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예쁘다는 말을 들으니 역시 놀림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원 무대 앞에서 재롱잔치 하고 칭찬 받는 것 같은 기분을 고3 돼서 느끼게 될 줄이야……. 하지만 칭찬은 언제 들어도 좋으니까, 일단은 어떻게든 수긍해보려고 했다. 정말로 예쁜 면이 손톱만큼도 없지는 않겠지. 이제 그걸돋보기로 보면서 계속 예쁘다고 해줄 수도 있는 거지. 속으로 생각정리 하느라 잠깐 말이 없어졌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기분은 어때요?"
그러다 꺼낸 질문이 이거였다. 장난보다는 진짜 호기심에 가깝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툭툭 찔러보는 건 아니고, 저 정도로 행복한 얼굴 하고 말할 만큼이면 어떤 마음일까 궁금해져서. 세상이 막 분홍빛이고 그런가? 봄 아닌데도 어디서 꽃향기 나고, 비 오는 날에도 나한테는 햇빛 비추는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세상에. 제가 졌습니다."
대학생 되고 나서 오는 바다를 상상해보다 시아가 덧붙이는 말에 순순히 항복 선언한다. 신발 들고 있어 손은 못 들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했을 거다.
"어, 나 손 안 깨끗한데."
시아가 고갯짓 하는 곳을 보다 내미는 손에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된다. 잠깐 망설이다 양손 검지에 하나씩 걸고 있던 신발을 재빨리 한손으로 옮기고, 빈 손을 옷에 슥슥 문질러 닦는다.
그런 것도 올리는구나, 사람들은. 새슬의 상상력이 멋대로 영상의 내용을 만들어냈다. 뭔가 엄청난 형태의 거대한 것을 척척 쌓아 올리는 것이라던가, 아니면 엄청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품처럼 해변가에 서 있는 모래로 된 무언가라던가. 새슬이 상상한 것에서 규모만 조금(...조금) 줄인다면, 그래도 있을 법 한 일들이었다. 어떻게 그런 걸 만드는 걸까? 역시 타고난 무언가가 있어야겠지. 퍼져나가는 상상의 나래.
집, 이라는 말에 새슬의 손이 알 듯 말 듯 미세하게 굳었다가, 금새 다시 움직였다.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 할 만큼 찰나의 순간. 그러나 얼굴에 걸린 것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미소였다.
“있잖아, 학교는 어때? 그러면.”
성보다는 덜 복잡할 거 아니야. 산들고를 떠올리면서, 새슬이 모래탑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본관, 저건 별관, 저건 체육관. 딱이지! 천진하게 웃어보이곤, 모래탑을 깎아내리던 손을 잠시 멈췄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학교가 될 수 있을까ㅡ 따위를 가늠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렵네. 일단... 네모로 깎으면 되나? 조심스레 손을 뻗어 측면을 수직으로 다듬어간다.
소년의 손이 감싸쥐지 않은 다른 뺨에 무언가가 닿았을 때. 더 이상 바닷바람이나 파도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고. 짧게 떨리는 숨을 들이킨다. 또 다시 감각에 슬로우모션이 걸렸다. 소년의 체향이나 온기, 미약하게 볼을 눌렀다 떨어지는 연약한 살결의 촉감같은 것.
문하가 떨어져나가는 동시에, 새슬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한층 더 오른 열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무슨, 일이, 일어났지? 머릿 속 톱니바퀴가 온통 제자리에서 빠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도 떨어져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는 생각만큼은 또 이상하리만큼 선연해서, 더할나위 없이 혼란스럽다.
“ㅡ그,”
읏, 무의식 중에 튀어나간 소리를 입술을 물어 가로막는다.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저 눈을 내리깔기만 했다. 이게 뭐야? 글쎄. 속으로 질문을 던져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고.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해? 누구에게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하지만 지금 얼굴은 들키고 싶지 않아. 새슬의 몸이 훅 꺼지듯 문하에게로 기울었다. 툭. 이마가 소년의 가슴팍에 힘 없이 부딪힌다. 그 와중에도 열이 오른 머리로 어떻게든 문하의 말에 필사적으로 내밀 대답을 찾아서, 새슬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는, 길을 자주 잃어.”
가끔은 다치고, 가끔은 배를 곯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건 없어. 잠시 숨을 죽여 말이 없다. 잠시 후에야 다시 튀어나온,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나와 함께 있는 건 힘들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재보지 않았지만 아마 꽤 흘렀으려나? 사이좋게 돗자리에 누워서, 정확히는 서로 안고있는 모양새로 당신을 품고있던 그녀는 이따금씩 어깨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는 당신을 볼 때마다 살갑게 웃어보이며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세상엔 페로몬이란 것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판별되는 개성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먹음직스럽게는 보일지라도 그것엔 본능만이 담겨있었기에, 게다가 그녀는 양이기도 하니 자신은 물론 다른 이의 향내 역시 맡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늑대였다면 당신의 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도 그 대답은 지금의 결과와 딱히 다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당신 역시, 느껴지지도 않을 향기 대신 다른 체취를 따르고 있었을 테니까.
"후후후... 좀 부족했었나요~?"
꽤 여운이 남았는지 아쉬운듯 작게 속닥거리는 당신을 보던 그녀는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내리듯 쓰다듬으며 웃어보였다.
물론 그녀 또한 당신의 그런 마음을 모르는게 아니었고 같은 생각이기까지 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애틋한 감정은 서로 사랑을 나누건 그러지 않건 지속되는 모양이었다. 어찌보면 그만큼 서로를 원한다는걸 증명하는 셈이니까,
"그렇죠? 원한다면 언젠간 또 이곳에 올수 있지만, 지금은 또 지금대로 재밌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녀도 그런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자신의 어깨에 동그란 원을 그려나가며 아쉽다는듯 말을 내놓는 당신을 어르듯 한결 더 부드러워진 인상으로 마주보았다.
"주어진 스케줄이 있으니 어쩔수 없는걸요~ 그 대신... 다음에는 지금보다 더만족스러울 수 있도록 노력 해볼테니까요?"
마치 자신의 탓인양 투정을 부리는 당신이었지만, 어째선진 몰라도 그 모습이 전혀 당혹스럽거나 하지 않았다. 확실히 보기 드문모습이긴 했지만,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는 그 마음을 모르는게 아니었으니까. 대신 투정부리는만큼 다음을 기약하는 말로 달래어줄 뿐이었다.
늘 그렇듯,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천천히 순서를 기다리고, 서서히 단계를 밟아가듯 나아갈 뿐이었다.
"그리고 단 둘만을 위한 공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일단... 그 공간엔 '사람만한 고양이'도 같이 있긴 했지만, 당신이 그것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않는다면 최적의 장소가 될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자신의 턱에 입을 맞추다 투정부리는 그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해서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을까, 그 짧은 입맞춤에 답하듯 살며시 당신의 이마에 흔적을 따라남기며 생글거리는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네요~ 한켠으론 지금 힘을 다 빼지 않은걸 다행으로 여기셔야 할걸요? 춤이란거... 정말 간단하고 가벼운 춤이라 해도 몇분만 움직이고나면 금방 지칠테니까~"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서, 아직도 진하게 남아있는 아쉬움을 풀어내는 당신을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마찬가지로 즐거웠답니다~ 그대야가 이정도로 적극적일거라곤 생각을 못해서 좀 당황한 것도 있긴 하지만, 뭐 사람 일이란게 항상 눈에 보이는 행동만 할수는 없을테니까요~"
생각보다 대범했다 할까, 그전부터 생각했지만 이런 부분에서 절대 긴장의 끈을 놓쳐선 안된다 생각하는 그녀였다. 언제든 서로에게 빈틈이 보이면 그걸 확실하게 물고서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양껏 표현해낼 사이란걸 알고 있기에,
사람이 아니면 매체에서 배웠겠지. 영상 매체도 여러 종류인데. 유튜브? 영화? 드라마...?? 아니면 저거 다 일까. 신체적 습득능력만 좋은 게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 Did it hurt when you fell from heaven?
“ Un italiano? ”
아랑은 당황스런 얼굴로 이탈리아 남자가 널 이렇게 만들었냐고 한국어로 물어볼 뻔 했다. 사람한테 배운 게 아니랬지, 참. 여행용 간단한 외국 회화는 알아들을 줄 알지만. 그 이상은 자신이 없다. 짧게 물어본 이탈리어어는, 번역하면 ‘ 이탈리아 남자? ’ 라는 뜻이다. ‘ 이탈리아 남자가 널 이렇게 만들었니? ’ 는 이탈리아어로 못 물어봐. 예쁘다. 아름답다. 미인이다. 정도는 기억하고 있지만. ...아니, 이탈리아 남자가 여자한테 하는 말의 80%는 의미 없는 작업멘트라고 알아들어도 무방하지만, 연호는 한국인이잖아...
*
좋아. 그럼 여기에서. 춤을 추듯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움직인 연호의 몸은 아랑과 마주보는 곳에서 척, 하고 멈추어 섰다. 아랑은 폰을 가디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쫌 불안하긴 했지만, 떨어져도 가디건과 케이스가 핸드폰을 지켜 주겠지. 그리 멀지도 그리 가깝지도 않은 곳의 캠프파이어 불빛과, 도시보다 밝은 하늘의 달빛이 서로의 얼굴에 묘한 빛 반사를 만들어 낸다. 아랑은 조금 불안했다. 물론 그 불안함을 언제나처럼 얼굴에 티내지 않고 빵긋 웃었지만.
랑, 오늘은 조금 차분한 느낌이네?
“ 그런가아? ”
아랑은 다시 평소처럼 애교 있는 별사탕 같은 목소리를 내고 빵실빵실 웃는다. 차분하다기보다는 불안하다. 집이 –울타리가-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친구들과 바다 여행은 좋은 거지만, 역시 잠은 집에서 잠들고 싶다고 할까... 집에 돌아갈 수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더 차분 – 숨기고 있는 감정이 불안에서 우울로 변할 수도 있겠다 - 해질 수도 있겠지.
뭐, 그것도 좋아.
달빛에 어울리는 미소를 띄우고서 고개를 한번 까딱이는 연호를 물끄럼 보다가.
“ Möchte ich jemanden? ”
툭 묻고서 방긋 웃어보였다. 그냥 못 들은 척 해줘. 못 알아들으라고 외국어로 말한 거니까. 괜한 응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