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에서 편지가 왔다. 어머니의 패밀리어인 Dear가 보낸 것이 아닌 엉클 잭¹의 것이다. 큰까마귀가 아닌 조그마한 까마귀는 달링의 몸집에 부리나케 도망간다. 편지를 뜯어 읽어본 그의 등에 돋아난 검은 날개는 제기능도 하지 못하는 장식품이지만 일정한 시간동안 잠깐 틈만 벌려 살랑거렸다 다시 접기를 반복한다. 마지막에 적힌 잉크 자국까지 다 읽고나서야 그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잠시 나갔다 오마. 순찰 시간이 다 되었으니. 달링, 이리 오렴. 이 오라비와 함께 간만에 나가자꾸나."
달링이 어깨에 신이 나서 앉는다. 그는 가장 먼저 청궁 근처로 향한다. 가깝기 때문이다. 청궁 다음으로는 주궁, 그 다음으로는 백궁에 가고, 다시 현궁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손에 쥔건 처음 보는 장신구다. 그가 휴학 이후 복학하며 늘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가느다란 은줄에 로켓²같은 무언가가 하나 매달려있다. 막 세공한 건지 아직 변색되지도 않고 반짝거린다. 달링은 로켓에 관심을 가지다 그 안에 든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대신 그의 뺨에 부리를 부볐다.
"그래, 이 예쁜 것. 네가 내게 맞춰줄 이유는 없지. 사랑스러운 여신아, 네가 나의 단 하나뿐인 까마귀임을 누가 모를까."
그는 로켓 부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달링을 손으로 쓸어줬다. 달링은 잽싸게 날개를 펼쳐 어딘가로 날아간다. 그는 능숙하게 손을 뻗는다. 곧 달링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낚아채온 것은 쥐다.
"내게 주는 거니?" "Yes." "영특하고 사랑스러운 것."
아직 살아있어서 찍찍대는 쥐를 그는 손 위에 올리고 가볍게 쓰다듬었다. 쥐는 꼬리가 길 뿐이지 아주 사랑스러운 동물이다. 그의 날카로운 손톱은 쥐의 등을 친절하게 쓰다듬었다. 청궁 주변 숲에 도착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타니아는 없다. 그의 인생에서 영원히 퇴장한 것이다. 그는 청궁 주변을 천천히 돈다. 쥐를 적당한 곳에 놓아주려는듯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달링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고 그의 귀를 애교스럽게 깨문다.
"그래, 자네는 통금 시간이 다가오는데 무얼 하고 있는겐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생명력이 가득한 청궁에서 쥐의 경추를 엄지로 눌러 부러트렸다. 똑 소리를 뒤로 쥐는 축 늘어져 즉사한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끗차이다. 당신을 바라보는 눈은 여전히 예민하고, 독기가 차있으며, 표독스럽다. 단 한번도 변함없는 눈은 혼혈과 머글, 그리고 순혈을 가리지 않았다.
단태와의 대화를 이어가며 그녀도 느낀 것이 있다. 저번엔 지금보다 말투가 좀더 능글맞았고 말을 받아치는 것 역시 조금더 능숙, 하다고 할까. 뱀이 기어가듯 매끄러웠는데. 여기 온 뒤로 느껴지는 단태는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때와 다르다. 여기 와서 마주쳤던 눈빛, 그녀가 뒤를 돌아 마주한 눈빛이 괴리감을 좀더 짙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붉은 안광-
아, 그녀는 그것을 이전에도 보았다. 저주에 걸린 채 다 죽어가는 마법사를 상대할 때였다. 그 날도 오늘처럼 가득 찬 달이 뜬 날이었지.
상념으로 빠졌던 그녀의 정신을 돌아오게 한 건 단태의 경망스런 웃음소리였다. 정신을 다잡은 김에 제가 무어라 말했는지 되짚어본다. 그러니까, 그래, 어느 본성에 대해 얘기했었다. 소유욕. 원하는 대상의 전부를 제 것으로 하고 싶어하는 비뚤어진 욕구는 당연한 것이라고. 단태는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며, 보통 여자아이들은 다르지 않느냐 말했다. 그 뒤에 따라온 비유인지 뭔지 모를 말에 그녀는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소리를 내었다고 해도 후후, 하는 얌전한 웃음소리다. 단지 그 소리가 낮아 읍습하게 울렸을 뿐이다.
"글쎄요. 누군가는 그렇겠지만, 일단 저는 아니라서요. 제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느낀 건 말랑하고 아름다운 세상 따위 없다는 거였어요."
말 뒤에 구구절절한 사연이 붙을 만도 하지만 그녀의 말은 뒤가 없다. 단태가 그녀와의 친분이 얕음을 알고 관계에 대해 묻지 않는 것처럼 그녀도 의미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얘기를 술술 털어놓지 않는 것이다. 그만한 얘기를 들었다면 모를까. 그래도 서로 이러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하며 느릿하던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금줄 가까이까지 왔기 때문이었다.
"선배가 그렇게 생각하시니 원하는대로 하시면 되겠네요. 부외자가 너무 껴들어도 민폐니까요. 그닥 궁금하지도 않고."
그들의 연애는 그들의 것이니 더 말을 얹어봤자 폐만 될 테다. 그러니 이 이상 그에 관련해 말은 않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 일만 생각하기에도 짧은게 인생이다. 금줄 앞에 서서 그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금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질문을 해볼까 하는데, 대답하기는 선배 마음대로 하세요."
금줄에는 절대 닿지 않으며 그렇다고 너무 멀어지지도 않은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그녀가 말을 덧붙인다.
"선배가 그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걸 이번으로 두번째 본 거거든요. 저번에, 반 시체 같은 마법사가 습격해 왔을 때에도 그랬잖아요. 생각해보니 두 날 모두 보름날인데, 그저 우연인 걸까요? 아니면 뭔가 있는 걸까요. 저주라던가."
조그마한 니플러를 쫓아 작은 소녀가 열심히 수풀 사이를 헤쳐들어간다. 바스락바스락, 바스락바스락. 정신없이 들어가다보니 어느새 숲의 한중간이라. 앞도 뒤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나무들 사이에서도 소녀는 울지 않는다. 몇번을 두리번거리다가 근처 나무등치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을 뿐이다.
"......"
얌전히 앉아있다보니 소녀가 쫓던 니플러가 수풀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소녀는 일어나지 않았고 니플러도 가만히 있었다. 기묘한 대치를 이어가다가, 니플러는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파사삭! 하는 잎사귀 사이로 자그마한 공이 굴러나왔다.
알록달록한 공은 소녀의 발치까지 굴러왔다. 멀리도 아닌 바로 앞까지 온 공을 보고, 손을 뻗어 잡아본다. 말랑하니 감촉이 제법 좋다. 잘 때 안고 자는 인형의 느낌 같았다. 비슷한 느낌이다보니 한참을 만지작거리는데, 어느 순간 손톱이 잘못 찌른 탓일까. 퍽 하고 작은 손 안에서 페인트공이 터졌다.
물음이 아니었다. 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에 걸린 달을 가리키는 것처럼 허공에 들어올려졌던 단태의 손끝이 금줄이 걸려 있는 숲 안쪽을 가득 메우는 어둠 속으로 향했다. 모조리 타들어갔지만 터지지 않는 뭔가를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머글들이 쓰는 비유를 해보자면 심지가 전부 타들어갔지만 터지지 않는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기분. 차라리 터져버리면 깔끔할텐데. 능청스럽고 능글맞은 얼굴 위에 머무르는 웃음을 거두지도 않고 단태는 히죽하니 입꼬리를 올려서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지만." 전혀 농담같지 않은 목소리로 덧붙혀낸 말이었다. 숲 안쪽을 메우고 있는 어둠 속을 손끝으로 가리켰을 때는 이런 표정이 아니었지만.
얌전한 웃음소리가 음습하게 들린 건 착각이 아닐테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욕과 집착은 상대가 관심있게 바라보는 대상을 부숴서라도 자신만을 봐야했고 자신만큼 상대도 자신에게 그만큼의 소유욕을 보여줘야했다. 내가 가지고 싶은만큼 그 애도 그만큼의 것을 보여줘야지. 누군가를 원한다는 건 소유욕의 다른 말 아니던가. "질문?" 금줄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는 펠리체의 걸음보다 몇분 더 늦게 단태의 걸음이 멈추고 단태는 자연스럽게 익숙하다는 듯 양손을 등뒤로 돌려서 뒷짐을 지며 고개를 돌려서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반문했다.
앞선 말들에 대해서는 말을 얹는 것보다 입을 다무는 것으로 긍정을 대신한 상태였다. 금줄을 따라 걸음을 다시 옮기는 펠리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단태가 달을 올려다본다.
"내가 불안정해보이나? 나는 지금 굉장히 이성적인데 말야."
반시체같은 마법사를 만났던 날을 언급하는 목소리에 단태는 한참 생각해야했다. 아. 그날. 뒷짐을 진 채로 걸음을 옮기며 한손을 들어보인 단태가 자신의 입술 아래쪽을 엄지로 슬슬 문질렀다. 그러고보니 그때도 보름이었지. 옮기던 걸음이 점차 느려지더니 이윽고 그 자리에 멈췄다.
"그런 말이 있어. 자기야- 보름달은 사람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고. 내가 유난히 보름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라는 생각도 괜찮지 않아?"
그는 지금껏 살아오며 누군가의 도발에도 가만히 넘어가곤 했다. 상종하지 않으면 인생이 편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하게 넘어가면 된다. 사람들은 서로를 죽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녁과 목적이 같을 줄은 몰랐는데 말입세."
그렇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넘어가기 힘들다. 복학한 이후로 첫 순찰일 뿐더러, 청궁 기숙사에서 오던 순간부터 두통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또 대화를 하다 기절하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그는 달링이 손 안의 쥐에게 관심을 갖자 손을 올려 쥐를 부리에 물렸다. 달링은 신이 나서 발톱으로 움켜쥐고 배부터 쪼아 물어뜯었다.
"정해진 규칙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시간이 늦었지 않은가."
그는 잠시 손에 쥐어진 로켓을 만지작거린다. 아름다운 별과 곤충, 새소리라. 새같은 소리.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뒤로하고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살아오며 웃어본 적이 손에 꼽는지라 어색하고 딱딱한 미소는 차라리 짓지 않는것이 나았다.
"교내에 추종자가 들어선 이후 비상상황에 대한 대책 첫째. 사람이 죽었으니 모든 학생은 안전에 유의하고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통금 시간을 엄격하게 지킬 것."
그는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둘째. 학년 대표는 순찰을 강화하여 필요시 교수를 호출할 것. 또한 외부인을 목격하거나 금지된 숲으로 향하는 등 수상한 동향을 발견하였을 경우 즉각 신고할 것. 비상 상황에는 점수의 차감이 조금 더 강경해지는 걸로 알고 있는데, 더 얘기해야 하나?"
그는 달링이 내장을 끄집어내자 눈을 굴린다. 이 상황에서도 잘 먹기만 하는 이 큰까마귀가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손을 들어 달링의 날개깃을 한번 간지럽힌 그는 뺨에 쥐의 살점이 튀자 대충 손으로 쓸어 닦았다.
"나는 지금 상황에서 새니 별이니 하는 것에 신경쓰고 싶지 않네. 각시인지 뭔지 하는 원인이 제거되기 이전까지 머리에 꽃을 채우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지. 자네는 다를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숙사 사감에게 누를 끼칠 생각은 하지 말게."
1. 마법사와 머글, 어느 누구나 태어나면서 가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혈통이다. 인간이라 하는 이는 누구든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치며 태어나기 때문에, 그 몸에 흐르는 피에는 당연하게도 최초라 할만한 시작이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들 가문에 표현하자면 뿌리에 해당되는 부분이렷다.
그러나, 이것을 보는 그대는 알 것이다. 그대의 가문에는 이렇다 할 과거도 차곡차곡 쌓였을 가문의 나무도 없는 것을.
그럼에도 어째서 순혈 가문으로 불리우는지, 그리 받아들여지는지 생각해본 적은 있는가? 그 이유를 찾으려 해본 적은 있을런지? 허나 어떤 수를 써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 땅에서 솟은 듯 갑작스레 시작된 가문이란 것만이 그대가 알 수 있는 최선이었을거다.
그대가 그것을 얼마나 고민하고 탐구했을지 내 알 길은 없으나 이 말은 할 수 있겠다. 기뻐하게. 그대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의문에 답을 얻게 되었다.
현재 "스피델리"라 불리는 가문에게는 달리 뿌리가 존재했다는 답을.
2. 내 감히 그대의 기분을 예측하건데, 무슨 이런 일이 있느냐고 황당해하면서도 그럴 것 같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그 이유도 어렴풋이 알 듯 하나 명확하게는 모른 채 이것을 받아들었을 것이다.
이것을 준 이로부터 어떤 첨언과 함께 받았는지까진 모르니 그대는 그대가 받은 조언을 유의하며 이 다음을 읽어가도록 하길 바란다.
"중장"
1. 현재, 그리고 그대의 세대에서까지 "스피델리"라고 불리우는 순혈 가문은 시작 이전이 존재한다. 없어보였어도 명백한 뿌리가 있었던 것이다.
"스피어리" 라고 불렸던 그 가문은 석산이자 꽃무릇의 형상을 가문의 문양으로 삼고, 순혈지상주의를 가문의 사상으로 내새우며 눈에 걸리는 모든 혼혈과 머글들을 해하는 것으로 악명이 드높았던 가문이었다. 옷과 지팡이에 새겨진 하얀 가문의 문양을 피로 붉게 물들이는 것을 즐기는 가문이기도 했다. 동시에 '매구'라 불리는 희대의 악인이자 어둠의 마법사의 추종자였으며, 나의 본래 이름이기도 하다. 베릴 R. 스피어리. 이제는 사라진 스피어리의 마지막 가주, 바론 R. 스피어리의 혈육이며 쌍둥이인 자의 이름이다.
스피어리는 그 시대 어느 순혈지상주의 가문에 빗대어도 모자라기는 커녕 차고 넘칠 정도의 악함을 지니고 있었다. 나 역시 어릴 적에는 그것이 당연하다 느껴지는 환경이었으니. 그러나 나와 내 반신은 그 중에서도 서로에게 의지해 서로를 지키고 있었다. 결코 우리가 먼저 남을 해하지 않았고, 부딪혀오면 피하거나 가문의 어른들처럼 참혹하게 대하진 않았다. 가문의 이름을 가진 탓에 억울하게 당하더라도, 항상 정도, 라는 것을 지키고자 했다.
당시에 그러했던 건 어리숙하게도 우리가 가문을 바꾸고자 하는 바람을 가졌었기 때문이었다. 가주인 어머니 아래 자식은 우리 뿐이었으니 다음 가주는 필시 우리 중 하나가 될 것이고 그리되면 가문의 실정을 바꿀 수 있을거라 헛된 꿈을 꾸었다. 그것이 헛됨을 모른 채 우리는 성년을 맞이했다.
같은 날 태어난 우리는 성년이 되는 날도 같이 맞이했으나, 그 비극 역시 같이 맞이하고 말았다. 우리의 성년을 축하할 물건을 받기 위해 어머니가 직접 외출하셨다가 때를 노린 습격에 당해 돌아가셨다. 매년 축복받아왔던 날이 가장 뼈아픈 날이 되버린 해였다.
2. 비극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라고 하던가. 그것 뿐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과거가 된 시점에서 보자면 어머니의 죽음은 더 큰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사고가 갑작스러웠던 만큼 가문 내의 가주의 부재 역시 그랬다. 울분에 찬 가문원들은 하루 빨리 새 가주를 세워 일을 행한 그들에게 피의 복수를 하고 싶어했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내 반신과 함께 했던 다짐을, 어릴 적의 꿈을. 허나 내 반신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그는 함께 했던 꿈은커녕 일말의 정도조차 남기지 않은 채 돌변해버렸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되돌리려 애썼으나, 내가 하는 어떤 호소도 듣지 않았으며, 내 손이 그리 가지 말라 붙잡을 때마다 냉정히 내쳤다. 내치고 내치다 못해 나를 가문에 반기를 드는 반역자라며 내쫓았다.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이를 적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가 직접 내 멱살을 잡아 문 밖으로 내치던 때가 선명히 떠오른다. 더러운 배신자라며, 다신 가문 문턱을 밟을 생각도 말라 일갈하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나를 향한 눈에 선 핏발과 핏빛으로 보이는 눈물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3. 쫒겨난 후 달리 기댈 곳도 없었기에 어디든 발 닿는대로 정처없이 떠돌았다. 달이 지고 해가 바뀌어 갈 만큼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마법사의 세계란 어딜 가든 소식이 들려오기에. 거기서 나는 깨닫고 만 것이다. 나의 태생, 나의 핏줄은 벽 하나를 넘었다고 하여 다르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렇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없애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이미 너무 많은 피를 머금은 이름을 씻어낼 수단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깨끗이 없애고 나도.
그러나 결심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극악무도하고 잔악한 가문이더라도 나의 가문이다. 나를 이 세상에 내보낸 곳이다.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 끝이 나인 것도 고민의 한자락을 차지했다.
다시 달이 뜨고 해가 바뀌는 시간을 방황했다. 방황 속에서 흘러온 소식을 듣고 나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알았다.
매구가 일으킨 전쟁이 그것이었다.
4. 몇 해 만에 다시 찾은 세계는 전쟁의 불길이 가득해 마치 지옥 그 자체였다. 혼란 속에서 들은 바로는 나의- 스피어리 가 역시 매구의 추종자로서 모든 가문원이 전쟁에 나서 지팡이를 들었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젊은 가주가 아주 잔혹하다고,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바론, 나의 반신.
전쟁터에 발을 내디뎠을 때, 아니, 전쟁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다짐은 이미 굳혔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정녕 그 길을 계속 가야겠느냐고 묻고 싶었다. 세상에 눈 뜬 순간부터 함께한 그를 나 이상으로 쉬이 내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의 눈을 피해 둘 만의 장소에서 그와 만났다.
그리고-
만남은 어찌 말할 것도 되지않았다. 당연했다. 우리는 그 날 너와 나로 갈렸을 때부터 이미 끝났던 것이었다. 이제, 더이상 망설일 것은 없었다.
5. 스피어리 가는 당시의 순혈 가문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마법 실력을 뽐내는 가문이었다. 그 재능은 금지된 저주를 쓰는 것에도 적합해 전쟁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해했다. 순수 혈통의 마법사로 태어나 마법에 출중한 것에 긍지를 갖고 살아온 가문이니, 마법이 아닌 방식으로 죽는 것이 무엇보다 치욕스러우리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저주를 준비했다. 그들의 긍지를 빼앗고 가장 모욕적인 죽음을 안겨줄 저주를. 지팡이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주, 아주 날카로운 단도 하나만이 필요했다. 부정하게 만들어진 단도에 내 명을 깎아 그들을 해할 저주를 담았다.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전쟁은 가장 치열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좋은 시기였다.
...
양 측의 전투가 심화되었을 때, 나는 마법부의 오러를 흉내내어 전쟁 속으로 섞여들었다. 금지된 저주를 날리는 그들에게 거침없이 반격을 날리며 안으로,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한복판에서 나의 핏줄들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시작했다. 속죄이자 단죄라는 이름의 잘못을.
그 날 그 단검에 몇의 피가 스며들었는지 끝내 기억하지 못 한다. 확실한 것은 당시 스피어리의 이름을 이은 자라면 전부,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론이었다. 내가 아니라.
6. 그 날, 나를 제외한 스피어리 가의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철저하게 모든 이를 죽이고 가주이자 내 반신인 바론마저 내 손으로 직접 보내주었으니.
그러나 바론은 순순히 죽어주지 않았다. 그는 단검의 저주를 역이용해 내게 지울 수 없는 저주를 새겼다. 죽어가는, 그리고 죽은 자의 집념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의 지팡이로 내 가슴팍을 찌르며 남긴 것은 그가 추종자로써 받았던 문양이 흉하게 비틀려 새겨진 형상이었다. 그래, 지금 그대의 몸에 있을 그것 말이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죽지 못 했다. 아니면 죽음의 앞에서 덜컥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지은 죄의 무게를 내가 알기에.
피를 피로 씻으려 한들 핏빛은 더욱 짙어질 뿐이라는 걸 왜 미리 알지 못 했을까.
이후 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몸을 숨겼다. 다만 살고자 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눈을 뜨면 전쟁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눈을 감으면 내가 죽인 이가 내지르던 단말마가 시도 때도 없이 정신을 괴롭혔다. 그럼에도 죽지 못 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추하게라도 살고 싶었다. 문양이 욱신거리는 몸을 어떻게든 연명하다보니, 지독한 전쟁의 불이 꺼지는 날이 찾아왔다. 영원히 타오를 것만 같던 전쟁의 불이 꺼진 뒤에 남은 건 다 타버린 세상이었다.
"종장"
1. 전쟁이 끝난 후, 남아있던 스피어리의 잔재들을 처리하거나 처분해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가문의 초상화도 태피스트리도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내 나름 철저하게 스피어리의 흔적을 지우고 그 위를 덮기 위해 스피델리라는 이름을 세웠다.
허술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그대는 알 것이다. 허술해보여도 그 뒤를 전혀 캘 수 없었던 것을.
없는 것은 찾을 수 없고, 설사 아는 이가 있더라도 쉬이 입에 담지 않았을테니.
모든 것은 혼란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졌고, 반대하거나 막는 이 하나 없었으니 순조롭기만 했다. 전쟁의 여파가 가라앉을 무렵에 새로운 이름을 조용히 세간에 흘려넣었고 나는 그렇게 스피델리의 초대 당주가 되었다.
2. 그 다음은 말할 것도 없다. 스피델리는 순탄히 가지를 뻗었다. 내가 정한 조건에 따라 문양을 가진 자식이 내 뒤를 잇고, 그 다음 문양의 소유자가 뒤를 잇고 다시 이어 그대에게까지 다다른 것이다.
문양을 가진 순혈 자식에게 가주를 넘겨줄 것.
그것이 스피델리의 가주를 잇는 조건이다. 그대가 기억해야 할 가문의 수칙이기도 하다. 그대가 이 가문을 존속해 나갈 것이라면 말이다. 하여 대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물음은 남겨두겠다.
당대의 가주가 된 그대여. 이 죄와 업을 짊어진 가문을 그대는 어찌할텐가.
오염에 물들어 그대로 끝을 맞이할 것인가. 독을 머금었을지언정 가지를 뻗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할 것인가.
내게 묻는다면 이리 대답하겠다. 지금도 후회한다. 그 날 그 무게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3. 내가 남길 말은 여기까지다. 이 수기에 뒤를 이은 가주들이 각자의 기록을 채우도록 해두었으니 모쪼록 그대에게 쓸모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대를 이어나갈 것이라면 그대의 후계를 위한 기록을 이어서 남겨주길 바란다.
만약, 만약이지만, 더이상 대를 잇지 않을 것이라면 이 수기는 그대의 명과 함께 끝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길.
"그렇지 않은가? 동화학원의 안전을 명분으로 한가로이 까마귀 사냥이나 즐기는 그대와 공석인 학생대표를 대신해서 자발적으로 순찰을 한다는 명분으로 밤놀이를 즐기고 있는 내가 과연 뭐가 다른가?"
물론 후자는 뻥이다. 사실 반정도만 뻥이다. 아성이 학생대표를 대신해서 순찰을 돈다는 것. 사실 건 사감도 모를 것이다. 왜? 1분 전에 그가 그 스스로에게 붙힌 명분이기 때문이다. 아성은 부디 그가 자신의 거짓말을 모르길 바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대는 현궁소속인데 왜 청궁에 와서 순찰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군. 내가 탈이라면 학생대표가 순찰을 포기한 현궁을 노리겠지. 안그런가? 친구"
아성은 발렌이 자신의 손안의 쥐를 까마귀에게 주는 것을 보고 역겹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굳이 내 앞에서 그럴필요가 있나 싶지만...뭐 사실 나도 고기를 먹고 하니 뭐라 할말은 없네."
아성은 슬슬 억지로 발렌의 말투를 따라하는 것이 지겹게 느껴졌다. 굳이 현궁 학생대표를 도발할 필요도 없다. 사실 발렌은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니까. 이상한 논리와 억지를 들이대며 자신의 무고함을 드러내는 스스로의 행동이 추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발렌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초면에 '자네'라고 부르며 하대하는 그 말투 때문인지 아성을 보는 발렌의 눈빛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네~ 죄송합니다.'하고 돌아가면 그날밤은 잠을 못 잘것 같았다.
발렌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로켓을 만지작거리더니 딱딱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성은 그 모습이 제법 웃겼는 지 씨익 웃으며 다시한번 그를 놀렸다.
"아 오케이 오케이 첫째 둘째 모르겠고 한줄요약하자. 돌아가지 않으면 점수를 까겠다는 거지?"
아성은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탈 쓴 정신병자들이 이곳을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그리고 웃음기를 거두고 그에게 말했다.
"나도 하나 말하지. 네가 탈이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금지된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탈들은 그 마법으로 머릿수 차이를 극복하고 다수의 학생들을 가지고 놀았다. 사감과 학생대표가 함께 순찰을 도는 것도 아니고 학생대표 따로 순찰을 돌게한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설사 무사히 교수를 불러 탈들을 퇴치한다고 해도 최초 신고자인 발렌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