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할 일도 없고 만나야 할 이도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는 너무 지루한 것이라. 스베타는 시간이 빌 때마다 가벼운 산책을 다니기 시작했다. 멀리 나간다면 학교 앞의 숲 근처까지. 아니면 기린궁의 외각을 따라서 걸었다. 그런 산책을 마치고 대청마루 끝에 앉아 쉬던 스베타는 오가는 다른 기린궁 학생들을 관찰하듯 바라본다. 아낌없이 웃고, 떠들고.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며 약속하며 돌아가는 이들 중 몇 명이나 도사의 길을 택할까. 문득 스베타는 그런 생각을 한다. 다른 이들은 왜 도사의 길을 택했을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은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두었을까. 패밀리어와 지팡이를 버릴 만큼의 각오를 보였으면서, 왜 도사가 되는 길 앞에서는 망설이는 것일까.
답 없이 커져가는 생각에 고개를 내저어 정리해내고서 스베타는 뒤로 눕는다. 주머니에서 당신이 건네었던 비늘을 꺼내어 손가락 끝으로 매만진다. 아직까지도 저번의 온기가 희미하게나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할까. 질문이 달라진 것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금은 답답한 것이었다.
그는 사람을 재간하지 않는다. 적어도 득실을 따지기 전까지는 그렇다. 머리가 꽃밭인 사람도 아니다. 당신이 묻지 않는다고 해서 저 사람은 배려심이 넘치는구나 하지 않는다. 호감도 품지 않는다. 그저 당신은 그런 사람이고, 그는 그일 뿐이다. 다만 묻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점이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가 예민해하는 질문에 관한 것이다. 적어도 당신을 향해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기 때문이다. 그게 겉치레일지언정.
"더 묻지는 아니하지."
그는 이것으로 윤에 대한 언급을 줄인다. 도박수를 던지기에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작은 웃음 뒤로 잔을 내려놓고 본론을 얘기했다. 저 미소는 그가 아홉살이 넘어 열살이 되고 난 뒤부터 생긴 것이다. 그 이전엔 그도 평범하게 웃었다. 남들처럼 기뻐했고, 사랑했으며, 슬퍼했다.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고, 그 또한 이 사실을 모를 것이다. 거울을 의도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모르는 상태로, 그리고 흥미로운 눈으로 당신을 쳐다본다.
"이하가 된다면 꽤 곤란할 게지."
그는 우연한 자리에서 만들어졌던 이 환담이 이하가 되는 걸 즐기지 않는다. 사적인 자리에서 틀어진 것은 어떻게 해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른 문제의 씨앗이 되면 그것만큼 골치아픈 일이 없다. 비단 인간과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치정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
"그걸 자네가 신경쓴다는 것은 어떤 뜻을 내포한단 것인지는 알고 있나?"
원내가 불안정함과 동시에 한쪽은 확실한 약점을 쥐고, 다른쪽은 불확실한 약점을 쥔 지금 상태에선 더더욱 그렇다. 판도는 물에 먹을 타듯 순식간에 뒤집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가주임이 밝혀지지 않아 언더테이커 가문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끝이지만 소문의 온상이 되어 그 이후의 협력관계와 틀어지며 가문의 재정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꼬리자르기를 했다고 공표해도 사상으로 가장 예민한 현재, 한가지의 소문이 가문 하나를 좌지우지 한다면 그만큼 골치아픈 일이 없다. 그는 당신의 질문을 들으며 강낭콩 젤리를 하나 집어 입에 넣는다. 운 한번 더럽게 나쁜 것 같다. 잔디맛이다. 풀 씹는 싱그러운 맛에 그는 다시 버터맥주를 한모금 더 들이켰다.
"스피델리의 여식, 영애라 부르는 것이 낫겠군. 영애."
가문을 신경쓰지 않고 제대로 대화할 의지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가 원내에서 학년대표 일을 맡지 않을 때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가문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대화고, 사람을 거래선상에 두고 하는 대화는 공적인 부류로 넘어간다. 그의 최소한 남아있는 직업윤리였다.
"영애는 그가 주인의 손을 벗어나든 말든 영애는 나와 마찬가지로 일개 학생일 뿐, 간섭할 권리가 일절 없소. 나 또한 그의 행위를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를 내 방으로 들였소. 다만 영애가 그를 다시 돌려보낼 만한 권한을 쥔것처럼 얘기한다는 건 적어도 영애에겐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확신이 있단 소리요. 아니면 도박수를 한참 잘못 던졌거나. 다만 어느쪽이든 실이 되었지 절대 득이 될 리가 없소만."
다시금 손깍지를 낀다. 최근 이녀석이고 저녀석이고 사람의 밑바닥을 한번쯤 보고 싶은 것이 유행인가보다. 그가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미 금지된 저주로 보이는 족족 다 죽여버려 엉클 톰처럼 아즈카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디멘터와 진하게 키스나 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한번 감탄사를 내뱉는다. 오. 당신의 말은 그를 환히 웃게 만들기 충분했다. 분홍빛 시선이 호선을 긋고, 입매를 한껏 당긴다. 긴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리고 끝단은 올라간다. 쎄한 미소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내게 상관이 있어도 뺏어갈 것이 뻔하지 않소. 어차피 그는 주인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오. 붙잡을 수도 없지. 내 이미 한번 매구에 의해 뺏겼는데 두번이라고 뺏기지 못할까? 이젠 받아들여야지. 다만 정정할 것이 몇가지 있소. 깊게 어울려 변심하면 어쩌나 발언하였다는 점부터 짚고 넘어갔으면 하오. 영 석연치가 않아서 그렇소. 내 무얼 했기에 영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는지 이 자리에서 설명해주겠소?"
그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말할 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뿐더러, 그렇다고 부드러운 말로 대화를 이끄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당신에게 타이르듯 조곤조곤 얘기하는 태도는 확실히 누그러져 있었다. 다른 사람과도 같을 정도였다. 평소와 달리 예민하지 않은 것은 분명 예의거나 배려였다.
"혹 당신의 반려를 그날 욕되게 했던 것 때문이오? 그 당시엔 내가 당신의 반려가 원내에 있음을 몰랐으며 한껏 예민하였으니 이 자리를 빌어 사죄하오. 다만 고작 내가 그의 곁에 있다는 것 자체로 그런 것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그렇소."
혹은 그가 화가 단단히 났거나.
"영애. 혹여 그가 나로 인해 변심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겠소? 미리 선을 그어두지만 나는 혹여라도 그가 변심하면 금지된 마법을 영애에세 사용하라 할 생각이 없고, 매구를 공격하라 할 생각도 없소. 그저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지. 혹 그것이 불만이오? 아니면 매구의 큰 전력이 빠지거나 매구가 상심할지도 모른다 추측하는 게요? 그리하여 불안의 온상으로 추측하여 말을 꺼낸 것이라면 더이상 할 이야기는 없소. 영애도 잘 알 것 아니오. 모욕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영애의 말을 전부 이해하나, 말대로라면 그는 아랫사람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게요. 곁에 있는 자를 본인의 입으로 낮추는 행동은 하지 마시오. 혹 재미로 꺼냈다면 깊은 유감을 표하오. 내 시체 관련된 농담이 아니면 알아채기 어렵소."
그는 상냥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소맷단으로 숨어버린 은줄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것이다. 끝단에 무언가 담을 수 있는 로켓과도 같은 장식이 달린 은줄을 내려보며 그가 다시금 상냥하게 입을 뗀다.
"잡설은 그만두지. 내 누군갈 타이를 성정은 못 되는 군. 영애도 지키고 싶을 것 아니오. 사람의 목숨은 한순간이오. 영원한 절대자도, 권력도 없소. 최근 탈이 죽었더군. 앞으로 몇이 더 죽고 누가 죽을지 모르오. 적을 만들어봤자 좋을 상황은 아닐 게요. 부디 언행을 주의하시오. 비단 탈이 엮인 나 말고도 사적으로 이 상황을 노리는 개떼는 많소. 언제 이리 트집잡혀 공격 받을지 모르며, 내 일전 말했듯 한번 뺏겨 두번에서는 발악이라도 하고 뺏길지도 모르니. 나는 시체라도 얻어 평생을 함께 하면 되는 일이나 영애는 나와 달리 그런 성정은 아니잖소."
>>16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이 일상 하면서 혹시나 지팡이 들 일이 생기면 과연 벨이 마법을 쓰는게 빠를까 첼이가 상을 뒤엎고 도망가는게 빠를까 생각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르게 생겼...나...? ㅋㅋㅋㅋㅋㅋㅋ 음 암튼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