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 장난으로 말한 하늘이+비랑이+암튼 기타 잘 치는 애 3명이서 해서 밴드부 만들자라는 말이 정말로 실현될지도 모르는 것이 되는가. 하지만 사실 우슷개소리라서 시행 되긴 힘들 것 같다는게 슬프네. 일단 하늘이부터가 동아리를 자신은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믿고 있는지라.
문하는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누군가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그것이 자신과 관련된 것이거나 자신이 꾸며낸 것이라면 더더욱.
그제서야 문하는 문득 주변을 둘러볼 정신이 들었다. 왠지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고 그저 막연히 바라기만 하고 있던 그 무언가가, 절대로 이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무언가가 자신이 예기치 못한 사이에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아서. 깍지를 껴오는 새슬의 손길에 그는 자신의 심장 속에 무언가가 꿈틀대며 뛰고 있는 것을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꼈다.
"─너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문하는 나직이 말했다. 새슬이 양인 줄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건 양이니 늑대니 하는 것과는 관계없었다. 산들고에는 늑대나 양이 많이 입학해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학교를 갈 때마다 마음이 편해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함께 있음으로써 안온하게 가라앉는 이 안락한 정적은 문하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던져봐도 답은 없었다. 그냥, 그냥 그랬다.
"그래서 졸린 거 아닐까."
하고 문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들어보았다. 기타를 잡으러 가려면 기껏 쥔 손을 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싫어서 그냥 영화를 틀기로 했다. 그냥 이대로 잠이 들어 버리더라도, 영화 소리를 배경음으로 잠들어도 나쁠 것은 없겠다 싶어서. 문하는 리모콘을 들어 TV를 켜서는, 리모콘을 몇 번 눌러 영화를 틀었다. 부러 조금 잔잔한 영화로 골랐다.
그리곤 리모콘을 내려놓고, 새슬의 손을 리모콘을 쥐고 있던 손으로 옮겨쥐고는 다른 팔로 새슬의 어깨를 조심스레 당겨안았다.
일본 영화였다. 스스로의 즐거움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주어지는 삶의 의무에 처절하게 매달린 워커홀릭이 장기 휴가를 맞아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는 영화였다. 워커홀릭은 몇 차례인가 휴일을 보내겠답시고 이런저런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을 마주하다가, 퇴근길에 자주 들리던 꼬치구이 집의 사장에게 고향에 돌아가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자전거 위에 올라타고는 자신의 본가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평이하고 잔잔한, 일본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 담겨있는 전형적인 일본 영화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느끼는 기묘한 안정감은 비단 혼자만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 너도 그랬구나.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네. 신기함과 긍정의 뜻을 담은 시선이 잠시 문하를 올려다보다가 금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새슬이 쉽게 잠에 빠져드는 것. 물론 곁에 자리한 문하가 늑대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요소는 심적인 것들이었다. 타인의 온기와 계속해서 옆에 있다는 감각, 서로가 기묘하게 닮아 있음을 인식하는 데에서 오는 이유 모를 안심. 비록 그것들을 무어라고 정확히 칭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들을 부정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문하의 어깨에 가볍게 기댄 채, 새슬은 금새 영화에 젖어들었다. 즐거운 장면이 나오면 웃고, 황당한 장면이 나오면 저게 뭐야ㅡ 따위의 시답잖은 추임새를 넣고, 진지한 장면이 나오면 조용히 침묵했다. 영화는 흘러, 자전거 페달을 있는 힘껏 밟고 올라타는 주인공. 여전히 스크린 속에 집중하고 있는 눈동자가 사뭇 고요하고 진지하다. 자전거 여행, 이라. 시선은 돌리지 않은 채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새슬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 자전거 타 본 적 없어.”
아니, 있었던가? 그치만 아주 오래 전의 일일거야. 기억에 없는 걸. 웅크려 굳어 있던 팔다리를 피자, 천들이 스치며 작게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치만 재미있겠다. 자전거 여행.”
소년에게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옆으로 푹 고꾸라진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새슬의 고개가 향한 곳이 소년의 어깨가 아니라 다리였다는 점일까.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새슬이 문하의 허벅지께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베고 누웠다. 그러고선 태평스럽게 누운 채 문하를 올려다보며 웃는 것이, 퍽.. 뻔뻔하고도 능청스런 웃음이었다.
영화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 다니던 하굣길의 해바라기가 핀 그림같이 아름다운 언덕에 앉아있다가, 주인공이 고향에 돌아온 이후부터 띄엄띄엄 존재가 암시되던 주인공의 옛 소꿉친구를 마주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어갔다. 원래 문하는 이런 장면을 보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달콤한 이야기들은 항상 문하만을 이야기책 밖에 남겨놓고 자기들만의 행복을 한 치 흘림없이 꼭꼭 싸들고는 엔딩크레딧 뒤로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뒤에 혼자 남겨지는 느낌이, 다시 실감있게 되살아나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 고독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결말이 있었고 문하에게는 문하의 결말이 있었으니까. 세상을 등진 채로 고요하고 삭막하게 어두운 나날들만을 조용히 떠돌다 홀로 죽어가리라는 결말. 그러나 어느 날, 비 오는 하늘 아래에서 만난 이 푸석푸석한 가벼운 녀석이, 자신이 그려두고 있던 모든 미래에 대한 예상과 예견을 꺾어버렸다.
자신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마음에 품고 있는 뜻밖의 동행자... 문하는 문득 자신의 앞에 놓인 나날들이 더 이상 방랑길이 아니라 여행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너무도 섣부르고 너무도 무모한 예감을 느꼈다. 어두운 나날이라도 옆에 함께 손을 잡고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언젠가는 햇살이 쏟아지는 곳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문하는 문득 새슬의 손을 꼭 쥐었다. 그제서야 문하는 영화 속의 얘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르쳐줄 수 있어, 자전거 타는 법... 그냥 뒷자리에 태워줄 수도 있고."
자신이 꺼낸 자전거 여행 이야기에 새슬이 반응하자, 문하는 대답했다. 그러면서 문하는 머릿속으로 내가 자전거를 관리해본 지 얼마나 되었더라,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 덕분에 새슬의 머리가 자기 무릎 위로 떨어지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문하의 허벅다리는 상당히 탄력있고 단단한 것이었다. 질긴 고무로 감싸놓은 철기둥이라는 느낌일까. 조금 서늘한 그것이 베고 있기에는 딱 좋았다. 자기의 무릎에 뭐가 떨어졌는지를 깨달은 문하의 온 몸이 흠칫 하고 놀라는 게 느껴졌다. 시선을 들어보면, 아까보다도 좀더 크게 눈을 치뜬 문하가 있다. 기분 탓 같은 게 아니라, 그의 얼굴에 확실히 드러나있는 당혹감. 그리고, 그의 얼굴에 하얀색과 검은색을 제외한 또다른 색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짙지는 않았지만, 방 안의 은은한 숲 조명등의 밝기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은 분명하게... 그의 뺨이 빨개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말 좀 하고..."
아무 소용없는 타박이 반쯤 흘러나오다 만다. 본인도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안 건지. 문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새슬을 부루퉁하게 내려다보다가, 새슬의 어깨를 안고 있었던 손을 뻗어서는 새슬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보기 시작했다. 새슬의 체온이 옮아가서 그런가, 새슬이 베고 누운 허벅지는 천천히 따뜻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