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많은 흉이 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새슬은 운동선수 수준으로 잔부상이 많은 편이었다. ...문하는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새슬의 그런 점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자각한다거나 하는 시시콜콜한 것들로 놀라지 않기로 했다. ─그런가. 나는, 너를...
차마 머릿속으로라도 그 뒷말은 잇지 못하고, 문하는 핸드폰 위에 전화번호 하나를 찍어주고는 새슬에게 돌려주었다.
"...오늘처럼 영화를 봐도 되고, 그냥 낮잠을 자도 되고, 자전거를 타도 좋아.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해도 좋겠지. 그냥─"
─외롭다고 느낄 때─
"내가 너를 찾아간 것처럼, 네가 나를 다시 찾아와줬으면..."
문하는 새슬의 머리를 덮고 있던 손으로 조심스레 새슬의 앞머리를 쓸어넘기고는, 상반신을 숙였고... 새슬의 이마에 스치듯이, 조그만 입맞춤을 남겼다.
"음~ 글쎄요? 저도 밤새서 노는 것엔 반대하지 않지만... 아마 저를 대동해가셨다간 선생님들께서 다른 의미로 까무라치실 걸요~?"
어찌보면 난데없는 부탁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딱히 상관 없다는듯 수긍하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녀 역시 알게모르게 밤에 돌아다닌 것도 있었고, 지금도 그런 연유로 이렇게 밤바다를 앞에 두고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니... 하지만 그런걸 대놓고 말하면 선생님들 입장에선 해가 남쪽에서 뜬다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들리려나?
"어제는 그랬죠~ 거의 하루종일 놀았다보니...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혼자 있기도 하는 거랍니다~"
물어본다면 대답은 하겠지만, 그러기 전까진 절대 한마디도 TMI를 꺼내지 않겠다는듯, 한쪽 눈을 감고서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대는 그녀였다.
"후후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거든요~"
(물론 서글프다는듯이 눈에 보일 정도로 절망태세를 취하는 당신이 보였지만) 딱히 거창하지도 않고 그저 폭죽만 가지고 놀았을 뿐인데도 굳이 돌려 말한다는 부분에서 혼자나 여럿이서 그걸 한건 아니라는 힌트 정도는 되었을까, 어째선진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웃고있는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더 말려올라갔다.
"흠... 그래도 아얘 모르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아는게 도움이 되는 때가 많으니까요~"
잡지식도 지식이라는 말이 있던가, 어떻게든 머릿속에 욱여넣다보면 좋든 싫든 쓸 때가 오는 법이었다. 좋은 뜻으로 쓰일지 나쁜 뜻으로 쓰일지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지만...
"아, 디퓨저라면 잘 쓰고 있죠~ 반려동물까지 생각하시는 센스는 꽤 괜찮았어요. 뭐어... 결과적으로는 저도, 같이 사는 친구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디퓨저가 생긴 뒤로는 그리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글쎄의 행동패턴이 보였기에, 그것을 다 쓰고나면 새로운건 사들여야 할까 살짝 고민까지 해보았을까, 어찌되었건 그녀는 여러모로 신경쓸 존재가 있다보니 그런 부분에서도 민감하기 마련이었다.
"으음~ 그거 딱히 기간제한이라던가는 없을 거랍니다~ 비록 예약부분이 좀 빠듯하긴 해도... 좌우간 1회성 블랙카드랑 비슷한 티켓이니까요~"
라고 별 생각 없이 물어보았다. 아니, 화연호가 아니면 저런 장난을 치고 다니는 다른 늑대는 없겠지만. 나야 뭐... 평소처럼 안 돼~ 라고 말은 하겠지만. 그 안 된다는 표현에 그냥 물러서는 늑대가... 또 있을까? 아랑의 표정이 잠시 구겨졌다가 펴진다. 지금은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네.
“ 요리 솜씨가 있는 편인 경우엔 그럴 거야~ ”
후후, 웃었다. 직접 만들어도 맛없는 경우가 있다는 걸 잘 알긴 해. 그러나 진짜로 맛없는 음식을 해주는 사람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을, 요리 잘하는 (고기 요리 한정이겠지만) 사람 앞에선 할 수 있지.
*
왜 움찔할까? 이번엔 손등을 댄 것도 아닌데에.
“ 그래~? ”
맘에 들었단 말에 약간 의기양양하게 미소했다. 맘에 들만큼 적당히 귀염성 있었나보다. ...근데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 아니니? 라고 묻고 싶어졌을 때.
- 그럼 나도 귀염성 있는 말을 해줄까?
라고 말하길래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생각했다.
- 네가 내 눈앞에 있어서 이 밤이 예뻐.
...그건 귀염성 있는 말이 아니라 작업멘트 아니니? 아랑이 눈을 깜박거렸다.
“ 귀염성 없어. ”
냉정한 평가를 내린 아랑이 빵긋 미소했다. 대신에 약간의 공격성은 있겠다, 라고 생각한다.
“ 아까 그건 작업 멘트 같으니까, 귀염성 있어 보이려면 차라리 귀여운 행동을 하는 게 낫겠다아~ ”
조언 비슷한 걸 했지만, 어째... 어째 지금 한 말 때문에 쟤가 귀여운 행동을 한다면 대체 뭘 할지가 걱정이... 조금 드는 것이다. 왜 걱정이 되지...? 왜 조금이지만 무섭기까지 하지이...? 아까 그 불꽃쇼와 태워먹은 고기 때문에 그럴까, 싶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한편으론 행동은 능숙하게 귀여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데, 그건 그것대로 쪼꼼 무섭다...
“ 근데 너무 파워풀한 느낌은 내가 춰도 안 살더라고, 그 약간 큼직하고 남자인 댄서가 추는 춤 말이야아. ”
약간 파워풀...하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큼직하고 각진 선이라고 할까 딱딱 끊어지는 선을 표현하는 남자 댄서의 춤을 따라하면 그 느낌이 잘 살진 않는다며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춤에 재능이 있는 편이지만, 신체적인 한계는 당연히 있다. 3점슛은 할 수 있지만, 덩크슛은 못하는 것처럼. 아랑은 잠시 또래의 여자아이들보다 자그마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외에도 남들이 할 수 있는 걸, 할 수 없는 게 여러 가지 있는 편이지. 평균보다 작은 편이란 거 잘 알고, 그게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불편할 때는 많은 것이다.
“ 그런가아? ”
고개를 기울인 아랑이. “ 그럼 밤바다랑 백사장에 쪼꼼 어울렸던 스텝이라고 생각할래~ ” 라고 답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은 그거면 되었다. 하늘이도 나도 다친 데도 없고, 배려 받아 기분도 좋고, 예상보다 긴 칭찬 비슷한 것도 들었으니까.
“ 야무지구나? ”
눈을 잠깐 동그랗게 떴다가 웃으며 그래, 그럼. 이라고 답했다. 두 개 다 내가 쓰면 되지. 아랑은 자리에 앉아 한 손수건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수건으로 발을 털고서 샌들을 신었다. 옷은 샌들을 신고 일어서서 제대로 털었다.
“ 음...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고 특별하게 췄겠지이~? 다른 말도는 특별하면서도 평범하게 췄다고 해야할까~? 즐거웠어어. ”
하고 꺄르륵 웃었다. 모르긴 해도, 얘가 즐거운 춤을 췄단 건 전해질 정도로. (하지만 즐겁기만 한 춤은 아니었다. 표정관리 잘하는 편이어서 다행이라고, 금아랑은 또 한 번 생각했다.)
“ 응, 네가 피아노 소중히 여기니까 네가 연주하는 피아노도 기뻤을 거야. ”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가, 이 대답이 맞나 싶어졌다. 평범하고도 특별한 춤, 이었을까. 특별하고도 평범한 춤, 이었을까. ...아니, 근데, 춤 춘 상대가 춤보다 더... 특별하게 느껴지면 나 차후에 곤란해지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다가 하늘에 뜬 달에 시선을 주었다. (하늘이가 없었다면 허공에 손을 붕붕 휘둘렀을 테다.) 역시 만월은 아닌데에. 기분이 이상해져. 피아노가 더럽혀지거나, 망가지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었지만, 에서 하늘이 피아노를 소중히 여기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아랑은 방긋 미소하며 네가 연주하는 피아노도 기뻤을거라고 답했다.
“ 연주? ”
하늘이가 했구나. 연주자석과 거리가 있어서 못 봤는데, 음악은 들렸지. 리드하기에도 리드당하기에도 좋은 음악이었는데.
“ 춤을 리드 하기에도 좋고, 리드 당하기에도 좋은... 그리고 포크댄스랑도 다른 춤-왈츠-과도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 연주하는 사람이 섬세하게 신경 써줬겠구나... 싶었는데에. ”
“연주자가 너였다는 걸 알았다면 춤추기 전에 1열에서 봐둘 걸.. ”
눈썹이 조금 시무룩 내려갔다. 나 왜 못 봤지... 아깝다아, 평소에 –과하게 귀찮은 응석은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 때문에- 조르지 않는 걸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같다. 아쉬워하는 티를 지우려는지 고개를 털레털레 저어보였다가 빵긋 웃었다.
“ 좋은 연주였어, 하늘아. 늦은 인사지만 섬세하게 신경 써 준 연주 고마워. ”
“ 너도 춤을 췄을까? 너도 췄으면 좋겠다아, 네가 연주해줘서 좋은 추억을 만들었지만, 연주자인 너도 좋은 추억이 생기는 게.... 모두가 기쁜 일이니까아. 좋은 음악을 선물해준 사람도 좋은 추억이 생기는 게 난 기뻐. ”
>>308 너무 귀여우면 곤란함을 느낄까봐 무서운 게 아닐까요 ㅇ.< ? 하지만 아랑주는 무섭지 않다! (오히려 좋다!) 쪼꼼이든 많이든 서툴게든 능숙하게든 편하게.. 편하게 귀여운 행동 적어주십쇼 ㅎㅁㅎ (안 귀여운 행동 적어주셔도 좋아요 :D) 아........ 아아.......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 감사합니다 :D
>>309 제가 볼 때 문하는 자각한 거 같아요... oO (문하주가 문하가 자각했다는 것을 자각을 못하셨을 뿐이다...) 아.. 그거 이해합니다... 저도 캐릭터에 질질 끌려갈 때 있으니까요! 문하가... 문하가 문하주를 자주 끌고 가는 편이군요... ^.ㅜ... (이해하는 표정)
근데 손등 댔을 때 자제 못할까봐 움찔한 것도 귀여웟는데... 이번에도 움찔한 게 귀엽고 다른 애들 입에 젠틀하지 않게 넣어준 것도 귀여워서 아랑주 우러여......... ㅠ....ㅠㅠ.... (울먹울먹) 화연호가 귀엽고 치명적인 거 다해먹는데 금아랑은 뭘하면 좋지....
그는 그녀가 수긍했다는 것 보다는, 선생님들이 까무러칠것이라는 거에 의문을 표했다. 아니 왜? 학생들이 좀 밤새서 놀고싶어할 수도 있는거지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같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들었을 테다.
" 크으윽... "
어쩐지 분해 보이지만 굳이 더 묻지는 않았다. 아마 슬혜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대는 제스쳐를 취했기 때문일까? 그런 제스쳐까지 취한다면야 연호는 굳이 묻지 않는다. '그럴 만한 이유' 가 뭔지는 몰라도, 남의 프라이버시 정도는 지켜주자는 이유 때문이었다.
" 그것도 그런가? 뭐, 내가 나중에 어디 칵테일바 같은 곳에서 셰이커를 흔들고 있으면 애들이 놀라기는 하겠다. "
연호는 본인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얌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있기에, 그런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친구들이 어디 아픈게 아니냐며 찾아와서는 정신과 상담을 받아볼 것을 진지하게 요구할테다. 하지만 뭐, 연호는 언젠가 할 일이 없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정신과 요구는 당차게 뿌리치도록 하자.
" 아, 진짜 있었던거야? 다음에 소개시켜줘! "
라고는 하지만 그에게 고양이를 소개시켜 주는것은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야생성이 남아있는 늑대 소년에게 고양이를 소개시켜줬다간, 고양이가 무서워할 수도 있으니까.
" 또 필요하면 말해. 사줄수도 있고, 사는곳을 알려줄 수도 있으니까. "
파는곳은 의외로 멀지 않았다. 학교에서 10분정도 걸으면 나오는 번화가에 수제 디퓨저를 파는 곳이 있었으니까. 연호는 그쪽 사장님과도 친했다. 자주 가서 디퓨저를 사는 모양이다.
" 뭐.... 그렇게 대단한 거였어...? "
이 티켓 코팅해서 다녀야 하는거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는, 그 다음 고민으로 '누굴 데려가야 하나' 에 봉착했다. 절대 친구들은 안된다. 그 녀석들을 이런 고급진 곳에 데려갈 수야 없지.... 너희들은 365일 국밥이면 충분하다 악마들아...
깜, 빡. 딱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다. 무서우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던 것. 손끝으로 더듬는 곳에 어떤 흔적이 남아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어쩐지 온기 같은 것이 조금 남아있는 것 같아서ㅡ 아니, 어쩌면 스스로가 뿜어내는 옅은 열기일지도 모르지. 뒤늦게 상황을 자각한 눈꺼풀이 잘게 떨린다. 그 때까지 마주하고 있었던 시선을 더 이상 마주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서, 새슬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상해.”
볼멘소리같은 중얼거림. 그러나 그것이 거부의 의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그냥.... 이상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 이마에 스쳐 지나간 행동의 의미나, 제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고 있는 일 같은ㅡ 지금의 새슬은 도저히 명확히 설명하거나 정의내릴 수 없는 것들. 나는, 너를? 허공에 던져도 메아리밖에 돌아오지 않는 질문. 하지만 이 순간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이상하게 느려지지 않는 두근거림 한 가지.
평소엔 자연스러웠던 행동이, 이상하게 뚝딱거리기만 한다. 이마에 대었던 손 끝을 겨우 제자리로 돌려놓고, 새슬은 이때까지 해 왔던 것과는 달리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겨우 돌아누웠다. 얼굴을 감추려는 듯 한 몸짓이었다. 희미하게 달아오른 귓바퀴가 가려지지 않는 것은 눈치채지 못 한 채.
영화, 영화나.. 마저 보자. 그러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이미 영화가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하는 치사하네.”
새슬이 작은 소리로 툴툴거리듯 내뱉었다. 옆얼굴에 꽂혀들지도 모르는 시선과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난데없이 훅 들어온 질문에 그는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민에 빠졌고, 무언가 끙끙 한참동안 고민하는가 싶더니, 들고있던 수저를 조용히 내려놓고서....
" ....기분, 나쁠것 같은데. "
뒤에 자그맣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은 기분탓일까, 대답하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기에 정확히 어떤 표정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 가라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 뭐, 없었어? "
조금 시무룩해보인다. 아무래도 자신은 귀염성을 노린것 같은데 잘 되지 않아서 그런걸까. 그래도 뒤에 아랑이 조언해준 말 덕분에 잠시 생각에 빠져본다. 귀여운 행동. 그의 인생에서 귀여운 행동을 해본 기억이 얼마나 있을까? 어릴때 말고는 딱히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모습을 보여줄 대상도 없었다. 해봤을 리가 만무하지만 그래도 티비에서 본 것들을 따라하는것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가방을 뒤적거리는 연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좋아. 그럼... "
쪼꼼만 귀여워달라고는 하지만... 그에게 귀여움의 강도 같은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귀여운 행동을 해보질 않았는데 강도같은것을 정할 수가 없지 않은가? 지금 그가 하는 귀여운 행동이 그에게 있어서 가장 귀여운 행동이 될 것이며, 가장 귀엽지 않은 행동이 될 테다.
가방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인형 같은것을 꺼낸다. 짜잔- 하고 꺼낸 인형의 정체는 바로, 상어와 강아지를 합쳐놓은 것 같은 모습의 상댕이였다. 그 상댕이는 양의 탈을 쓴 모습을 하고있었고, 연호는 그 상댕이를 자신의 옷 안(목부분이었다) 에 집어넣어 머리만 보이게 한 뒤에 양 손에 수저와 포크를 하나씩 들고서 V자 만세를 하면서
문하는 새슬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 그러나 훨씬 사람다운 무표정. 차갑게 얼어붙은 절망과 메마른 고독의 흔적이 덜어진, 훨씬 더 보통의 십대 소년다운 무표정으로. 이상해, 하는 새슬의 말에 문하는 희미하게- 결코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많이 들어, 그런 소리."
나눠본 기억이 있는 문답이다. 화자가 서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같은 문답이었지만, 이번에 오간 것은 그 색채가 조금 달랐다. 그때처럼 금을 긋는 문답이었지만, 문하가 이번에 긋는 금은 새슬과 그의 사이를 가로질러 막아서는 게 아니라 새슬에게서 문하에게로 이어지는 금이었다. 조심스레 표시해두는 것이다. 자신에게로 오는 길을. 그 금을 따라 다가올지 아닐지는 새슬에게 맡긴 채로.
그는 다시 새슬의 앞머리를 내려주고는, 새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면서 다시 시선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영화라고 해야 애초에 그렇게 긴 영화도 아니었던 그것은 이미 언제건 스탭롤이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을 에필로그로 달려가고 있었다. 치사하네, 하는 새슬의 투정에, 하는 나직이 말했다.
"─모든 좋은 것들은 다 나를 떠나가버렸는걸."
그러니까 이 정도 치사한 것쯤은 봐줘도 괜찮잖아. 나직이 새슬을 따라, 투정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대로 그녀를 끌어안아버릴 것 같았기에, 대신에 그는 새슬에게 꾹 끌어안을 쿠션 하나를 더 내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