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는 체력이 좋았다. 그뿐이랴. 천성이 난폭했다. 넘치는 에너지를 해소할 곳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의 연속이었다. 선하는 하늘의 말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늑대임을 딱히 숨기는 건 아니었으나, 기왕 주어진 칭찬이면 사양않고 낼름 받아먹을 요량이었다. 제 능력 탓에 남들보다 앞서나간다는 사실을 굳이 말했다가는 칭찬이 거두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수영장에 놀러오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 연주가 시작되었다. 선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극장 매너 정도는 지킬 줄 알아야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다. 선하는 가지런히 모은 발을 움직여 약하게 흔들었다. 박자를 맞추기 위함이었지만... 딱히 맞는 것 같진 않다. 음악에 집중하고 있다는 표시정도로만 받아들이자.
고개를 숙여 발 끝을 지켜보던 선하가 휘파람 소리에 고개를 든다. 재즈 바-영화로만 봤다-에 온 기분이다. 연주도중 휘파람 불러 화음을 맞추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쯤은 선하도 알고 있다. 잘하네, 뭘. 아까 이미 내뱉은 말을 속으로 다시끔 곱씹는다. 하늘 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잘하고 못하는지는 선하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사실, 설령 하늘보다 잘하는 사람의 연주를 들어도 누가 잘했는지 가늠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루지 못한 짐승이 음악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을리가 없다.
"아... 가는구나."
선하는 약간 아쉽다는 투로, 그러나 과하게 미련가지지 않는 눈치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릴게."
툭툭,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제 책상을 친다. 선하가 입꼬리를 말아 오려 웃어보인다. 너무 천박하지도, 그렇다고 무뚝뚝하지도 않은, 딱 그정도의 미소였다. 담백하게 작별을 고한다.
그 때였다. 아무도 예상치 못 하게 소년의 내면이 파도치기 시작한 것은. 아무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던 소년이,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며 부딪혀온다. 새슬은 문득 두려웠다. 소년의 본심은 아주 작은 조각만 내비쳐진 것임에도, 자신이 남김 없이 휩쓸려 잡아먹힐 것 같아서. 이번엔 네가 나랑 같이 있어 줘. 소년의 말이 옥죄어 숨을 막는다. 그가 자신에게 갈구하고 있는 것이 이제까지 그토록 도망치려 했었던 것의 일종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어쩐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응, 하고 간단히 순응해버릴 것 같아 무섭다. 새슬이 이를 악물었다. 울 만한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참지 않으면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와 별개로, 분명 울고 있지 않은데도 새슬은 문하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하지. 이렇게 들여다보면 소리없이 잔잔한 밤의 한 자락처럼 보일 뿐인데. 손 끝으로 전해지는 미약한 박동이 잔인하게도 애처롭다. 그러나 잡혀 끌려갔던 손을 도로 거두는 일은 없었다. 그저 힘을 빠진 손가락 끝을 동그랗게 말아 쥐기만 했다.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다며 소년이 시선을 떨구었을 때. 새슬은 차마 자신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음을 직감했다.
소년이 지닌 커다란 무언가를 온전히 받아내기에, 지금의 자신은 너무나도 연약했다. 얇은 유리 항아리처럼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이다. 손 끝으로 전해지는 감정 하나하나를 받아드는 것조차 이렇게나 버거운데. 새슬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 거절의 말에 잇새로 흐느끼듯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을 끝으로 잔인하게 등지는 대신, 새슬은 한 발짝 더 문하에게로 나아갔다. 소년이 걸쳐 주었던 옷가지들이 작은 소리를 내며 힘없이 떨어져내렸다. 새슬은 소년이 제게 주었던 온기를 오롯이 다시 소년에게 돌려 주었다.
“옥상으로 와.”
언제든지, 내가 보고 싶어지면. 나는 항상 거기에 있어. 귓가에 스칠 찰나의 속삭임. 둘 사이의 거리는 금방 다시 넓어졌다. 만났을 때와 똑같은, 씁쓸한 웃음을 담고 있는 새슬의 얼굴이 다시금 문하를 마주했다.
문하는 화내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원판이 분노, 슬픔이 극단으로 치달은 나머지 감정을 다 소진해버리고 탈진해서 지쳐버린 잿더미만 남은 애니까. 그렇지만 특별한 계기라거나 하는 것으로 문하를 화내게 만들면... 뭐랄까 1페이즈는 냉기속성, 2페이즈는 화염속성, 3페이즈는 어둠속성이 되는 느낌. 말해놓고 보니 게임 보스같이 됐네.
약하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풉,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너무 사랑한나머지 그런 부분까지 신경쓴다니, 대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란건 뭐고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란건 또 무엇인가, 아니면 이 또한 이렇다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오로지 당신만의 사랑이란 걸까? 그렇다면 그녀 역시 그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역시 당신이 무리하는 모습은 놓칠리 없는 걸까, 고양이는 모든 것을 예의주시하는 동물이니 당신에 대한 것도 언제나 유심히 지켜볼 것이다. 혹여 무리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에.
"후후후후... 귀엽네요... 안아달라고 어리광부리는 모습도, 별것 아닌 손짓에도 이렇게나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어느것 하나 빠뜨리고 싶지 않아요..."
정말이지, 숨막힐 정도로 끌어안아버리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전에도 당신은 이러했을까? 거기까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가지 중요한 것은 어떤 당신이든 그녀는 모두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직접 입밖으로 꺼내는데에 익숙하진 않은 말이었다는듯 결국 두손으로 제 얼굴을 가려버리는 당신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다시 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이쯤 되면 자신이 정말 양이 맞는지, 양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늑대가 아닌지 궁금해졌다.
당신의 그런 귀여운 모습, 진지한 모습, 조용히 무언가를 읊조리듯 속삭이는 모습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작은 입맞춤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애틋한 시선과 함께 다시금 자신의 뺨에 손을 대어 이끌고선 망설임도, 쉴 틈도 없이 입술을 포개는 모습까지도...
"......"
순간적으로 심장에 싸하게 울리는 그 알싸한 고백까지도... 그 모든게 오로지 자신만이 느낄수 있는 것이라면... 이게 처음부터 짜여진 각본이었다 해도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그녀였다.
"고마워요. 그렇게 이야기해주셔서, 이런 저라도, 감히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서..."
그때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답과 함께 미소짓던 그녀는 그대로 두 팔을 당신의 목에, 허리에 감아 조심스레 일으키고선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당신이 적당히 견뎌낼만큼만, 숨이 완전히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아아... 이걸 어쩌죠...? 견딜 수 없을만큼 사랑스러워서, 또 다시 물어버릴 것 같아요..."
양으로서의 본능,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무언가가 끊임없이 당신을 원하고 있었다. 몰래 숨어 둘만의 비밀을 만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맛보았던 그 오묘한 체취가 떠올라 버릇처럼 손에 힘이 들어갔을까? 분명 그건 흔히 말하는 양의 페로몬은 명백히 아니었지만, 그 알수 없는 살내가 그녀를 이성에서 자꾸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