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혼란스런 세상에서도 어떻게든 삶을 연장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독려하던 우리에게 다가온 변화는 급작스러웠다. 옆에 있던 사람들의 손에서 불이 나가고, 예순 먹은 할망구가 갑자기 젊어져선 괴력을 뽐낸다고 생각해봐라. 그리곤 나도 다친 팔이 멀쩡해지고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어느 언어를 내뱉어서 커다란 얼음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까?
빈센트가 어느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이 곳에 서게 되었는지 린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배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지식을 축적하는 분야에 타고남은 어느정도 알아챌 수 있었다. 말투가 경박하지 않고 적당히 정돈되어 있으며 어휘를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맞추는 행위가 이미 숙달되어 있다. 어린 시절 궤도에서 이탈하여 어설프게 알량한 지식을 잊지 못하게 된 죄로 어중간하게 앎이 더 괴롭다는 말 처럼 단단한 성채 뒤에 황폐화된 마을이 남은 상태로 아둥바둥 살아온 저를 되돌아본다. '괜찮다.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알아가면 된다.' 씁쓸함을 삼기며 천천히 상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당사자가 저희가 아닌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들을 보아야 할 부모와 경찰을 응원해야 할지. 아니면 한때 어린아이였던 입장으로서 탐구열에 적당히 거들어야 할지 참 여러모로 고민이 되는 생동의 계절이와요. 빈센트군의 말씀처럼 불은 저희의 방식대로 인간을 어여삐 여기지 역지사지의 심정은 알지 못하니 말이와요."
뜨거운 화기가 확 솟아오르고 지면을 달군다. 이마에는 금방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손바닥 근처에 붉은 빛이 힘차게 넘실거리며 막 지면을 박차고 떠오르는 태양의 축소판 같이 사방을 널리 비춘다. 덩달아 보는 사람의 마음도 고양되어 먼 어딘가로 마구 달려가고 싶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이는 직접 경험해 보아야만 안다. 어른이 아무리 옆에서 위험하다 하여도 결국 말썽을 저지를 아이들은 그 기분에 취해 사고를 칠 테니 차라리 옆에서 지도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의 사정이라며 숨기고 숨겨도 결국은 최악의 방식을 통해서라도 이후에 다 알게 되듯이 언젠가는 그 위험성을 어떠한 경로로든 깨닫게 될 테니. 그러나 어른이 되어 알게 되더라도 오히려 그 흥분을 삭히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제 앞에 자리한 그는 그러한 부류일까.
"자신과 적의 위치를 파악함은 전투에 있어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와요. 하지만 시각적 만족이라는 점은...각자의 취향이니 소녀는 잘 모르겠사오만."
잠시 생각을하다 신중하게 말을 고른다.
"아군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개인의 자유라 여기겠사와요. 마도사분들께 적이 공격에 확실하게 제거되었다는 증거이자 성취감이 될 수도 있을테니까요. 소녀도 난적을 만났을 경우 제 기술로 돌파하는 경우 도취감을 느끼니 이와 같은 종류라 추측하겠사와요."
"제 경우는... 적당히 거드는 편을 택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무슨 결과를 만드는지, 그리고 그 결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리고 일을 저지르고 그 일에 대한 비난과 수습을 도맡는 것이 '책임진다'는 행위임을 배우면서 성장해가지만... 한번 제대로 저지르면 그 누구도 그 결과를 대응할 수도 없고, 수습할 수도 없는 일이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서..."
빈센트는 옛날의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따뜻하고, 때로는 뜨겁고, 거대하고, 파괴적이고, 아름다운 불에 매료되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불은, 어린아이의 손에 갇혀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그리고 빈센트는, 자신이 일으킨 결과를 보게 되었다. 부모님이 힘을 합쳐 어렵게 장만한 집은 불타올랐고, 어렵지만 미래를 생각하며 벽돌처럼 쌓아올린 수많은 과거들, 해야 할 일을 끝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을 반겨주는 현재,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힘들면 쉬게 해 주고 기쁠 때 그 기쁨을 소중히 보듬어줄 미래도 한낱 연료로 변했다.
"...어린아이의 장난에서 시작한 불꽃이, 집 하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불태울 수 있으니까요. 하하, 참 많이 혼났습니다. 재미는 있었지만요."
그리고 빈센트는, 그 모든 불을 보고, 자신이 죽게 될 것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빈센트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오히려 아름다워서 좋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자신이 집어삼킨 모든 것과 함께 죽어버리는 불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렇다면 나도, 저 불과 한 몸이 되어 타오르다가 죽으리라. 불을 보고 우는 아이가 아닌, 오히려 불을 보고 기뻐하는 정신나간 아이. 시냇가에서 작게 분기한 물줄기 하나가, 끝에는 태평양과 대서양처럼 극단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빈센트는 그 '다른 물줄기'로서 여기 서 있었다.
"...이해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분은 근년 들어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빈센트는 상대의 이해심에 감사를 표한다. 차마 초면에 '당신은 끔찍한 괴물이군요' '당장 내 앞에서 꺼져! 이 미친 새끼야!'라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적당히 이해해주는 척을 한 것인지, 아니면 빈센트의 비틀린 사고관도 이 비틀린 세계 속에서라면 최소한의 존중은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빈센트는 이번만큼은 말의 맥락을 짚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항상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무시하다가, 나중에는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자비를 구걸하죠. 그래서 저는 그들이 신에게 가까이 닿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신은 자비가 넘치시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있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