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는 핸드폰을 그렇게 들고 서 있었다. 새슬이 천연덕스럽게 웃는 것에, 문하는 눈을 깜빡이다 새슬을 따라 웃어보였다. 딱히 우스운 건 아니었지만, 그냥 웃는 얼굴을 보니 따라해보고 싶었다. -문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분좋은 웃음' 이라는 개념이 문하의 머릿속에 없기에 그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핸드폰을 들고 서 있었다. 영상이 끝나 화면이 검게 변해, 새슬의 얼굴에 어려 있던 반사광이 없어졌는데도 새슬이 그걸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문하는 그것을 계속 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새슬의 모습이 화면 액정을 넘어 그의 눈에 담긴다. 그러고 보면 그의 눈은 텅 비어있는 핸드폰 화면을 퍽 닮았다.
"?"
새슬의 그 뜬금없고 대담한 제안에, 문하는 나? 하고 되묻듯이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자신을 가리켜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조금 움찔했다. 그 동영상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그 춤추는 사람들의 동작 위에 자신과 새슬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다고 할 수가 없었기에.새슬이 내민 손을 쥐고 따라서 춤추다 보면 여름이라는 것에 도착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네가 나를 잡고 이끌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같이 찾아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 너도 나와 함께 있어 주는 걸까?
또 웃는 얼굴이네. 새슬의 눈동자가 조용히 문하의 휘어진 입꼬리를 눈에 담았다. 그러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어서, 또 금새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는 체 하는 것이다. 이건… 그래, 어디로 가야 좋을지를 살피는 행동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어설픈 자기합리화의 완성이었다.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ㅡ.”
포크댄스를 출 줄 모른다는 문하의 말에, 새슬이 중대한 비밀 얘기라도 하려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가까이 해 달라는 손짓을 했다. 문하가 고개를 가까이 대면, 새슬은 장난스러운 속삭임을 남길 것이었다.
"사실, 나도 잘 몰라."
거기에 더해 작게 키득거리는 웃음을 조금 흩뿌린 뒤에, 새슬이 먼저 제 고개를 뒤로 뺐다. 녹색 눈동자가 무언가로 반짝이는 것 같은 착시가 인다. 그래도, 있잖아. 그냥 즐겁게 추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무슨 춤을 추든. 얼굴에 물든 말간 웃음이 벌써부터 퍽 즐거워 보이기만 한다.
“일단, 가자.”
새슬이 천연덕스레 문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노을이 막 떨어져, 천천히 보랏빛으로 물드는 모래사장으로.
오늘은 찾아가지 못했어. 그래서 편지를 쓰기로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우체국도 못가네. 편지는 나중에 직접 줄게. 대신 나 없을때 읽어야해. 안그러면 편지 들고 도망갈거야. 네가 곧 멀리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아쉽긴 하지만, 너도 1년동안이나 거기에 있었으니 다른곳도 여행을 해봐야겠지? 가서 돌아오지 않는것만 아니라면, 난 웃으면서 보내줄 자신 있어. 진짜야. 너도 울면 안된다?
다음번에는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최대한 빨리, 자주 갈게. 네가 떠나는 날에도 꼭 찾아갈게. 늦는다고 그냥 가지 말고, 기다려줘야해.
참, 아직 이르긴 한데 나 진학할 학교가 정해졌어. 산들고... 랬나? 뭔가 유명한 학교라더라. 난 잘 모르겠지만, 넌 알고있어? 알고있다면 나중에 편지 보낼 때 그쪽으로 보내. 우리 집 말고. 사진도 보내줘야돼.
새슬이 어디가 가장 춤추기 좋을지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문하는 새슬의 시선을 쫓다 말고 핸드폰에서 이어폰을 툭 뽑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아쉽게도 들고 나올 생각을 못 했다. 그러고 나서 새슬이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 자신도 보려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문하는 새슬의 초록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만 같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문하의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새슬의 눈동자 안에, 얼빠진 무표정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잘 보였기 때문에.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한 새슬의 손짓에, 문하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이야? 하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모를 질문에, 새슬은 대답했다.
"정말이지..."
새슬의 말간 웃음이 문하의 얼굴 위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다. 실소가 문하의 얼굴에 걸렸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즐거워서... 마음속에 차오르는 이 감정을 즐거움이라고 부를 줄도 모르는 문하인데,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다...
"그래."
억세기 그지없는 손이었지만, 새슬의 훨씬 작고 여린 손에 그것은 쉽게 얽매였다. 그리고 가볍게 이끌렸다. 지금 가까이서 아무 것도 걸쳐지지 않은 문하의 손목을 보면, 어쩌면 살이 튼 자국처럼 보이는 흉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새슬이 그것을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겠지- 창백한 피부 위에 창백한 색으로 남아있어 쉽게 보이지 않는. 칼로 남긴 것처럼 선명하고 깊지도 않은. 그러나 분명히 각지고 딱딱한 무언가가 쓸어내었음이 분명한 자국이. 해진 곰인형의 껍질처럼 희끗희끗하게 문하의 손목 위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게 별 대수로운 일일 것 같지는 않다. 손목에 남은 그것이 무색하게, 문하는 웃었다.
그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마치 모든 것이 뚝 멎어버린 듯했다. 소리도, 빛깔도 냉막한 정지 앞에 그 몸을 움츠리는 것만 같았다. 분명 매미가 울고 있다. 어스름한 푸른빛이 아직 남아 이 도시를 파랗게 비추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은 것이다. 의미를 잃은 소리며 빛깔들은 공허하고 먹먹한 울림으로만 남아 이 정적을 흔들지 못하고 죽어간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있었다. 얼굴에 드리운 그늘 때문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그늘 사이에서 그의 눈동자만은 분명히 보였다. 그늘보다 더 깊은 어둠을 머금고 있는 그 눈동자는 빛 한 점 닿지 않는 그늘 속에서도 더욱 어두워, 선명하게 초점을 잡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이토록 누군가를 선명히 증오해보기는.
말은 필요없다.
2. 『준비는 끝났어?』
그는 자전거 좌석에 걸터앉아, 태평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슥슥 밀어보고 있었다. 그의 새하얀 피부며, 머리카락이며, 후드티는 말갛게 부서지는 여름 햇살을 고스란히 함뿍 머금어 상앗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끝모를 검은 눈동자에마저 조그만 빛무리가 맺힐 정도로 찬란한 햇살 속에서, 그는 그 까만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았다. 딱히 말은 하지 않는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는 자전거 핸들에 걸어두었던 헬멧 하나를 툭 끌러서는 당신에게 가볍게 던져주었다. 그리곤 그 옆에 매달려 있던 다른 헬멧을 끌러서 자신의 머리에 뒤집어쓰곤 턱끈을 채웠다.
"딱히 불만은 없어." "네가 이것 하나만 기억해 준다면 말야." "내가 네 것이라면..." "너도 내 것이라는 거."
2. 『날 두고 가지마』
"...너한테서 배웠어.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항상 물리적으로 함께 있거나, 시선을 항상 너에게만 두고 있거나 할 수 없다는 거." "그렇지만 말야, 내가 네게서 눈을 뗀다면 그건 널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일 거고," "내가 네게서 떠나간다면 그렇게 해야만 다시 네게로 돌아와서 더 오래 있어줄 수 있기 때문이야." "...이기적이지. 미안해." "그래도, 그래서, 나는 언제까지고 계속 너에게 돌아올 거야. 언제까지고."
3. 『널 잊어버릴거야』
"...행복했어? ......조금이라도?" "......그렇구나." "네가 더 이상 나를 갖고 싶지 않다면, 나는 너를 놓아줄게." "그렇지만 말야, 만일 나중에라도 내가 다시 기억난다면...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면..." "나를 불러줘." "달려갈게."
노을지는 바다, 백사장 위로 달리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불규칙한 자국을 남겼다. 제 덩치보다 훨씬 큰 소년을 이끄는 밀색 머리의 소녀와, 너무나도 쉽게 그에 이끌려 가는 흰 머리 소년. 둘 모두 신발 따위는 어딘가에 벗어던지고 맨발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희미하게 파도소리에 묻힐 만큼 멀리 왔을 때. 새슬이 먼저 발걸음을 멈췄다.
파도가 바로 발치 근처를 더듬었다가 물러난다. 새슬이 부서지는 파도 조각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 문하를 향했다. 뛰어 온 탓에 미약하게 달아오른 뺨과, 가빠진 숨소리. 그것들이 잠잠해질 틈도 없이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ㅡ시작할까.”
아하하, 경쾌한 웃음소리가 파도에 섞여들었다. 잠시 문하의 손을 놓았던 새슬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마치 무언가에 마주대듯이, 모든 손가락을 쫙 펴서. 눈꼬리가 곱게 휜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거기에 덧대 오는 파도소리는 작은 오케스트라. 덮쳐 오는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선명히 빛나는 것 같은 흰색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스치는 게 예뻐서, 조금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발 밑을 적시는 저녁 바다의 바닷물은 차갑기 그지없는데도, 그 위를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발걸음은 따뜻하다. 발바닥에 와닿는 모래는 분명 거친데, 그게 체중이 실려 패여들어갈 때면 부드럽다. 평소 로드워크를 뛸 때 내딛는 안정된 걸음에 비해 이 무게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이끌려 후다닥 내닫는 발걸음은 분명 평소보다 불안한데, 이 소녀의 뒤를 따라가는 이 발걸음 하나하나가 너무도 편안하다.
그 모순 하나하나가 너무도 선명하다. 손 끝에 와닿는 밀빛의 맥박이 너무도 선명하다. 그것에 이끌려 그는 무방비하게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피하지 못했다. 노을을 등지고, 곱게 눈꼬리를 휘며 웃는 그 순간을. 그는 피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선명히 눈에 담아버리고 말았다.
이 밤이 끝나고 자려고 눈을 감으면, 이제는 네가 보이겠네.
살풋 웃는 새슬을 문하는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웃었다. 어설픈 웃음이 피어나면서, 무언가가 문하의 눈가에서 밀려나와 그의 뺨을 타고 굴렀다. 자신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아주 작고 사소해서 알아채지도 못할 무언가가, 그것도 아주 조금... 그렇지만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이킬 수 없도록 변해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응."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에 섞여, 그때 하늘에게서 얻어들었던 포크 댄스를 위한 곡이라기엔 너무도 아련하고 상냥한 멜로디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문하는 조심스레 새슬의 손을 잡은 채로, 여름의 첫 스텝을 내밀었다.
새슬이 문하의 눈을 마주했다. 그리곤, 문하에 눈가에서 맺혀 떨어져내린 것. 한없이 가볍지만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무거울 그것을 엄지로 훔쳐내었다. 왜 울어,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자기도 어쩌면 곧 울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그 위에 장난스레 다른 말을 덧씌웠다.
“자유부 활동 수칙. 자유롭게, 즐거운 것을 한다.”
그러니까 눈물은 규칙 위반이야. 즐거워지는 거야. 지금만큼은. 어르듯 속삭이고는, 곧 소년의 움직임에 새슬이 따라붙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발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빙그르르. 어깨에 걸려 있던 후드집업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살랑이는 치맛자락과 움직임에 흔들리는 머리칼, 가끔 터져나오는 가벼운 웃음소리. 가끔 파도가 찰박거리며 발목을 적시고면 물장구를 치듯 발끝으로 호선을 그리기도 하면서ㅡ 해가 지고 떠오르는 달빛을 작은 스포트라이트 삼아 춤을 추는 두 사람의 인영.
“이상하지.”
채 온전히 식지 못 한 뺨이 아직도 미약한 온기를 품고 있다. 스텝이 가까이 한 발 더 붙었을 때. 새슬이 중얼거렸다.
“마법에라도 갈린 기분이야.”
그리곤 또 다시 한 발 떨어져서, 빙글. 소년의 손에 의지해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원피스 자락이 예쁜 원을 꽃피우고는 곧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