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온의 월식 주막은 오늘도 왁자지껄했다. 교정과는 다르게 몇배는 활기차고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평소에는 잔을 맞대는 소리와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무알콜 막걸리와 스테이크의 진한 향기가 그도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듯 식욕을 조금이나마 돌게 했다. 원래는 두명이 왔어야 했지만 주막에 도착해 빈 자리로 가자 어머니의 패밀리어, 디어가 날아왔다.
[일이 있다는 걸 깜빡했지 뭔가요. 오러가 늘 그렇죠. 미안해요, 이건 사죄의 용돈.]
기껏 시간도 아끼고 왔더니! 그는 디어가 갈레온이 든 주머니를 쥐어주고 저 멀리 날아가자 앓는 소리를 냈다. 어머니는 오러다. 바쁜 건 이해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바빠도 괜찮은 건가 싶다. 슬슬 그만두실 때가 됐기 때문이다. 굴레를 끊어야 하지만 이미 그까지 대물림 되지 않았나!
그는 식기를 준비하는 주모의 손길에 상념에서 깰 수 있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6년새 한국 정서가 어느정도 스며들었는지 식기가 나온 이상 빈손으로 나갈수도 없다! 젠장, 왜 학생에게 술을 안 파는 지! 일단 대체품으로 버터맥주를 시켰다. 버터맥주를 기다릴 때, 주모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자리가 없어서 그런데, 합석 시켜도 될까요?" "예." "고마워요, 학생."
그는 합석하든 말든 알코올 하나 없는 무알콜 시늉내기 맥주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상대를 보기 전까지는.
그 날 그녀는 줄이 끊어진 기타를 남매에게 맡기기 위해 라온을 찾았었다. 적당히 보내도 됐겠지만 이 청개구리 같은 쌍둥이들이 굳이 오겠다고 해서 말이다. 덕분에 그녀는 그 큼지막한 기타집을 메고 라온으로 와, 눈에 띄지 않게 귀곡탑 근처로 가느라 고생 좀 했다. 오는 것도 좀 제대로 오지 왜 그쪽으로 오느냔 말이다. 그 불만을 그녀의 손윗 남매들에게 털어놓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왜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느냐는 잔소리와 더불어 무자비한(?) 손길로 잔뜩 쓰다듬고 매만져졌다.
"빨리 표정 안 풀어? 응? 이래도 그러고 있을래?" "앗...아니 그만, 그으만...!" "어? 더 해달라고? 알았다 알았어. 아직 애라니까."
그래도 가족이라고 차마 격한 반격은 하지 못 하는 그녀를 실컷 놀린 후에야 남매들은 만족하고 가버렸다.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면서. 오지 말라고 하고 싶긴 했지만, 줄을 바꾼 기타를 가져다 주기 위해 온다는 거라 그 말도 못 했다. 결국 가지고 놀아지기만 했다며 한숨을 푹 쉰 그녀는 빈 몸으로 터덜터덜 돌아나왔다.
용건도 마쳤으니 학원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라온까지 나왔는데 그냥 가기는 또 아쉬워 월식 주막으로 향했다. 학원과 대조적으로 왁자지껄한 거리를 걸어 주막 근처에 다다랐을 쯤, 왠 까마귀 한마리가 날아가는게 보였다. 이런 곳에 온 걸 보면 누군가의 패밀리어겠지. 아니면 메신저거나. 그녀와는 상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주막 안으로 들어가니 이게 왠 걸, 때를 잘못 찾았는지 온 테이블이 꽉 차있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했는데 합석도 괜찮다면 자리가 있단다. 그래서 괜찮다고 하니 안내 받은 자리가 발렌타인이 먼저 앉은 테이블이었다.
딱 한 순간, 그녀는 답지 않게 고민했다. 이대로 돌아서 나갈 것인가. 당당히 앉을 것인가. 그냥 나가자니 그녀가 발렌타인에게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피하는 건 좀 억울하다. 절벽 다이빙 건은 뭐, 설마 한참 지난 일로 이제와서 뭐라 하진 않을거고. 아마. 그래서 신경 쓰지 않고 맞은편 빈 자리에 앉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자리가 없어서 실례 좀 할게요."
설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식사를 하려던 원래 예정을 바꿔 버터맥주만 주문했다. 알콜도 없는 유사맥주지만 가끔은 괜찮다. 일단은 마시면서 어떡할지를 생각하기로 하며,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발렌타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 가온에서 만났을 때 처럼.
"이런데까지 식사하러 오시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일행이 오기로 한 거면 그 전에 자리 비워드릴게요."
그녀가 발렌타인을 대하는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를게 없었다. 그를 성가시게 하지 않을테니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 생각을 내비춘 듯한 표정을 하고서 얌전히 주문한게 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아직은.
그는 버터맥주를 기다렸다. 당연히 진짜 맥주는 아니다. 버터스카치 맛이 나는 무알콜 음료지만 이걸로라도 만족해야 했다. 진짜 술은 성인에게만 팔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점이 아쉬웠다. 본가였다면 코냑이라도 한잔 마시고 잠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본가에서나 해당되는 일이다. 여기는 라온이고, 본가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단맛이 나니까 그걸로라도 만족하기로 했다. 그는 합석을 기다리며 한 팔로 턱을 괸다. 은줄에 매달린 로켓을 소맷단에서 꺼내 만지작거렸다. 딸깍대며 안을 확인할까 하던 찰나 그는 시선을 흘끔 올린다.
"마음대로 하게."
운명이 있다면 참 야속하기도 하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면 단숨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의 분홍색 시선이 다시 은줄로 향했다. 손을 내리자 절그럭하는 소리가 났다.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의 감각이 들어 괜히 등골이 오싹했다. 솔직히 두번은 겪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아끼기로 했다. 괜히 좋지 않은 기억을 상기시켜봤자 좋을 일 하나 없기 때문이다.
"오, 자네군."
그는 자세를 고친다. 양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깍지를 낀다. 그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자 당신이야말로 이런 곳에 올줄 몰랐다는 시선이 느껴졌다.
"일행은 없으니 편하게 마시고 가도 되네만. 방금 약속이 파토난지라."
안타깝게도 일행이 있었는데, 없다. 차라리 이 상황이 와서 다행이다. 어머니가 계신데 합석을 했다면 난리가 날게 뻔했다. 학교의 인간은 처음 본다며 호기심을 가지고 감 사감처럼 세상에, 기숙사가 다르다고요? 다른 기숙사까지 있다니! 살아있는 인간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일 줄이야! 를 외칠 어머니를 떠올리니 골이 아팠다. 속내 시커먼 사람 둘이 합석한 음험한 순간에서 가장 간단한 메뉴인 맥주는 기가 막히게도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살다보면 찰나의 순간 스치는 감이란게 가끔 생긴다. 예를 들면 방금 그녀가 자리에 앉는 순간, 무언가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든 것처럼.
그녀는 그게 발렌타인이 절벽 건을 언급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눈치껏 살펴보니 그건 아닌 거 같았다. 오히려 그가 손을 움직일 때 난 소리가 신경쓰였다. 두번 뿐이지만 마주쳤을 때 저런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묻기엔 둘 사이를 가로지는 테이블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흥미는 가지만 그걸 건드릴 한 걸음이 부족하다고 할까. 뭐, 됐다. 남의 일에 너무 깊게 파고들어도 좋지 않은 법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용건만 해결하고 가려고 했다. 마침 자리를 빨리 비워야 할 이유도 없어졌고.
"그것 참, 저한텐 반가운 얘기긴 하네요. 그럼 사양 않고 느긋히 있을게요."
누가 언제 올까 신경쓰며 서두를 필요가 없어진 건 일단 좋은 일이긴 하다. 그러니 좀더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버터맥주를 마시고 싶은데. 그냥 잔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 나올 생각을 않았다. 뭐지, 주문한 걸 잊었나? 싶어 주막 안을 보자 테이블마다 가득한 사람이 보인다. 그 중에는 아직 음식을 받지 못 한 곳도 보인다. 요컨데 늦는 건 이 테이블만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 참지 못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희미하게 짜증이 담긴 눈으로 주막 안 어딘가를 멍하니 보고 있는가 싶더니, 소리 없이 휙 굴러 발렌타인에게 시선이 향했다.
무심한 목소리가 별거 아닌 듯이, 그저 이 기다림을 흘려보내기 위하듯 적당한 말을 꺼냈다. 나름 생각을 해서 한 말이기도 했다. 들어오기 전에 본 까마귀와 방금 약속이 파토났다고 하는 발렌타인. 그렇다면 그 까마귀는 예상대로 그의 일행이 보낸 메신저의 역할을 한 거겠지. 그녀는 그의 패밀리어도 까마귀란 것을 알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야, 발렌타인이 요즘 빈번히 데리고 다니는 이는.
"패밀리어 하니까, 선배, 오늘은 혼자시네요. 수업에도 동행하던 그는 어디다 두셨으려나?"
자연스럽게 꼬리물기 하듯 이어진 말에서 탐색의 기미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좀전과 같이 무심한 태도였으니 적당히 둘러대도 좋지 않을까 싶을 만한 분위기였다. 보이는 것 만큼은 말이다.
그는 약 한달을 넘게 휴학하고 최근 복학했다. 고작 몇주 보이지 않았지만 달라진 점이 아주 많았다. 청궁의 기숙사 점수를 깎는 빈도가 줄었고, 못보던 장신구를 하고 다니며, 최근에는 매까지 데리고 다녔다. 한달사이 많은게 바뀌었지만 원내가 흉흉해서 사람이 바뀌는것도 쉽게 넘어가게 됐다. 예민해서 더 그러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고, 타인들이 멋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부연설명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누군가 물어봐도 답하지 않으니 더더욱 그랬다.
마음대로 하라는듯 그는 시선을 뗀다. 주변 테이블은 여전히 왁자지껄하다. 이미 음식이 나온 쪽에서는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모의 뒷모습을 뒤로하고 그는 다시 적막만 넘치는 곳으로 눈을 굴린다. 바로 여기다. 당신의 한숨을 듣고 다시 시선을 옮겨서 무슨 일인지 봐줄 사람도 아니다.
누군가 그에게서 속된 말로 진짜 광기를 본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지금이 딱 그렇다. 이 시끌벅적한 곳에서 인형처럼 한치의 미동 없이 그 자리에 조용히,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닌지라 더 형형한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참동안, 당신의 말이 나오기 전까지 가만히 깍지를 낀 손을 가지런히 모아두고 시선을 엄지로 향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렇지. 파토날 줄은 몰랐지만 말입세."
그는 한 팔로 턱을 괴더니 고개를 들어 당신을 응시한다. 이제 보니 로자리오나 묵주를 손에 끼듯 한 손에 은줄이 휘감겨있다. 소리의 원인은 이것인듯 하다. 어머니께서 오늘은 제대로 확인까지 했다 호언장담을 하길래 믿었다. 그렇지만 늘 기대는 사람을 배신하는 법이다. 어머니는 대기근무였고, 방금 발령났다. 아무리 그래도 휴무와 대기근무를 헷갈리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가 가주 일을 떠맡았을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되레 그가 제법 깔끔했던 일처리를 배울 정도였다. 나이가 들고보니 사적인 면에서는 이렇게 털털한 사람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속으로 골머리를 앓던 그는 당신을 향해 정확하게 시선을 고정한다.
"쉬고 있겠지."
그는 일전 당신이 탈과 접선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탈과의 전투에서 시선을 느낀 적이 있었으며, 눈을 정확하게 마주친 적이 있었다. 적어도 당신은 그가 데리고 다니는 작은 매가 무엇인가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턱을 괴지 않은 다른 손의 검지를 들었다 내려 테이블을 툭 내리친다.
"자네는 어쩐 일로 백궁 학년 대표랑 같이 안 있고 혼자 여기까지 왔을까?"
능란히 상황을 돌리듯 하며 그때를 회상한다. 분명 그 당시에 윤은 선비탈의 고통을 함께 받았다. 선비탈이 무슨 수를 쓴 것이라면 그 자신 또한 고통을 받았어야 했다. 그 점이, 그 이전의 매구를 모욕했을 때 느꼈던 시선이 여간 신경쓰였다. 그렇지만 상관 쓸 일이 아니다. 졸업만 하면 된다. 그 사람과 함께 떠나면 된다. 어디로 가든 상관 없다. 그는 곧 죽을게 뻔하다. 그 이전에 새로운 것을 많이 보여주고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하면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