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붐비는 주막 안을 보며 짜증을 삼키고 한숨을 내쉬는 둥 하는 동안, 발렌타인은 놀랍도록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시선을 그에게 향했을 때에도 자세에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데다 시선 역시 고정한 것 마냥 멈춰있었으니. 이 사람은 사실 사람이 아니라 정교한 밀랍인형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흩어진다. 절벽에서 낚아채어 떨어뜨렸던 그 몸은 산 사람이 맞았었다.
산 사람, 살아있다, 라. 몹시 늦었지만 그녀는 기억해냈다. 지금 이렇게 매일 본 사람마냥 마주한 그는 사실 최근에서야 복학했다는 것을. 알음알음 들은 소문으로는 수업 중에 갑자기 뒤로 넘어갔단다. 그대로 병동으로 실려갔지만 차도가 없어서 그의 본가로 이송됐었다고, 떠들기 좋아하는 동급생 혹은 상하급생들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잊고 있던 걸 떠올리니 그녀의 시선에 걱정 한가닥이 슥 걸린다. 그 뿐이다. 그의 상태를 탐색하듯 훑는 일도 그에 대한 안부를 묻는 일도 없다. 그저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담담히 대화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약속이 파토나는 건 흔한 일이지만, 직전에 그러는 건 드문 일이긴 하죠."
발렌타인이 턱을 괴자 그녀의 시선이 그 손으로 향했다. 손과 옷깃 사이의 반짝임을 본 것이다. 종교적 도구라기엔 그저 흔한 목걸이 줄로 보이는 은줄이 그의 손에 감겨있다. 늘어진 방향을 보니 뭔가 걸려있나보다. 그것이 좀전의 소리의 정체겠거니 넘겨짚고, 턱을 괸 손을 내려 다른 손과 함께 테이블에 얹어놓았다. 비뚤어졌던 자세를 바로 잡은 그녀는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쉬고 있을거라. 기분 탓 같지만, 대답이 꼭 어디서 그러고 있을지 아는 것처럼 들리네요. 뭐, 선배의 방이라던가?"
그냥 방이라고 했지만 복학한 그에게 그녀가 말한 방은 한 곳 밖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현궁, 그 기숙사의 방. 그녀는 정말 알고 그러는 건지 그저 떠보는 건지 모를 태연한 태도를 일관하고 있었다. 그래도 발렌타인이 윤을 언급하자 무의식에 반응하듯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혼자 다니는게 그렇게 궁금할 일인가요? 제가 기억하기로, 선배와 마주쳤을 때는 늘 혼자였었을텐데요. 습격 때야 걱정되니까 그렇게 붙어있었던 거구요."
당연하지 않냐는 듯, 그녀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무슨 의도로 그렇게 물었는지 모르니 적당히 둘러댄 것에 불과하기도 했다. 음, 생각해보니 좀 그렇다. 왜 뜬금없이 윤을 언급했을까? 발렌타인이 저렇게 말할 만큼 그녀는 원내에서 윤과 붙어 다닌 적이 없었다. 몇번의 습격에서 그런 장면들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녀가 매를 언급한 것에 대한 반문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래서 그녀는 작정하고 하나 떠보기로 했다. 말이 좋아 떠보기지 실상은 짖궂음에 가깝긴 했지만.
"듣고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데 말이에요. 발렌타인 선배. 선배에게 그는 그런 존재인가봐요. 친우, 혹은-"
반려. 라던가.
그녀는 똑똑히 발음하여 말하고 무뚝뚝하던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평소라면 그냥 미소로 보였겠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꿍꿍이가 있어보일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걱정을 느꼈다. 그는 그 이상의 단어가 나오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원내에 추종자가 들이닥쳐 부상을 입는다고 해도 그의 일이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하느니 그 시간에 주문니나 하나 더 날렸으면 했다. 다행히 당신은 별 말을 더 꺼내진 않는다. 좋은 일이다. 적어도 버터맥주가 나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날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테이블을 한차례 내리치던 검지와 달리, 손바닥에 교차된 은줄을 나머지 손가락으로 걸어쥐었다 힘을 뺐다. 테이블에 로켓 부분이 닿기 전에 힘을 뺀지라 달각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은줄이 도르륵 소리를 낸다. 그걸로 끝이다. 그는 새 장신구가 생겼다며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그렇겠지. 창문을 열여뒀더니 날아 들어온지라 내 돌본 것이니 말입세."
그는 남과 대화를 자주 하는 성격은 아닌지라 그 진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백정은 창문으로 날아온 것이 맞아 애니마구스가 아닌 매로 한정해 생각하면 진실이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일리있는 말이다. 사람만 보면 기숙사 점수를 무섭게 깎던 그가 패밀리어에겐 한없이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 여신이니 사랑이니, 하물며 이름까지 달링(Darling)것은 현궁의 사신이라는 악명을 높일 정도였다. 이정도 질문은 미리 대처한 효과가 있다. 그의 분홍색 시선이 당신의 손으로 향한다. 그가 테이블 위에 깍지를 끼던 자세로 돌아온다.
"난 또. 선비의 습격 때 고통을 분담하듯 끌어안고 있길래."
그는 그 이후로 휴학했으니 소문이 어떻게 퍼지는 지 모른다. 아직 의심의 씨앗은 거둘 수 없고, 이매라고 불렸던 탈이 죽기 전 윤의 패밀리어로 밝혀졌던 것과 호의적이다 못해 집착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는 점을 전해 들었으니 그 사실 또한 영 석연치 않았다. 그는 당신의 말에 잠시 침묵한다.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주모는 서글거리며 버터맥주 두잔을 들고 내려놓는다. "미안해요, 늦었으니까 이건 서비스. 당과점에서 공수해왔어요." 하고 나무그릇을 내려놓는다. 무알콜 맥주에 어울리는 안주마냥 나무 그릇에 담긴 온갖 맛이 나는 강낭콩 젤리를 흘끔 내려다본 그는 주모가 사라지고 나서야 손을 들고 튕긴다. 머플리아토 마법이다.
"일단 들게. 기다렸을 것 아닌가. 건배라도 하길 바라나? 지금은 좀 그렇고, 나중에 하는 편이 좋겠지만 말입세."
서론은 제법 친절하다.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시원한 버터맥주의 유리잔 표면에 송골거리며 이슬이 맺힌다. 이슬이 흐를 무렵 그가 잔 손잡이를 쥔다. 그리고 한모금 쭉 들이킨다. 차가운 버터맥주는 말 그대로 달고 시원한 버터 스카치 맛이 났다.
"패밀리어는 평생을 함께 할 반려가 맞는 법."
잔을 내려놓자 그는 바로 손을 모아낸다. 양 손가락 끝을 맞대고 엄지에 턱을 괸다. 차라리 짓지 않았으면 하는 그 쎄한 미소를 지어내고 이젠 눈까지 휘었다. 입매만 해도 쎄했던 것이 두배가 됐다.
"다만 그때 눈 마주쳤으면 끝이지. 자네가 아둔한 사람이 아닌 건 내 절벽 덕분에 아주 잘 알고 있네만. 뭘 원하지? 단순한 대답? 제안? 질나쁜 농담과 웃어줄 사람?"
그녀는 본래 말보다 은연중에 드러내는 사람에 가까워, 묵묵히 있으면서 눈으로 많은 것을 내보이곤 했다. 염려하는 말은 하지 않으면서 시선에는 한가닥이나마 걱정을 담거나 발렌타인의 손이 은줄을 휘감고 놓는 것을 유심히 보면서도 그것에 대해 묻지 않는 점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늘 말을 아끼기만 하는가. 그것 역시 아니었다.
"흐음."
툭 던져본 말에 돌아온 대답은 그녀에게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창을 열어두었더니 날아들어왔다? 매의 모습을 하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왜 하필 발렌타인의 방으로 갔을까? 그가 탈이라면, 주인을 찾는 것이 당연할텐데. 앞선 의문을 해소하기 전에 새로운 말이 콕 하고 그녀의 의식을 찌른다. 고통을 분담하듯, 이란 말에서 그녀는 발렌타인이 자신을 떠보는 건가 싶었지만, 그 역시 남들이 보기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짧게 대꾸했다.
"아파하는데 해줄 수 있는게 그것 뿐이었던 거에요."
당시 그들에게 윤이 아파하는 건 이유 모를 증상으로 보였을테니, 그녀로서도 어찌 할 바를 몰라 그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듯 말한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한달여간 휴학했던 발렌타인이 어디까지 알고 어느 정도까지 의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섣부른 말은 삼가해야겠다고.
이제 작정하고 던진 질문의 대답을 들으려는 찰나, 주문한 버터맥주가 나왔다. 늦은 서비스라는 명목의 강낭콩 젤리도. 기껏 가져다 준 주모에게 미안하나 그녀는 그 젤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왔을 때 눈길을 준 뒤론 젤리에 손끝도 대지 않고 맥주잔 손잡이를 쥐었다. 건배라도 하길 바라냐는 겉치레에 픽, 하는 웃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버리긴 했지만.
"안 그렇게 생겨서 농담을 참 잘 하신단 말이죠. 나중에 해요. 나중에."
과연 그럴만한 관계가 될진 모르겠지만. 이라는 말은 직후 입가에 댄 잔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맥주와 함께 삼켜냈다. 마시는 것은 그녀보다 그가 빨라, 잔을 내려놓는게 한박자 늦었다. 그렇다고 말을 듣는 것까지 늦지는 않았다.
조금 전 손가락을 튕기는 걸로 방음 마법을 쳤는지 발렌타인의 말은 꽤나 직설적으로 돌아왔다. 턱을 괴고 온 얼굴에 쎄한 웃음을 피워낸 그를 보고 이번엔 그녀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일부러 저렇게 웃는 거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걸 물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소름 돋은 걸 내색하지 않으며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의 웃는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잘 알아주시니 얘기가 빨라서 좋네요. 다만, 딱히 뭘 원해서 그걸 유도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서로가 묻고 대답하기 나름이겠죠. 이 자리가 그저 그런 환담으로 끝날지, 그 이상 혹은 그 이하가 될지."
애시당초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자리다. 그런 우연한 자리에서 그녀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잘 되면 좋은거고 아니면 아닌거다. 그리고 그것을 정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발렌타인의 대답 여하일테니. 알아서 하고싶은대로 대꾸해라, 라는게 그녀의 말에 숨은 의도 되시겠다.
"그럼 질문을 바꿔볼까요. 패밀리어는 분명 평생을 함께할 반려가 맞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패밀리어가 아니죠. 이미 주인도 있는 몸이고. 그런 그가 선배와 깊게 어울리다가 행여나 변심을 하면 어찌하나 싶더라구요. 그래서 말인데."
일부러, 뜸을 들이듯 한차례 말을 끊고 몇초간 발렌타인을 주시한다. 숨기지 않는 짓궂음이 금안을 한바퀴 휘감고 있었다.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그녀의 시선은 묻는다. 뭐라고 대답할건가요? 라고.
"이제 그만 선배의 곁에서 그를 거둬들일까 하네요. 그리고 다신 가까이 가지 못 하게 일러둘까 해요. 뭐, 선배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겠죠?"
마땅히 할 일도 없고 만나야 할 이도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는 너무 지루한 것이라. 스베타는 시간이 빌 때마다 가벼운 산책을 다니기 시작했다. 멀리 나간다면 학교 앞의 숲 근처까지. 아니면 기린궁의 외각을 따라서 걸었다. 그런 산책을 마치고 대청마루 끝에 앉아 쉬던 스베타는 오가는 다른 기린궁 학생들을 관찰하듯 바라본다. 아낌없이 웃고, 떠들고.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며 약속하며 돌아가는 이들 중 몇 명이나 도사의 길을 택할까. 문득 스베타는 그런 생각을 한다. 다른 이들은 왜 도사의 길을 택했을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은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두었을까. 패밀리어와 지팡이를 버릴 만큼의 각오를 보였으면서, 왜 도사가 되는 길 앞에서는 망설이는 것일까.
답 없이 커져가는 생각에 고개를 내저어 정리해내고서 스베타는 뒤로 눕는다. 주머니에서 당신이 건네었던 비늘을 꺼내어 손가락 끝으로 매만진다. 아직까지도 저번의 온기가 희미하게나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할까. 질문이 달라진 것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금은 답답한 것이었다.
그는 사람을 재간하지 않는다. 적어도 득실을 따지기 전까지는 그렇다. 머리가 꽃밭인 사람도 아니다. 당신이 묻지 않는다고 해서 저 사람은 배려심이 넘치는구나 하지 않는다. 호감도 품지 않는다. 그저 당신은 그런 사람이고, 그는 그일 뿐이다. 다만 묻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점이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가 예민해하는 질문에 관한 것이다. 적어도 당신을 향해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기 때문이다. 그게 겉치레일지언정.
"더 묻지는 아니하지."
그는 이것으로 윤에 대한 언급을 줄인다. 도박수를 던지기에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작은 웃음 뒤로 잔을 내려놓고 본론을 얘기했다. 저 미소는 그가 아홉살이 넘어 열살이 되고 난 뒤부터 생긴 것이다. 그 이전엔 그도 평범하게 웃었다. 남들처럼 기뻐했고, 사랑했으며, 슬퍼했다.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고, 그 또한 이 사실을 모를 것이다. 거울을 의도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모르는 상태로, 그리고 흥미로운 눈으로 당신을 쳐다본다.
"이하가 된다면 꽤 곤란할 게지."
그는 우연한 자리에서 만들어졌던 이 환담이 이하가 되는 걸 즐기지 않는다. 사적인 자리에서 틀어진 것은 어떻게 해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른 문제의 씨앗이 되면 그것만큼 골치아픈 일이 없다. 비단 인간과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치정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
"그걸 자네가 신경쓴다는 것은 어떤 뜻을 내포한단 것인지는 알고 있나?"
원내가 불안정함과 동시에 한쪽은 확실한 약점을 쥐고, 다른쪽은 불확실한 약점을 쥔 지금 상태에선 더더욱 그렇다. 판도는 물에 먹을 타듯 순식간에 뒤집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가주임이 밝혀지지 않아 언더테이커 가문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끝이지만 소문의 온상이 되어 그 이후의 협력관계와 틀어지며 가문의 재정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꼬리자르기를 했다고 공표해도 사상으로 가장 예민한 현재, 한가지의 소문이 가문 하나를 좌지우지 한다면 그만큼 골치아픈 일이 없다. 그는 당신의 질문을 들으며 강낭콩 젤리를 하나 집어 입에 넣는다. 운 한번 더럽게 나쁜 것 같다. 잔디맛이다. 풀 씹는 싱그러운 맛에 그는 다시 버터맥주를 한모금 더 들이켰다.
"스피델리의 여식, 영애라 부르는 것이 낫겠군. 영애."
가문을 신경쓰지 않고 제대로 대화할 의지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가 원내에서 학년대표 일을 맡지 않을 때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가문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대화고, 사람을 거래선상에 두고 하는 대화는 공적인 부류로 넘어간다. 그의 최소한 남아있는 직업윤리였다.
"영애는 그가 주인의 손을 벗어나든 말든 영애는 나와 마찬가지로 일개 학생일 뿐, 간섭할 권리가 일절 없소. 나 또한 그의 행위를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를 내 방으로 들였소. 다만 영애가 그를 다시 돌려보낼 만한 권한을 쥔것처럼 얘기한다는 건 적어도 영애에겐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확신이 있단 소리요. 아니면 도박수를 한참 잘못 던졌거나. 다만 어느쪽이든 실이 되었지 절대 득이 될 리가 없소만."
다시금 손깍지를 낀다. 최근 이녀석이고 저녀석이고 사람의 밑바닥을 한번쯤 보고 싶은 것이 유행인가보다. 그가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미 금지된 저주로 보이는 족족 다 죽여버려 엉클 톰처럼 아즈카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디멘터와 진하게 키스나 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한번 감탄사를 내뱉는다. 오. 당신의 말은 그를 환히 웃게 만들기 충분했다. 분홍빛 시선이 호선을 긋고, 입매를 한껏 당긴다. 긴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리고 끝단은 올라간다. 쎄한 미소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내게 상관이 있어도 뺏어갈 것이 뻔하지 않소. 어차피 그는 주인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오. 붙잡을 수도 없지. 내 이미 한번 매구에 의해 뺏겼는데 두번이라고 뺏기지 못할까? 이젠 받아들여야지. 다만 정정할 것이 몇가지 있소. 깊게 어울려 변심하면 어쩌나 발언하였다는 점부터 짚고 넘어갔으면 하오. 영 석연치가 않아서 그렇소. 내 무얼 했기에 영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는지 이 자리에서 설명해주겠소?"
그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말할 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뿐더러, 그렇다고 부드러운 말로 대화를 이끄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당신에게 타이르듯 조곤조곤 얘기하는 태도는 확실히 누그러져 있었다. 다른 사람과도 같을 정도였다. 평소와 달리 예민하지 않은 것은 분명 예의거나 배려였다.
"혹 당신의 반려를 그날 욕되게 했던 것 때문이오? 그 당시엔 내가 당신의 반려가 원내에 있음을 몰랐으며 한껏 예민하였으니 이 자리를 빌어 사죄하오. 다만 고작 내가 그의 곁에 있다는 것 자체로 그런 것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그렇소."
혹은 그가 화가 단단히 났거나.
"영애. 혹여 그가 나로 인해 변심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겠소? 미리 선을 그어두지만 나는 혹여라도 그가 변심하면 금지된 마법을 영애에세 사용하라 할 생각이 없고, 매구를 공격하라 할 생각도 없소. 그저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지. 혹 그것이 불만이오? 아니면 매구의 큰 전력이 빠지거나 매구가 상심할지도 모른다 추측하는 게요? 그리하여 불안의 온상으로 추측하여 말을 꺼낸 것이라면 더이상 할 이야기는 없소. 영애도 잘 알 것 아니오. 모욕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영애의 말을 전부 이해하나, 말대로라면 그는 아랫사람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게요. 곁에 있는 자를 본인의 입으로 낮추는 행동은 하지 마시오. 혹 재미로 꺼냈다면 깊은 유감을 표하오. 내 시체 관련된 농담이 아니면 알아채기 어렵소."
그는 상냥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소맷단으로 숨어버린 은줄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것이다. 끝단에 무언가 담을 수 있는 로켓과도 같은 장식이 달린 은줄을 내려보며 그가 다시금 상냥하게 입을 뗀다.
"잡설은 그만두지. 내 누군갈 타이를 성정은 못 되는 군. 영애도 지키고 싶을 것 아니오. 사람의 목숨은 한순간이오. 영원한 절대자도, 권력도 없소. 최근 탈이 죽었더군. 앞으로 몇이 더 죽고 누가 죽을지 모르오. 적을 만들어봤자 좋을 상황은 아닐 게요. 부디 언행을 주의하시오. 비단 탈이 엮인 나 말고도 사적으로 이 상황을 노리는 개떼는 많소. 언제 이리 트집잡혀 공격 받을지 모르며, 내 일전 말했듯 한번 뺏겨 두번에서는 발악이라도 하고 뺏길지도 모르니. 나는 시체라도 얻어 평생을 함께 하면 되는 일이나 영애는 나와 달리 그런 성정은 아니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