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하고 이미 이야기 다 끝냈어. 우리 아들. 그런 선생님의 말은 듣지 않아도 돼. 엄마랑 아빠는 우리 아들 하고 싶은거 밀어줄테니까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돼. 대신 엄마랑 아빠랑 약속하자. 엄마랑 아빠는 우리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하게 해줄거야. 그러니까 하늘아.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라면 쉽게 포기하지 말고, 조금 힘들다고 관두려고 하지 말고 열심히 해보자. 알았지?"
"응! 열심히 할거야! 나!"
성장하며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잊혀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세 살때 무엇을 했는지, 다섯 살 때 저 공원에서 어떤 풍선을 잡았는지, 자신이 인지하는 선 하에서 가장 먼저 본 동물은 무엇이며, 부모님과 제일 먼저 놀러간 곳이 어디인지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있을 수는 있으나 그 수는 극 소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허나 그런 어린 기억 속에서도 정말로 인상깊은 것은 기억에 남기 마련이었다. 마치 낡은 필름 속 영화가 재생되는 것처럼 흐릿한 영상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며 부분적으로 끊겨가는 부분이 연결되며 단편적으로나마 떠올리는 이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열여덟 살 소년인 하늘에게도 그런 기억은 분명히 존재했다. 넌 양이니까 피아니스트의 길은 포기하는게 낫다라는, 자신에게 정말 기초적인 것을 가르쳐준 학원 교사. 양이건, 늑대건 그 가능성은 차이가 없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에게 제대로 피아노를 가르쳐준 학원 교사. 그리고 아무런 장래성이 없다는, 정말로 피아노의 피도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아들이 하고 싶다고 하기에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며 자신을 믿어주는 부모님.
많은 필름이 하늘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피아노에 대한 재능이 없었다. 그저 좋아한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멜로디가 너무 좋아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치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을 뿐이었다. 다른 이들이 한번이면 끝내는 곡을 세 번을 쳤고, 열 번 쳐서 다른 이들이 겨우 익히는 곡을 그는 서른 번을 쳐서 완성했다. 뒤떨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하늘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보다 잘 못 치면 더 많이 쳐서 따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그저 열심히 건반을 치며 하늘은 음을 완성했다. 4분 음표, 8분 음표, 16분 음표, 4분 쉼표, 2분 쉼표, 8분 쉼표. 왜 이리 모양도 헤깔리는지. 하나하나 건반을 치며 완성하며 익혀가는 하늘에게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물론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간혹 가르치는 교사가 아닌 다른 교사가 와서 잔소리를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떨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괴롭거나 포기하고 싶진 않았어."
멜로디를 만드는 것이 좋았고, 연주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더 뛰어난 연주자가 되고 싶어 다시 한 번 피아노에 앉아 시간을 투자했다. 뒤떨어진 감각을 많은 연습으로 채우며, 때로는 좋아하는 곡을 일부러 피아노로 치려고 음을 하나하나 치며 스스로 악보를 써보기도 하고,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곡을 쳐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경험삼아 부족한 부분에 채워넣으며, 하늘은 자신의 실력을 키웠다.
처음 나간 경선에선 정말로 비참할 정도로 안 좋은 성적을 냈고 하늘은 매우 분해했다. 역시 안되는걸까. 어릴 적 선생님이 말한대로 자신은 안되는걸까. 눈물이 핑 돌지만 애써 안 울려고 눈에 힘을 꽉 주며 밖으로 나가니 부모님이 서 있었다. 아무런 말 하는 일 없이 품 속에 토닥여주며 엄마와 아빠는 우리 아들 곡밖에 안 들리더라 라는 말 한마디에 하늘은 숨을 꽉 죽였다.
더욱 연습하며 하늘은 이를 악물었다. 누구보다, 누구보다 더 위에 서고 싶었다. 자신은 피아노를 좋아했으며, 연주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와 비슷하게 꼭 이루고 싶은, 정말로 이뤄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역시 늑대는 다르네. 완전 재능 넘치는거 봐. 진짜." "미안하지만 나는 늑대가 아니야." "뭐?" "그러니까 늑대가 아니야. 실망시켰다면 미안해."
인간이건 양이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자기 자신임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늑대가 될 순 없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많은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었으니까.
/라고 별 내용없는 독백을 써보기도 하고! 정말로 별 내용없지만 이것으로 내가 하늘이에게 부여한 것은 다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뒹굴거리면서 학창생활을 보내게 하는 것 뿐!
그정도는 고민할 거리도 아니라는듯 당신에게서 들려오는 대답, 상냥한 미소와 조용히 입을 여는 모습에서 괜한 걱정을 했던걸까 싶은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아무렴, 언제 다시 가까워지든 그 행동은 변함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당신에게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후후후... 그건 또 그것대로 상냥한 말이네요..."
마치 정해진 일인양 오늘이 아닌 내일이었어도, 어쩌면 더 지난 뒤였어도 변함없이 항상 인사를 건네왔을 거라는 당신의 말에서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한켠으로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자신 역시 이전과 다르게 변한 부분이야 있겠다만, 그래도 변화된 당신의-어쩌면 미처 눈에 담지 못했을 수도 있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당신 또한 노력했고, 노력할거라는 말은 이런 뜻이었을까?
"물론... 아파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안타까워하는게 당연하겠지만, 괜찮아요. 눈물 흘릴 때가 있어도 이렇게 바로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수줍은 웃음, 어떻게 보면 귀엽다고 느껴질만한 그 미소를 보면 즐거웠고 그녀 또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웃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겠지. 악순환이 있으면 그 반대도 있는 법이었다.
"후후후~ 그만큼 진심이시란 건가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건 좋지 않은걸요~ 가끔은...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화를 내는 모습도 보고 싶을지도...?"
자신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노력할것이라는 당신의 말조차도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 정말이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울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인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안나오는걸 보면 제 감정선도 참 눈치가 없나 보네요~"
겁먹을 필요도, 망설일 필요도 없이 무엇을 하든 밀어내지 않는다는 당신의 이야기는 꽤 간질간질하게 다가왔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니, 겁먹지 않아도 되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그 실수가 반복되면 안되는 법이니까요. 이미 몇가지는... 꽤 크게 저지른것 같고...' 문득 그날 이후의 흉터라던가 남아있는건 아닐까 살피고 싶었지만, 당장 볼수 있는 곳에는 없는듯 싶었다.
"그 말, 그대야에게도 돌려드리고 싶네요..."
손끝으로 자신의 뺨을 간질이듯 매만지는 당신의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에 그녀 또한 버릇처럼 당신의 귓가에 손을 가져가 엄지로 부드럽게, 닿을듯 말듯 원을 그렸다.
" 그런가.. 모르겠어, 방금한 말은 상냥하게 보이려고 한 게 아니라 그저 내 생각을 말한 것 뿐이지만, 슬혜가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분명 내 말이 따뜻하게 들렸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기쁘네. "
시아는 상냥한 말이라는 슬혜의 대답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고는 베시시 미소를 지은 체 말한다. 정말로, 상냥함을 표현하려고 말한 것이 아닌 그저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을 말했던 것 뿐이니까. 그것을 슬혜가 상냥하다고 받아들여준다면, 시아 역시 기쁠 따름이었다. 슬혜가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일테니까.
" 그러네, 이젠 슬퍼해도 아파해도 옆에 슬혜가 있어줄테니까 맘 편히 울어도 되겠어. 그래도 .. 슬혜가 내 감정받이가 아니니까 최대한 울지 않을거야. 슬혜한테는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 "
자신의 수줍은 웃음을 보고, 아리따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슬혜에게 조곤조곤 대답을 돌려준다. 분명 자신의 슬픔, 아픔을 받아 위로해줄 슬혜가 이젠 옆에 있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감정들을 온전히 슬혜에게 받아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타인의 감정을 담아내는 것은 분명 쉽지 않고 힘든 일이니까. 자신이 힘들다고 그런 힘든 일을 슬혜에게 온전히 맡기고 싶지 않았다.
" 그래도 너무 힘들면 아까처럼 슬혜를 끌어안고 기댈게. 슬혜 품에서 엉엉 울어버릴게. 거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니까, 그렇지? "
그래도 기대야 할 때는 꼭 슬혜에게 기대겠다는 듯 시아는 눈을 마주한 체 말한다. 한점의 흔들림 없이 꼭 그렇게 하겠다는 듯.
" 괜찮아, 슬혜가 꼭 울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내 마음만 잘 알아준다면, 방금 전의 말을 듣고 웃어도 아무런 상관 없어. 내 마음을 알아주는거면 충분해. "
자신의 말에 눈물이 나오지 않아 신경이 쓰이는 듯한 슬혜에게 고개를 살살 저어보인 시아가 상냥하게 대답한다. 눈물은 필수가 아니다. 감동을 하더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웃어주고, 마음을 알아주면 그만인 것이다. 슬혜의 눈물 보다는 미소를 보고 싶으니까.
" 응... 나도 겁 먹지 않을게. 예전처럼 혹시나 일어날 일에 겁을 먹고 망설이지 않고 슬혜에게 다가갈거야. "
자신의 귀를 매만져주는 그 손길에, 열을 머금은 한숨을 뱉어내며 귀여운 소리를 내곤 작게 몸을 파르르 떨어보이는 시아입니다. 그런 후에는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당황해선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귀까지 빨개진 것이 한순간 부끄러워진 모양입니다.
" .... 행복이 뭐라고 예단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겠지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말한다면 단언컨데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어, 슬혜야. "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듯한 슬혜의 물음에, 얼굴을 붉힌 체 부끄러워 하던 시아는 얼굴을 조금 추스리려는 듯 뜸을 들이다가 옅은 미소를 지은 체 고개를 끄덕인다.
" 나는 지금 엄청나게 행복해.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야. "
아무리 부끄럽다고 하더라도 이것만큼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복숭아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한 체로 의지가 담긴 눈을 슬혜의 눈과 올곧게 마주한 체 잔잔한 목소리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