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으로는 부족한 일이다. 초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다. 그런데 다음 생에 초능력 가지고 태어난다는 보장이 있나? 그러니 안 하겠다는 소리와 다름없다. 헛소리니 신경 쓸 필요 없는 말인 것이다.
"보험 들고 오면 태워주지."
무시무시한 표정과 함께 살벌한 말을 했다. 반쯤은 진심이다. 능숙해질 때까지는 저도 자신을 믿을 수 없었는데, 뭘 믿고 덥썩 태워달라 하는지 모르겠다. 얘도 참 겁 없다 싶었다. 물론 부탁했으니까 안전하게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야 하겠지만. 공주님 귀한 몸이신데,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해드려야지.
"너 평판 좋아? 오케이."
뭐가 오케이인지는 자기도 모른다. 상관없다는 듯 말하길래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뭐, 끼리끼리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다니까 대충 연호의 좋은 평판에 묻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살아있다면 말이지. 연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벽, 그 다음은 국기게양대. 설마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설마한테 당할까 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연호의 눈을 가리려 손을 뻗었다. 뭔데. 뭘 보는 건데.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인데.
"……빠를수록 좋긴 하지?"
시간은 금이라고들 하니까. 일단 솔직한 생각을 뱉는다. 점심시간도 이제 거의 끝나가거든. 근데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불안한 눈치로 연호를 쳐다봤다. 살려달라는 뜻이다.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요즘 후배들하고 이야기할 일이 잦아졌다. 자연스럽게 웃는 것도 어떻게든 적응해야 할텐데, 영 어렵다.
"1년이라 해도 내 쪽이 선배다보니까.. 혹시 싫은 것도 넘어갈까봐 해서. 그러지는 말아줘."
상대방이 싫은데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것보다 부담스러운 관계는 없다. 나중에 커서는 별 의미 없는 1년 나이 차라 해도, 지금은 엄청나게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괜히 선배라 해서 쪼는 후배들도 종종 봤다. 최민규는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괜히 미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 잠시만."
핸드폰을 꺼내, 하늘을 저장했다. 아마 이름은 '2학년 피아노: 강하늘' 정도로 해놓지 않았을까.
"너도 할 말 있음 연락해. 답장 늦어져도 기다리지 말고.. 웬만해서는 바로바로 받으려고 할텐데, 안 될 때도 있으니까."
차마 게임할 때 연락은 못 받는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대학 갈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멋쩍게 웃었다. 뭐, 그래도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 덧붙였다. 괜히 또 아이스티나 한 모금 더 마셨다.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누군가 강요한 일도 아니지만, '대학 안 갈 거다'라는 말 자체가 가진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의는 지키긴 하나, 싫은 것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선을 긋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하늘은 쓴 웃음소리를 냈다.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은 선배의 말이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받아들이진 않지 않았던가. 물론 오늘 있었던 것은 그냥 생각나누기에 불과했지만. 이전에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 말을 떠올리니 하늘의 입가에선 한 번 더 쓴 웃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튼 들어보고 싶다는 그 말에 하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다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친 후에 자세를 잡았다. 들려오는 것은 아련한 감이 있으나, 마냥 그렇진 않으며 조용하면서도 마음이 놓이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건 하늘이 민규에게서 느낀 분위기를 나름대로 표현해보고자 한 곡이었다. 물론 자신은 작곡을 하지 못했기에, 인터넷에서 들은 곡을 따라 연주하는 것 뿐이었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하면서, 하늘은 절로 눈을 감았다. 두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을 추듯 일정한 박자를 맞춰 부드럽게 움직였고, 멜로디는 끊기거나 흔들리는 일 없이 일정한 느낌으로, 그리고 속도로 가닥가닥을 이뤄 계속 나아갔다.
일부러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을 살리려고 하며 하늘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오늘 만난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느끼는 분위기. 당신에게 받는 느낌. 그 모든 것을 담아 두 손으로 마지막까지 흔들림 없이 확실하게 연주한 후, 그는 두 손을 건반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아무런 말도 없으나, 조용히 들려오는 작은 미소였을 것이다.
/좋아. 막레다! 민규주에겐 평소에 고마운 마음도 컸으니 하늘이 입장에서 느끼는 민규의 분위기는 이런 느낌인 것으로! 아무튼 일상 수고했어!!
문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하가 생각한 시퀀스는 아랑이 빼빼로를 쥐어주고 아랑 몫의 간식을 고르는 거였는데, 아랑이 어딜 쪼르르 가버리는 게 뭔가 싶어서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아랑이 그걸 계산해버린 뒤였다.
링 위에서 0.01초를 넘나들며 상대방의 피부 표면에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해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링 위의 냉혹한 카운터펀치 머신이, 18살의 조그만 동급생에게 멋지게 한 방 먹었다. 평소의 무표정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항상 비스듬히 숙이고 있어 눈가에 드리운 그늘이 지금은 아랑을 주시하느라 조금 들려올라와있어 옅다. 그 작은 차이가, 무표정한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만들었다.
"...이러면 내가 사주는 게 아니라 서로 사주는 거잖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인데 왠지 퉁명스럽게 들린다. 문하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지는 게 보인다. 그러나 자기 과자도 사줄 거냐고 능청을 피우는 아랑을 보고 문하는 그냥 픽 웃고 말았다. 그가 뭔가 이렇게 표정을 보이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
사람 좋아! 세상 좋아! 모두 좋아! 하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은 그 모습이 대책없이 밝아서 눈이 너무 부셨다. 문하의 차갑게 비어있는 검은 눈에는 너무 과하게 밝은 빛이었다. 그것도, 전혀 때묻지 않고 환하기만 해서. 오히려 너무 그득그득 들어차서 발 디딜 자리가 없다는 느낌. 그래서 문하는 차라리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서두를 필요가 있겠나. 동굴에서 밖으로 나오는 게 눈이 너무 부시면 동굴 입구 어귀 적당한 데서 얼쩡거리면서 명적응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냐."
까르륵 웃으며 대답하는 말에 문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바람같은 대답에는 먼지가 한결 사라져 있어, 좀더 가벼운 어조가 되어 있었다.
"음?"
규리의 제안에, 문하는 스포츠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조금 빠듯하지만 별 일 있겠나. 화방 입구에서 몇 발짝 걸어가면 체육관 입구인데. 원래 약속장소에는 여유시간을 두고 도착하는 성격이지만, 하루 정도 약속시간 딱 맞춰 간다고 별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과슈가 뭔데?"
그림에는 문외한이다. 자연히 화구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문하는 규리에게 질문하면서, 화방으로 향하는 규리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음 생이라. 연호나 사하에게는 너무나 멀고 먼 이야기였다. 보통 사람들은 무병장수를 추구하니까. 다음 생으로 가려면 몇십년, 혹은 백여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한다. 그만큼 기다리면서 잊어버리지 않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메모라도 해둔다면 괜찮지 않을까?
" 치과보험은 있어! "
뭐, 교통사고가 나도 치아는 보장이 된다는게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연호는 어쩌면 자신이 튼튼하다는 것 하나만 믿고서 이리 자신만만한걸지도 모르겠다. 그 자신감이 나중에 사하의 차를 타보고서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튼 게양대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눈이 가려졌다. 아무래도 사하가 게양대를 바라보는 연호의 눈에서 무언가 불안함을 느끼고 그것을 없애보려 한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미 봐버린 이상 늦긴 했다. 게다가 빠를수록 좋다니. 이건 연호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연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망설임없이 마음속으로 '초고속 코스' 를 골랐을테다.
" 우리 왕자님은 보험 들었지? "
아까 이야기의 연장선... 이라고 보기엔 연호는 차를 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면허인 청소년이 차를 모는 것 보다 더 무서운 짓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사하를 제대로 받쳐 안고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충 옆에서 들어보자면 무언가를 준비해두라는 이야기였다. 암구호같은 대화로 이루어져 제대로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 그럼 꽉 잡아야해. 놓치면 큰일난다? "
사하를 안은채로 연호는 게양대 앞으로 갔다. 사하가 연호의 목에 팔을 감고있는 덕분에 연호는 한쪽 팔을 자유롭게 둘 수 있었고, 그대로 게양대의 봉을 잡고서 위로 올라가려 했다. 어쩌면 막을 수 있는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기자회견》 >>580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이라기보다는 <내가 좋아하지만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을 포기하는 속도가 너무 빠른 호련이 >>639 좋아하지만 자극적인 건 꺼리는 입맛이라 입이 아릴 정도로 너무 단 건 어려워하네요. >>757 숨깁니다. (간략) >>787 어디서나 잘 잠! 대신에 안는 베개나 인형 같은 게 있어야 함. 베개가 없으면 자기 무릎을 안고 잘 정도... >>806 춤의 경우에 운동을 해서 몸놀림은 날렵하지만 바보라서 안무를 못 외움.. 노래는 그냥저냥(?)
제법 낭만적인 말이라 생각했다. 목적이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점에서 낭만과는 수억 광년쯤 멀어지지만. 한 세 번쯤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팔팔 끓는 아메리카노 안에서도 얼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걸론 부족하다, 공주야."
우유 더 먹고 오라는 식의 말투였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처음엔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고 넘어갈 뻔 했다. 치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것만 지키기엔 다른 것도 소중하지 않니. 차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 <자만하지 마세요, 공주님.> 덧붙이며 웃었다. 네가 자신해도 내가 못하면 우리는 사이좋게 황천길 건너는 거야. …끔찍한 상상이니 이쯤에서 집어치우기로 한다.
"부모님이 들어주셨을걸."
별생각없이 말하고 나니 불안이 밀려온다. 생명보험 얘긴 아니지? 뭐할 건데 전화까지 해? 저기 올라갈 건 아닐 거라 믿어. 우리한테는 계단이라는 좋은 게 있는데, 거길 뛰어올라가는 게 낫지 않을까? 동공에 지진이 난 채 입만 뻐끔대다 눈을 꽉 감았다. 꽉 잡으라는 말에 목을 더 끌어안고, 숨을 참았다. 정확히는 들이마신 숨이 안 뱉어진 거다.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