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하고 있던 여자애들이 갑자기 너를 추궁한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쫓아가기에는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 버거웠다. 견제한 거냐는 말에 네가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그럼 너는 견제를 했단 뜻이고, 무엇을 견제했단 건지 골똘히 생각해본다. 네가 줬던 치킨조각을 오물거리면서 저가 여자애들과 나눴던 대화부터 찬찬히 되짚어본다. 저가 예쁘다는 칭찬을 들었고, 그래서 너는 제게 별로라 했었다고 답했고, 그 이후가 이 상황이다. 두어번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나니 그제서야 대화의 흐름을 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네게서 카톡이 하나 날라온다.
"뭐야. 나 예뻐?"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면서 조그맣게 목소리를 줄여 네게 물어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넌 제가 다시 네게로 옮겨준 치킨조각을 입에 넣고 있었다. 빈속에 술 먹은게 기억나기에 네 머리 위로 손을 올린다. 뒤늦게라도 속을 채우는 것을 칭찬하기 위해서였고, 그래서 네 머리를 부슬부슬 쓰다듬는다. 네가 그만하라고 하지 않는 이상 계속할 것처럼 네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가, 갑자기 크게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란다.
"응."
눈을 깜빡거리다가, 네가 손을 잡으면 그대로 톡 네게 기댔다. 어깨 한 쪽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서는 또 다시 목소리를 줄였다.
"같이 있고 싶댔잖아."
너도, 저도 그렇게 말했었다. 이내 곧 자리가 다 바뀌었는지 아는 얼굴들이 보이면 네게 기대고 있던 것에서 떨어진다. 부끄러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취기에 부끄러움은 흐려진지 오래고, 반가움에 제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네게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제 옆에 와서 앉는 친구를 폭 안아버린다. 곧잘 이러고는 했으니 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장소를 가리지 못 하고 있는 것에서 큰일날 정도는 아닐지언정 취기가 올랐음을 확인할 수 있을테다.
솔이가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평소에 안하는 짓을 한다. 저 헤실거리는 웃음에 진짜로 함락 당할뻔해서 껴안을뻔 했다가 주변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안고서 겨우 참아냈다. 그 웃음 반칙인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웃으면서 좀 더 편하게 쓰다듬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다 주변이 테이블 이동으로 시끄러워지고 그 사이에서 네가 한 말이 내 귀에 똑똑히 들려온다.
" 맞아. 나는 너랑 평생 같이 있고싶어. "
내게 기대서 하는 말에 나도 너에게 작게 속삭인다. 주변의 소음 때문에 조금 크게 말했지만 아마도 너에게만 들렸겠지. 다른 사람들은 시끄러워서 듣지 못했을테니까. 그리고 곧 테이블 이동이 끝나 새로운 멤버들이 모인 그룹이 형성된다. 내게 기대있던 너는 네 친구들을 보고 나에게서 친구들로 옮겨간다. 너가 기대어있던 그곳이 좀 허전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크게 만족할 수 있었다.
" 아 아현아, 아까 그 선배 있잖아. 회장한테 혼났어. 쌤통이다, 꼰대 같더니. "
회화과에서 온 여학생 하나가 나한테 말해준다. 아마 우리쪽 회장이 말해준게 아닌가 싶었다. 겉보기엔 사람이 맹해보여도 일처리도 엄청 정확하고 빠르기로 유명하니까. 내가 말도 안했는데 아마 사태 파악을 진즉에 끝내지 않았나 싶다. 자신의 친구를 꼭 껴안고 있는 솔이를 웃으면서 바라보다가 다시 치킨을 한조각 입에 넣는다. 치킨이 인기가 많았는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기에 마지막이겠거니, 직감해서 하나를 더 찍어서 솔이의 접시에 놔준다.
" 생각해보니 서로 초면이겠네. 나는 둘 다 알고 있어서 몰랐어. "
생각해보니까 테이블을 섞었으니 내 친구들과 솔이 친구들은 초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쩐지 어색하더라. 서로가 한번씩 인사를 주고받고 나는 그 사이에서 웃으면서 중간중간에 친구들 소개에 한마디씩 더 얹었다. 그러자 곧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지고 다시 한번 술자리가 시작된다. 물론 나에게도 술이 돌아왔고 좀 더 마실 기력이 남아있긴 했지만 나는 옆에 있던 솔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본다.
대답을 기다리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네가 그렇다는 대답을 돌려주면 방긋 웃으면서, 쓰다듬던 것을 헝클이는 것처럼 네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들어간 술 때문에 기억이 안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네게서 예쁘다는 칭찬은 처음 들어본 것 같아서 귀 끝이 붉어졌다. 이건 분명 술기운 탓은 아닐테다. 맨정신은 아니지만, 완전히 취해버리지도 않은 오묘한 감각이다. 한 잔만 더 마시면 소위 개가 된다는 그 표현이랑 알맞은 상태가 될 것 같다.
"이따 아이스크림 먹자."
평생 같이 있고 싶다는 말에 여전히 헤실거리는 웃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원래도 아이스크림을 좋아했지만 술을 마시고 나면 꼭 아이스크림을 찾았더라. 네게만 소곤소곤 말한 이유는 분명 너하고만 같이 가겠다는 의도였을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이어도 네가 남자친구라는 사실은 꼭 새겨두고 있다.
"혼났으면 뭐해. 사과를 해야지."
옆자리에 앉지 않은 다른 친구들을 안지 못하는 몫까지 옆에 앉은 친구를 안고 있었다. 아까 그 진상도 떨쳐냈겠다, 기분이 좋은 것이 고스란히 행동과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원래도 제 감정같은 것을 숨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술까지 들어갔으니 티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고 있다가도 아까 그 진상 이야기가 나오니 입술을 삐죽거리며 한마디를 얹는 것이다. 저한테도, 너한테도 사과해야 한다.
"어우, 이제 니 남친한테 붙어."
얼마 안고 있지도 않은 것 같은데, 친구 쪽에서 저를 떼어낸다. 그러고는 너의 친구들과 저의 친구들이 인사를 주고 받는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다 그 인삿말들 사이에 한 마디씩 말을 얹는 널 물끄러미 쳐다본다.
"야, 이제 너한테 붙으래. 안아도 돼?"
접시에 덜어진 치킨에는 관심도 없고, 지금 저가 있는 곳이 어딘지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아니면 신경쓸 겨를이 없거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물론, 맞은 편에 앉은 거리까지도 들릴 목소리 크기였다. 아까까지는 그래도 목소리를 줄이고는 하더니, 이제는 또박또박 물어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무작정 안지는 않았단 점이다.
사실 네가 좋다고 느껴졌을때부터 예쁘다는 생각은 쭉 해오고 있었다. 그 전에는 친구들이 너가 예쁘다고해도 별 감흥도 없었지만. 사실 우리 학과에서 예쁘다고 하는 애들도 솔이 앞에서는 한수 접어줄 만큼 솔이는 예쁜 편이었으니까. 그전까진 너랑 연인관계도 아니었고 평소처럼 대하려고 틱틱대긴 했지만 이젠 너가 내 여자친구니까 이 정도 칭찬은 쉽게 해줄 수 있다.
" 이따 테이블 다시 바꿀때 집 가면서 사먹자. "
분명 여러번 테이블을 섞을 것이 분명했다. 자리를 계속 옮길때마다 집에 갈 사람들은 가고 남을 사람들은 남아서 계속 술을 마시는 구조였으니까. 아무래도 솔이의 상태를 보아하니 다음 이동때 집을 가야할 것 같았다. 내 친구들도 솔이를 보고서는 나한테 눈짓으로 얼른 데려가라고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친구들끼리 인사가 이어지는데, 옆에서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안아도 돼. "
주변 친구들의 눈총이 쏟아지지만 너네도 여기서 여자친구 만드시던지요. 눈빛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네 허리를 끌어안아서 내쪽으로 끌어당긴다. 너가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자세도 만들어주고선 혹여 네가 술을 많이 마셔서 어디 불편한게 아닌지 꼼꼼하게 살펴본다. 속이 안좋다거나 그럴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친구들이 술을 따라주자 술을 먹을까해서 네게 물어봤지만 아무래도 네 상태가 좋지 않아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 아니야. 오늘은 그만 먹자. "
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말하고선 주변을 살핀다. 아직 학생들이 많이 남아서 시끄러웠기에 지금 나가면 좀 관심이 쏠릴 것 같기도 해서 다음 테이블 이동을 노리고 있다. 사실 나도 아까 빈속에 술을 연거푸 마셔버려서 취기가 평소보다 빨리 올라오고 있었기에 여기서 더 마시면 나도 몸을 가누기 힘들 것 같았으니까. 그러다가 다른 아이들이 못듣게 너에게 몰래 톡을 보낸다.
[우리 집에서 잘꺼야?]
언니분께는 미안하지만 이대로 집에 보내기엔 좀 그랬고, 자주 우리 집에 데려가서 재우기도 했으니까.
제 상태는 고려치도 않은 발언이다. 너랑 함께하는 개강총회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째 시작부터 잘 풀리질 않았으니 아쉬웠다.
"안 안을건데."
네가 제 허리를 끌어안아 당겼다. 좀 더 네 옆에 가까이 앉기는 했지만 안는 것은 물론 그 외의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쿡쿡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만 들린다. 다만 네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었기게, 웃음소리가 사그라들 때 즘 네 어깨에 머리를 톡 기댔다. 네게 기댄 후에는 네 왼손을 끌어와 두 손으로 꼼지락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다. 숫자 3을 뜻하도록 손가락을 세개만 남기고 꼭 접어둔다.
"이따 아이스크림 세개 먹을거야."
그러고 나서는 먼제 네 손을 쥐었다.
"왜?"
더 먹어도 되냐는 듯이 물어봐놓고서는, 정작 먹고 싶느냐고 물어보니 그만 먹자며 제 머리를 쓰다듬고나 있다. 네 손길이 싫지는 않았기에 다른 말은 없었다. 그러는 이유만 물을 뿐이다.
"나랑 같이 자고 싶어?"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린다. 네가 카톡을 보낸 것이었고, 그래서 똑같이 카톡으로 답장하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네 귓가에 다가가서 조그맣게 속살인다. 집이 어딘지 기억 못하는 것도 아니고, 똑바로 못 걸을 것 같지도 않았다. 속이 좋지 않아서 화장실로 달려간다거나 길에 주저앉는 등의 술주정을 부릴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네 대답을 듣고서 결정해보려 네 손을 잡고 있던 손까지 가져와 입근처도 가리고서 소근거렸다. 그리고서 답을 기다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널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물론 지금의 너는 침대에 눕혀두면 술기운에 금방 잠들 것 같았지만, 네 술이라도 깰겸 공원이라도 한바퀴 돌면 그것만으로도 난 괜찮았다. 너는 조금 더 놀고싶을지도 모르지만.
" 너 편한대로 해. "
너가 나를 안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네가 이렇게 기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내 왼손을 끌어다가 장난을 치는 너를 보면서 웃고 있다가 네 친구들이 얼굴에서 꿀 떨어지는거봐라, 하고 한마디 한다. 부러우면 너네도 커플 되던지. 본전도 못건질 말을 하는 친구에게 웃으면서 쐐기를 박아버리다 아이스크림 세개를 먹는단 말에 웃으며 끄덕인다.
" 그래 먹고싶은대로 다 먹어. "
물론 못먹게할거지만. 저렇게 많이 먹었다가 다음날 배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안그래도 술이 들어가있는데 찬 음식 많이 먹어서 좋을 것도 없고. 하나 정도만 먹으면 만족하지 않을까.
" 내가 많이 먹으면 너가 걱정할테니까? "
사실 많이 먹은 것도 아니긴 했지만 여기서 더 먹으면 아슬아슬한건 맞았다. 처음에 막 들이부은게 생각보다 무리였던거겠지. 아직도 속이 별로 안좋아서 안주도 그렇게까지 많이 먹고 있지 않았다. 먹은걸 다시 보는 취미는 나한테 없거든. 그러다가 너가 물어온 질문에 살짝 당황해서 음, 하는 소리로 잠시 대답을 미룬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네 손바닥을 펴 손가락으로 '응' 이라고 적어준다.
네 마음도 나와 같으면 좋으련만. 나는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하루가 다를수록 커져가는데, 너는 과연 어떨까. 그렇게 네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그저 말없이 눈을 살짝 감았다 뜬다. 그렇게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음 테이블 이동을 한다는 말이 들려온다.
" 산책하러 갈까? "
물론 이곳으로 돌아오진 않고, 바로 집으로 가는 산책길이긴 했지만. 중간에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네가 오자마자 진상과 신경전을 벌였던 걸 어떻게 잊을까,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말한다. 저 때문에 못 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불만을 표시할 수 밖에 없다.
"현이 이런거로 안 삐지지?"
키득키득 장난기 섞인 목소리는 약올리는 것 같기도 하다. 친구 류아현이 아니라 남자친구 류아현은 여태 알고지낸 시간을 조금 부정토록 만들었다. 8년의 시간동안 알고지낸 넌 제게 예쁘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아니었고, 저를 보며 그렇게 웃지도 않았다. 네가 저를 좋아한다는게 너무나 잘 느껴져서 되려 헷갈리는 것이다. 그랬던 네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언젠가 저도 네게 반하고 만다면 그때 알 수 있을 답이다. 가끔식 너는 저를 간질거리게 만들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가까이 앉아있는데 네 시선이 안 느껴진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필 친구들도 그 주제로 네게 말을 걸었고, 저는 술기운에 못들은 척 해버리는 수밖에 없다.
"아니? 내가 너 데리고 가면 되는데?"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대로 다 먹어도 된다는 말에 방긋거렸다. 그래서 네가 하는 말에도 웃으면서 답한다. 평소였다면 술에 취할대로 취하여 몸을 못 가눠 저가 널 부축해 집까지 가게 된다면 미쳤냐는 말부터 했을테다. 그리고 제 질문에 답을 미루는 너에 다시 고개를 갸웃인다. 고개가 기웃거리고 있자니 제 손바닥에 네가 손가락으로 무엇을 적는데, 그게 간지러워 까르르 웃어버렸다. 정작 네가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 갈래. 내 아이스크림!"
테이블을 이동하기 위해 일어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도 일어나더니, 네게 손을 건넨다. 술기운이 오를 대로 올라 빨갛게 되어버린 얼굴로 바보같이 헤실거리며 웃고나 있었다. 분명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갈 생각에 신난 것일테다.
오늘 개강총회는 원래 갈 생각이 없었다. 이제 슬슬 빠질때도 됐고 1학년들 얼굴 보는 것도 조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딱히 나한테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배라는게 생각보다 불편했다. 후배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나는 그냥 동기들과 선배 몇명만 알고 지내면 만족스러웠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딱 하나, 네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굳이 여기서 놀지 않아도 친구들과 놀 기회는 충분히 많다.
" 내가 이런걸로 삐지는 사람은 아니거든. "
네 농담에 쿡쿡대면서 웃어버린다. 명백하게 약올리는 목소리라 나도 장난으로 받아친다. 너를 이성으로 인식한 시간보다 친구로 인식한 시간이 더 긴데도 불구하고 그 짧은 시간동안 친구로써의 너는 내 마음 속에서 자리를 잃어버린지 오래다. 자주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을텐데 매일 같이 보아왔으니 커지는 마음을 제어하기도 힘들었다.
" 됐다 됐어. 술 많이 마시는거 별로 안좋아해. "
내 대답에 꺄르르 웃어버린다. 내 대답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러다 테이블 이동이 시작되고 주변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네 손을 잡고 일어난다. 산책을 가자는 말에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을 외치는 네 손을 놓지않고 짐을 꼼꼼하게 확인한 뒤에 술집을 나온다. 들어갈때도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한밤이 되어버려 하늘에는 달이 밝게 비치고 있었다.
" 아이스크림 먹으러가자~ "
마침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보여서 네 손을 잡고 편의점으로 데려간다. 이 근처에는 술집이 많아서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붉은 사람들이 다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고르고 있다. 그 사람들이 가길 기다렸다가 너를 데리고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으로 향한다. 네가 먹을 것과 내가 먹을 것 하나씩을 고르고나면 계산을 하고 나와 천천히 집으로 걸어갈 생각이다.
끝여름이다.아침 공기가 차가웠으니 밤 공기도 차다. 가게 밖으로 나서 술에 떠있는 얼굴에 닿은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져서는, 저도 모르게 춥다는 말을 할 뻔 했다. 조금 술이 깬 것 같다 싶을 정도였는데, 혹시 춥다 하거든 아이스크림을 못 사먹게 할까봐서 말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의에는 반팔티 한장만 걸치고 있는 차림새는 누가 보아도 얇게 입었더라.
"야, 오늘 달 잘 보인다."
그래서 화제 전환까지 시도하려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른 말을 하기도 했다.
"야, 이거 1+1이래. 나 이거 세개!"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었고, 너는 제 손을 잡고서 편의점으로 향해주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뻔 했다고 하면 술기운에 서러워서 눈물 흘릴 자신이 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다가, 붙어있는 이벤트 세일 스티커를 보고는 눈이 반짝인다. 분명 세개 먹는다고 말했으니 세개는 사야겠는데, 1+1 이벤트로 그 갯수가 두배가 되는 건 별개지 않을까 하고서는 이미 1+1이라는 아이스크림을 6개 꺼내들었다.
솔이의 복장은 지금 날씨엔 춥다고 느끼기엔 충분했다. 여름이 다 끝나가는 마당에 반팔티 하나만 걸치고 있는 형편이라니. 술기운에 찬바람까지 맞으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는 네 의지에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가방에 넣어놨던 가디건을 꺼내서 너에게 걸쳐준다. 저녁에 추우면 입으려고 가져오길 잘했다.
" 가디건이나 입고 얘기해. "
딱 지금 입는 가디건이라 그렇게 두껍지는 않았다. 어깨에 걸쳐놓으면 흘러내릴 수도 있기에 제대로 팔까지 넣어서 입으라고 말한 뒤에 편의점에서 네가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것을 지켜본다. 아까 얘기한게 정말인지 세개를 손에 쥐다가 1+1 이라는 문구까지 발견해선 순식간에 그 수가 여섯개로 불어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너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 안돼. 오늘은 하나만 먹자. "
웬만해선 네가 하고 싶은걸 다 맞춰줬던 나지만 가끔은 안되는 것도 있는 법이었고 그럴때마다 이런 표정을 지어가면서 너를 말렸다. 어차피 이렇게 잔뜩 사서 네가 다 먹을거라고 생각도 안하고, 이걸 다 먹으면 내일 네 위장의 안위를 장담을 못하겠다. 아니면 지금 이걸 다 사서 내 방 냉장고에 넣어두던가. 지금 이걸 다 먹는건 내가 절대 반대다.
" 1+1 이니까 너가 먹을거랑 내가 먹을거 하나씩 해서 사면 되겠다. "
네가 아이스크림을 놓기를 기다린다. 욕심 부린다고 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술기운 때문에 이러는거니까. 딱 하나만 먹는건 나도 뭐라할 생각이 없다.
건네준 가디건을 별말없이 받아 입는 건 역시 춥기는 추웠기 때문이다. 제대로 팔까지 넣어서 입으라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에 방싯 웃으면서 네 말대로 한다. 다만 아무래도 네 옷이 제게 클 수 밖에 없었던 터라 소매 끝으로 손이 나오질 않았다. 입은 직후에는 그 소매를 접어보려고 하는 것 같더니, 한 손으로 하는데다 잠깐 입고 말 가디건에 그렇게까지 하는게 귀찮아졌는지 금방 그만두어버린다.
"여기서 너 냄새 나. 너가 안아주는 거 같다."
네 집에서도, 네게서도 나는 향. 아마도 네가 쓰는 세탁세제나 섬유유연제 향이 아닐까 싶다. 손을 덮어버린 소매 향을 킁킁 맡아보더니, 그런 말을 하고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러 가버린다.
"왜? 먹고싶은대로 다 먹으라매."
순식간에 부루퉁해진다. 품에 아이스크림 여섯개를 안고 있다가 단호하게 네가 안 된다고 해버리니, 샘솟았던 행복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아까는 된다고 했었으면서 말을 바꾸냐고 궁시렁거리기까지 한다. 그럼 얌전히 아이스크림 여섯개를 넣어두고, 두개만 남기나 싶더니 그것도 아니다. 1+1인 그 아이스크림은 한 개만 남아있었고, 냉장고에서 함께 나눠먹으라고 만든 커다란 아이스크림 한 통을 꺼내들었다.
항상 내가 입는 옷을 네가 입을때마다 소매 끝으로 손이 나오지 않아서 손이 나오도록 접어서 입던 네가 오늘은 귀찮은지 손을 소매 안에 넣은채로 걸어간다. 불편할까 잠시 네 손을 놓고서 양 손을 앞으로 뻗으라고 말한 뒤에 몇번 접어서 손이 나오도록 만들어준다. 사실 네 손을 잡기 힘들어서 소매를 걷어준게 더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 진짜로 안아줄 수도 있는데? "
빨아서 바로 가지고 나온 옷이니까 섬유유연제 향이 아직 진하게 남아있을테다. 네가 소매에 남은 향을 킁킁 맡고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러 가는걸 뒤쫓아간다. 6개나 골라버린 너를 내가 말리자 궁시렁거리면서도 아이스크림을 다 넣어버린다. 의외로 순순히 말을 듣나 싶었더니 갑자기 커다란 아이스크림 한통을 꺼낸다. 설마 이걸 먹겠다는거야?
" 흐음 ... 그래 그럼 이걸로 사자. "
아마 여기가 네가 양보할 수 있는 한계선이겠지. 한번에 한통을 다 못먹게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네가 고른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계산대로 향한다. 계산을 마치고 일회용 숟가락을 두개 받아서 편의점을 나선다. 이대로 집에 갈까 생각했지만 네가 좀 더 술을 깨고 집에 가는게 좋다고 생각해서 집에 가는 길에 있는 공원쪽으로 발을 옮긴다.
" 대신 한번에 한통 다 먹는건 안돼. 좀만 먹고 냉장고에 넣어놓자. "
네 손을 잡고 공원으로 향하면서 네 얼굴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아이스크림 여섯개 먹는거랑 이거 한통 다 먹는거랑 다를게 없다. 날씨가 쌀쌀했지만 네 손이 따뜻해서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너가 이 정도로만 날 좋아해줘도 좋을텐데, 같은 실없는 소리나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