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묻지 않겠다며 말을 줄이는 발렌타인을 보고 그녀는 그러시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떡였다. 이 자리가 환담 이하가 된다면 꽤 곤란해질 거라는 말엔 왜냐는 듯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묻지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이제부터 할 얘기에 비하면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다. 이 자리가 끝난 뒤에 다시 상기시켜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 그녀는 티 나지 않게 자세를 고쳤다. 제 앞에 앉은 그로부터 나올 말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다잡아야겠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물론이죠."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불안한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안다는 뜻의 대답을 한 뒤로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반지를 만지던 손도 서로 겹쳐 멈춰놓고서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마주한 발렌타인을 응시하며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그냥 듣기만 한 건 아니다. 기나긴 말을 들으며 나름대로 생각하고 정리했다. 듣다보니 간단히 제 의도만 전하기에는 좀 실례란 생각이 들어버려서 말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등골 오싹한 웃음이 아닌 좋은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가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예상 이상의 대답을 듣기도 했다. 덕분에 얘기가 빨라지는 것에 감사한 마음까지 드니,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발렌타인의 상냥한 말이 끝난 뒤에도 섣부르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꺼내놓은 은줄에 달린 로켓을 저게 뭐지, 라는 시선으로 보면서도 말없이 눈을 깜빡이고 맥주만 들이켰다. 그렇게 가늘고 긴 초침이 부지런히 달려 5분을 채울 쯤에야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벙어리 같던 입을 열었다.
"일단은- 말이죠. 대답이라고 할까. 그것부터 하자면, 딱히 선배로 인해 심기가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랬다면 합석 자체를 안 했을거니까요. 이래보여도 좋고 싫음은 확실히 나누는 편이라 눈 밖에 든 사람하고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는 선배에게 불편한 감정이 없고, 그럼에도 그렇게 표현한 건 말하자면 미끼를 던진 거죠. 선배는 그걸 단박에 물어버린거고."
히죽. 금빛 눈이 휘어 웃는가 싶더니 입꼬리가 스윽 올라간다. 환희, 혹은 만족, 그 비스무리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미소다. 마치 어딘가에 나오는 대사를 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기분 탓이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곤 앞으로 할 말들을 위해 맥주로 목을 적셨다. 부디 생각한 대로 혀가 움직여주기를 바라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이 자리는 순전히 우연으로 성립된 자리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말을 던지지는 않았어요. 그 매가 누구인지를 알고 곁에 둔 선배라면, 제 목적에 이용할 만 하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갖고 했어요. 감히 그렇게 생각한 점은 죄송하다고 할게요. 하지만 저도 나름대로 지켜보고 판단한 상태에서 꺼낸 말이었어요."
그가 휴학 전에도 가끔 그 매를 동행했었고, 복학 후에도 여전히 데리고 다님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매에게 하는 행동들이 패밀리어를 대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는 것이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그리고 앞서 한 말들, 그저 더 편안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라는 말에서 그녀는 조금 더 속내를 내보여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선배의 곁에 있는 그가 선배로 인해 변심하기를 원해요. 언젠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주인이 아닌 선배를 택해 탈에서 완전히 빠져주길 바라고 있어요. 생각처럼 잘 될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된다면 죽음이라는 참혹한 일 없이 그들의 수가 줄어들게 되는거니까. 과연 그 사람이 그냥 둘지, 그게 옳은 일인지는 아직 모르지만요."
옳다라는 건 그녀가 하려는 일에 있어서 그 방식이 옳은지 모르겠단 의미였지만 달리 해석해도 상관없는 부분이라 그냥 넘겼다. 그녀는 발렌타인처럼 달변가도 아니었고 생각이 그렇게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최선을 다해 말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먼저 말하신 것처럼, 저도 이 이상 죽음을 눈 앞에서 보고 싶지 않아요. 이제는 덜하지만 아직도 꿈에서나마 그날 이매가 죽는 모습이 보일라치면 잠에서 깨버리는걸요. 아는 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다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데 행여나 그게 제 반려가 된다면? 그냥 미치는 걸로 끝나지 않겠죠.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 사람의 목적을 방해하고 망가뜨려 종당에는 아무것도 못하게 해버리는게 저에게 좋겠다 싶었어요. 정말 그런지는 모르지만, 선배의 말처럼 수족 없이는 뭔가를 못 하게 된다면 저에겐 매우 반가운 일이에요. 수족들만 치운다면 제 목적은 달성하게 될거고 그렇게 무능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그 사람을 저 하나로만 채울 수 있다는 의미니까요. 선배도 말은 시체라도 평생을 함께 하면 된다 하지만 정말 그럴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저 질 나쁜 농담으로 치부해버려도 됐을 제 물음 하나에 이토록 정성스럽게 대답해주신 선배를 보면, 살아있는 그가 선배에게 그저 그런 존재일거라곤 생각 못 하겠거든요."
발렌타인이 그녀의 말에서 어디까지 추측하고 어디까지 확신할지는 알아서 판단하도록 두기로 했다. 달리 의문이 들었다면 물어보겠지. 하고 건성으로 생각한 것도 없잖아 있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그녀가 들은 것에 대한 답은 일단 거기까지였다. 그새 마른 목에 맥주를 마시려고 잔을 들다가 이거 잊었다는 듯이 덧붙이는 말이 있긴 했는데-
"아, 이거 깜빡했다. 저 그렇게 싸움꾼 아니에요? 머리 장식 아니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말한다구요. 아무데서나 이런 소리 해서 적을 늘리는 선비탈 같은 취향 전혀 없어요. 혹시라도 비슷하다 생각했다면 미안하지만 화낼거에요."
그런 말이었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보인다. 덧붙이는 말까지 끝낸 그녀는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고 젤리를 집으려는 듯 손을 뻗다가 흠칫, 하고 거두었다. 그렇게 거둔 손으로 다시 반지를 만지작거린다. 장황한 얘기를 한 것 치고 꽤나 태연한, 그런 태도를 내보이고 있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화의 흐름이 잘 이어지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말할 차례다. 먼저 도박수를 던졌다. 틀린다면 오블리비아테라도 써야한다. 이정도로 큰 도박은 살면서 해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도 사람인지라 이번 일에서는 감정을 누르고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장이라도 내 아이에게서 손 떼고 간섭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을 상자속에 가두고 사슬로 묶었다. 그렇게 심해 깊은 곳까지 던져넣었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마음은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익숙한 일이다. 그렇게 버린 마음이 수백개가 넘는다. 제법 친절하고 차분한 태도다. 단지 친절할 뿐이다. 상냥하지는 않았다. 가문 내부에서도 예산 관련된 일처리를 할 때 이정도로 침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길거리의 부랑자를 데려와 일을 시키면 훨씬 잘할 것 같다며 어깨를 토닥여줬을 것이다. 그만큼 마노라는 사람이 그에게 있어 중요한 존재란 뜻이기도 하다.
그는 인내한다. 1분은 맥주를 한모금 마셔 목을 축이고, 강낭콩 젤리를 집어 입에 넣는다. 확률과 계산만을 생각하고 사는 그였기 때문일까, 행운의 여신이 이번에도 굽어살피지 않고 그에게 비누맛을 선사했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맥주를 마신다. 사실 내색하지 않았다 했지만 단 두번 씹고 바로 삼킨걸로 봐서 좋은 맛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다시 손에 깍지를 끼고 기다린다. 밀랍인형이 된지 그로부터 4분이 지났다. 당신의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다.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제대로 입이 꿰였군."
환희, 혹은 만족이 드러나는 미소를 마주본 그의 표정은 꽤 복잡했다. 꼭 당황한 그 나이의 소년 같기도 했고, 득실을 계신하는 어른 같기도 했다. 농담을 던지긴 했지만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쪽이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릴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미끼를 물었다는 점이 신경쓰였지만 부끄럽지는 않아 서 참 다행이다. 만약 부끄러웠다면 이 이후의 말이 전부 꼬여 들렸을 것이다! 미끼, 그래도 부정적인 의미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더 듣다보면 이해할 상황이 오게 될 것이다.
"이해하네."
그는 당신의 사과에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도 없이 한순간으로 판단했더라면 얘기가 달랐을 것이고, 경멸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처럼 지켜보고 판단했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아무리 괴팍하고, 행동만 친절하다 해도 기본적으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누군가의 고심에 간섭해서 바꿔놓으라 엄포를 놓을 정도로 고압적인 사람도 아니다.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서 눈치채기 전까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란 말이 나오겠나. 그정도로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가 마노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고 봤을 수도 있다. 그의 삶이라고 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음침하고, 괴팍한 발렌타인 언더테이커인데.
"……."
침묵. 당신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 그는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가늠했다. 무슨 목적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불신했고, 불과 몇달 전까지 마노를 불신했다. 인간을 좋아할 수 없는 상처받은 성미는 결코 편한 삶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고, 이 말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여러 경우의 수를 한꺼번에 생각하며 그는 눈을 내리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믿고 싶은 말이다. 그를 택하게 하고 싶다. 더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다. 반지를 준 것도 그 때문이다. 죽음 없는 평화를 원한단 말이 들리자 귀가 먹먹했다. 삶은 동화같지 않다. 사랑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피를 봐야만 풀리는게 요즘 세상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것만이 이 두 속내 알 수 없는 사람이 바라는 최고의 길이다.
그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했는지 손을 들어 입가를 덮어 가린다. 무례한 행동임을 알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돌리고 다른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영애는…어머, 아. 아하하! 미안하네. 미안하구나. 오, 맙소사. 죽음이여! 맙소사!"
그리고 결국 소리내어 웃는다. 이렇게 소리내어 웃어본 적이 손에 꼽는다! 원내에선 광증을 앓았을 때 빼곤 없었다. 날선 송곳니 뒤로 그의 표정이 볼만했다. 긴 속눈썹이 눈을 덮어 분홍색 시선이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눈이 접혔고, 입가의 손은 가지런하다. 눈가엔 눈물까지 맺혔다. 잠깐 웃었는데도 벌써 배가 당기는지 힉, 하고 숨을 몇번 들이마시고 내쉰 뒤에야 기도를 하듯 손을 모아낸다. 그리고 한쪽 손등에 턱을 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우아한 태도지만 그 태도가 절대 세상에서 사람들이 정해놓은 남성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다. 꼭 잘 교육받은 규수처럼 그는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웃어서 미안하군. 이렇게 야망에 찬 사람 중에 살아있는 사람을 만난 건 또 처음인지라. 용기있고, 대담하고, 실현할 능력까지 있다니. 오.. 눈물겹기도 하지.. 신이 있다면 분명 굽어살폈을 게 분명해. 죽은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시랍화¹ 되어 형체가 온전한 시체를 만났을 때보다 더 놀라운 발견이야. 가문의 영애가 아니었다면 무능한 가문원을 던져버리고 당장 집어가고 싶을 정도군."
그의 비유는 섬뜩했지만 눈은 할로윈 사탕 바구니가 가득 찬 아이처럼 각종 희열과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차있다.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휘어진 눈동자는 흥미로 가득 차있다. 지금껏 야망에 차놓고 돌아오는 건 시체였던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언제라도 환영이다.
"네 말이 맞지. 그렇게 만드는 일도 방법이지. 내 온전히 그를 가져오고, 영애는 최악의 상황을 제하고. 서로의 이득을 취할 방법이겠군. 나 또한 죽음을 눈으로 보는게 일이지만, 주변 사람의 죽음은 이제 그만 보고 싶네."
그는 로켓을 테이블 중앙에 끌어온 뒤, 웃었던 표정을 가다듬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로켓이 열린다. 로켓 안에는 물빛 머리카락이 8자를 그리듯 꼬여있다. 당신은 이 머리카락의 주인에 대해 알고 있다. 절벽에서 주인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의 주인은 금방이라도 웃으며 청궁 학생들과 이 월식 주막에 들어와 무지막지한 양을 먹고 갈지도 모르는, 누구보다도 활기차고 밝은 사람이다. 잠시 유발함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수심에 잠겼다. 깊은 심해속에서 꺼내온 감정의 상자는 못이 박혀있다. 상자 밑으로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그는 고정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인다. "10명의 희생자 중에 있었네. 머리 빼고는 상태가 온전치 못한 축이었어." 하고 말하고는 그가 미리 손사래를 친다. 동정은 필요없단 뜻이다. 그가 가주가 된 이후로 만났던 첫 삶이자 숨이 꺼졌다. 고개를 든 그는 수심을 벗어내 생글생글한 낯이고, 이 안에 담긴 광증과 분노가 어느 정도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그조차도.
"살아있는 뮤즈는 그 자체가 다른 삶이지만, 글쎄. 죽음 뒤에는 새로운 문이 있는 법. 단지 이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 술로 날을 지새우긴 하겠군. 곧 따라갈지도 모르고. 영애와 비슷한 상황이라면 비슷한 상황이지. 그러니 협력하고 싶은 마음이 크고 말입세."
그는 유발함을 닫고 맥주를 들이킨다. 여전히 차가운 버터스카치 맛이 난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싱글벙글 웃었다. 젤리를 종용하듯 그릇을 당신 쪽으로 밀어보인다. "들게. 설마 까나리 맛이 걸리겠나."
"영애가 아둔하지 않음은 이 결과를 보고 말할 수 있겠지. 선비와는 다른 걸 대화 하며 알았으니 말입세. 나도 모처럼 만난 야망찬 살아있는 인간을 그런..취향만 거창한 동정과 같은 취급은 하고 싶지도 않네만. 다만 내 한가지 제안해도 되겠나? 만일 떼어낼 생각이라면 모두 살려야 하는 상황은 제해주시게. 각시는 내 손으로 보내고 싶으니." ¹) 진흙이나 늪 등 공기 흐름이 어느정도 차단된 환경에서 발견되는 시체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으로, 시체 부패 중 습기가 냉각제 역할을 해 효소의 활동이 멈추고 지방분자가 떨어져 나와 하얀 덩어리로 굳어지는 현상. 쉽게 말해 시랍(시체 지방)이 갑옷처럼 시체를 둘러싸 수십년 내지 수세기동안 지속될 수 있다.
그녀가 말을 시작한 뒤 발렌타인은 생각보다 여러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냥 듣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생각은 한참 짧다는 듯 조금은 당황스러울만한 반응도 나왔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좋은 방향이었음은 틀림없으리라.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다는 말이 의외였는지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하면서도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입이 꿰였다며 농담 같은 말을 툭 던지더니 그녀의 잘못을 이해한다고도 했다. 그의 반응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차분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 역시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해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 다소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 발렌타인이 침묵했을 때 이번엔 그녀가 밀랍인형 비스무리한 상태가 되어 슬금 눈치를 보았다.
"...?, ???"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잊고 기다리니 대뜸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아니었다. 발렌타인에게서였다. 그는 참기 힘들다는 듯 폭소했고 숨쉬는 것까지 힘들어했다. 그녀의 말 중에 우스운 부분이 있었나? 아니면 저렇게 웃을만큼 어이없었나? 그의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 그녀는 불안과 의문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었다. 웃음을 멈춘 발렌타인이 턱을 괴며 말을 하고서야 겨우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나 싶었지만 그의 비유가 다시금 그녀의 표정을 미묘하게 만들었다.
"그...거 칭찬이죠? 시체랑 비교당하니까 기분이 묘하긴 한데, 음..."
시랍화 20년산 시체를 봤을 때보다 놀랍다 하니 이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모욕인가 싶다가도 전혀 그런 기미가 없는 저 표정을 보면 아닌거 같다. 그, 언더테이커 식 농담인걸까. 아까도 시체가 언급되지 않는 농담은 이해를 못 한다고도 했으니까.
"잘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요."
여태 생각만 하던 걸 처음으로 입 밖에 낸 거니 아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그녀의 입이 테이블 한가운데에 열린 로켓으로 인해 다물렸다. 로켓 안에는 물빛 머리카락이 고이 담겨있었다. 유려하게 담긴 그것의 의미를 그녀는 본 적은 없지만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떠올리는게 늦었고, 그나마도 가물가물한 기억을 선명하게 만든 건 발렌타인의 말이었다. 그 날 희생자 중에 있었다는 그 말, 물빛 머리카락, 고인의 머리카락을 담는 로켓, 주변 사람의 죽음. 아. 그녀는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며 동시에 눈 역시 감았다. 행여나 눈에 내비칠 동정과 미안함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그 날, 그녀가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희생자는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라는 생각이 거칠게 속내를 후려쳐 쓰라리다. 동시에 조금 더 결심이 굳어진다. 이 이상 무의미한 죽음은 늘리고 싶지 않다는 결심이.
조금 뒤 그녀가 눈을 뜨고 본 건 깊은 수심 대신 미소를 내보이는 발렌타인의 얼굴이었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오싹한 느낌이 든다. 저도 모르게 팔을 한번 쓸어내린 그녀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젤리들을 보고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은 건 싫은거다. 대신 잔을 들어 몇모금을 들이키고서 말했다.
"슬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비슷한건지, 아닌지. 협력이라고 해도 딱히 뭘 해달라고 하진 않을거에요. 그가 선배를 선택하게 하는 건 온전히 선배에게 달린거니까요. 이제 제가 무슨 계획을 갖고 어떻게 하려는지 대강 알게 되었으니 그 다음은 선배가 알아서 하시겠죠. 혹시 모르니까 그에게는 절대, 절대 내색하지 마세요. 만에 하나 이 계획으로 제가 그 사람에게 밉보여서 내쳐지게되면 더는 손 쓸 수가 없을거에요."
남은 맥주를 마시고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렸지만 손잡이를 쥔 채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직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는 어린애를 너무 높게 평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개인적인 복수도 저는 관여하지 않을거지만, 최소한 모든 상황이 끝난 후로 해주시면 좋겠어요. 도중에 또다시 쓸모있는 탈이 죽어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수를 쓸지 몰라요. 이전의 습격도, 그래서 일어난거니까."
순간적으로 떠오르려는 이매와 짐승들의 잔상을 털어버리려 고개를 작게 흔든 그녀는 다시 맥주를 마시려 했지만 잔이 빈 걸 깨닫고 발렌타인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말하지 않아도 잔을 쥐고 빤히 보는 모습이 한잔 더, 를 표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