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혼란스런 세상에서도 어떻게든 삶을 연장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독려하던 우리에게 다가온 변화는 급작스러웠다. 옆에 있던 사람들의 손에서 불이 나가고, 예순 먹은 할망구가 갑자기 젊어져선 괴력을 뽐낸다고 생각해봐라. 그리곤 나도 다친 팔이 멀쩡해지고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어느 언어를 내뱉어서 커다란 얼음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방이 붉은 빛으로 가득하다. 가볍게 내딛는 걸음마다 비린 액체가 들러붙어 게타의 굽을 붉게 칠한다.
"인간의 명이란 것이 참으로 덧없사와요."
바람도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 가느다란 빛을 등지고 선 소녀의 인영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윤곽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가운데 가느다란 손의 음영이 입술께를 톡톡 두드리는 움직임만이 보인다.
"덧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과정마저 불합리하기 이를데가 없사와요."
"..."
"적자생존, 양육강식, 최소한의 양심마저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세계인가요. "
애수어린 목소리는 자박자박 천천히 걷는 걸음마다 진정으로 슬퍼하는듯 한탄을 읖조리지만 어둡게 눌러붙은 핏빛 동공은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같이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하얀 손이 어둠에 잠겨 무너진 인영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소녀가 고개를 숙이자 뒤의 가느다란 빛줄기가 흐리게 그 얼굴의 윤곽을 비춘다. 입가에 보기 좋은 호선이 세필로 선을 긋듯 반듯하게 그려진다. 어깨에 닿는 촉감에 인영이 저를 숨기고 싶은듯 바르르 떨며 몸을 웅크린다.
"...저리가. 너도 저놈들이랑 똑같아. 이용할 생각만 가득하고... 뻔해."
잔뜩 움츠리며 가시를 세우고서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주위를 훝는다. 쓰러져 싸늘하게 식은 몸뚱아리들이 좁은 골목을 메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맹렬하게 자신을 쫒아오던 자들이 앞에 선 가녀린 여자 한 명에게 당했다. 가디언? 아니다. 가디언이 이런 하찮은 뒷골목 주민과 빚쟁이들 다툼까지 신경쓰지는 않을것이다. 그렇다면 헌터? 헌터일까?
소녀, 린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바뀐 상황에 고민을 하는것이 뻔히 보여 조금의 여유를 주었다. 어차피...
"많이 아파보이시네요. 상처부터 살펴봐야 했는데... 소녀의 불찰이와요."
그가 반응할 틈도 없이 작게 손가락을 튕긴다. 그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직인다.
"....!"
...아프지 않아! 지나치게 가뿐한 느낌에 분명 사채업자들에게 크게 베였던 다리를 들여다본다. 상처가 없어진 멀쩡한 맨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내친김에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키려하자 소녀가 다가 와 부축한다.
"이해해요. 아프고 무섭고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할 것이와요."
입구를 막고 선 소녀가 부축을 하려 자세를 바꾸자 가려진 빛이 마침내 그의 얼굴을 비춘다. 옆을 보니 흰 유카타를 입은 앳된 얼굴의 소녀가 살포시 다정하게 웃는다.
"걱정하지 마시와요 우리들의 신은 길을 잃은 자들에게 언제나 자비로울지니."
흔들리는 동공이 붉은 눈에 비친다.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며 린은 눈웃음을 지었다.
"아직 덜 아문 상처가 나을때까지 소녀와 함께해 주시와요."
홀린듯 소녀의 손을 잡고 골목길을 나서는 그의 등 뒤에 다리에서 흐른 붉은 자국이 길에 어지러히 떨어진다. 린은 상대의 베인 상처를 한번보다 냉소일지 희소일지 모를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세상은 제멋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대로 해석해왔었다. 그렇기에 약자에겐 양심이란 사치다.
그러고보니 누나 의념이 정지였지. 확실히 그런 느낌이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바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고개를 갸웃 거리게 된 것은, 누나가 멈춰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겠지. 개인의 성향과는 관계 없이 의념각성자로써 싸움에 임하는 자들은 누구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레벨을 올리고, 기술을 배우고, 경험을 쌓아가며 나아간다. 생물이란 멈춰설 수 없는 존재다. 가만히 있더라도 나이는 먹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해도 기초적인 활동은 지속된다. 그러니, 뭐랄까, 나아가지 않으려 하며 나아가는 것을 붙잡으려 한다면, 오히려 높은 곳을 향하는 일 아니려나-
-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말로 하지는 않는다. 너무 길고 장황하잖아. 부끄럽고.
"아하하. 의념에 대해서는 나도 따로 배우긴 했는데, 어렵더라구요."
할아버지, 그립습니다. 지금 어디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같이 식사를 하면 좋겠어요. 메뉴는 내가 좋아하는 걸로. 정정한 사람이니까 패스트푸드도 잘 먹지 않을까.
"..나 구멍뚫려요? 어디요? 왜 나쁘지 않은 건데?!"
저절로 태클을 걸면서 함께 걸레를 가져오고 닦아내기 시작한다. 스으윽 걸레로 문지르자 흰 밀가루가 사라지며 원래의 색이 보이는 게 괜시리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