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아무래도 학생은 아닌 것 같고. 날씨 이렇게 좋은데 왜 화가 나셨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걷는다. 습도 올라가고 햇볕 뜨거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걸어둬야 했다. 자두가 맛있어서 좋긴 해도 여름은 지나치게 더웠다. 바깥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쭉쭉 빠졌다. 그냥 눕고 싶은데 누웠다간 등에 화상 입을 게 뻔해서 눕지도 못하고. 그래도 계곡이랑 바다는 좋더라. 무서운 영화 나왔다는 핑계로 영화관도 가고. 사하가 간과하는 건지 알고도 신경 안 쓰는 건지 모르겠다만, 잡생각이 길어질수록 무슨 일이 일어날 확률도 높아졌다. 오늘이라고 예외일 이유는 없다. <어이쿠야.> 힘없이 중얼거린 몸이 뒤로 밀렸다. 잠깐 기우뚱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본의 아니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긴 했다. 오…, 내 운동신경 나쁘지 않아. 이와중에 속으로 감탄한다. 부딪힌 자리가 약간 얼얼하긴 했는데, 책상에 갖다박은 것보다 덜 아팠다. 근데 너무 놀라면서 사과를 하니까, 정신 차려보니 무릎을 꿇고 있길래. 사하가 연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싶었는데 역시나 입가가 씰룩댄다.
"안 괜찮아. 어디 부러진 거 같은데."
부딪힌 팔을 잡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런 걸로 부러질 뼈였으면 하루에 우유 열 통은 먹어도 모자라다. 쌓인 우유팩 상상하다 웃음 참는 걸 포기했다.
"뻥이니까 일어나."
피실피실 웃은 사하가 중얼거린다. <누가 보면 내가 돈 뺏는 줄 알겠다.> 잡고 일어나라 손 뻗는 건 덤이다. <무릎 털어야겠네.> 덧붙인다.
아지랑이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인사가 둥실둥실 이마 앞에 맴도는 손에, 퐁, 하고, 하얀 머리가 기대여 부비적대고는 그러고서야 작은 별은 몸을 일으켜서 네 품 안에 폭 안기며 옅은 향을 흘린다
네가 두려워하는 그 냄새는 아닌, 그냥, 샴푸 냄새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냄새 평소의 너를 만나고 싶었던 평소의 냄새가 양의 냄새가 아닌 별의 냄새가 네 코에.
그리곤 우산을 팡 펴서는, 빗방울이 떨어질 리 없는 복도 한가운데서 너와 자기의 머리 위에 색깔 없는 비닐막을 씌우곤 살갑게 웃는 얼굴. 너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이대로 현관까지 나가버리자. 하고, 별하는 네게 손을 쥐어준다. 우산을 쥐고 있는 작은 손째로, 모두 네 손에. 눈마저 네게 두고. 네가 꺼내는 말에 가만히 귀기울이고. 너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말에 나도 기분 좋은듯이 미소를 짓는다. 경아 특유의 웃음은 기분이 들떴을때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지금 그녀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이다. 사다리를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 선물로 받은건데 괜찮냐는 말이 들려왔다. 그녀의 말에 나는 케이크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 내가 괜찮다는데. 안먹을꺼야? "
그러면서 자리를 잡고 포크를 건네주자 아까 망설였던 기색은 어디갔는지 기쁘게 포크를 받아든다. 케이크의 뚜껑을 열자 꾸덕한 느낌의 초코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건 진짜 달아보이는걸. 점심시간은 아까 끝났고 지금은 수업이 끝나고 좀 지났으니 딱 출출할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곧 석식 시간이긴 하겠지만 석식은 먹던 안먹던 자유니까. 그렇게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을때 경아의 말이 들려온다.
" 별로 안힘들어. "
습관처럼 대답해버렸지만 어차피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뭘 숨길 필요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서는 잠깐 멈칫했다가 한숨을 작고 짧게 한번 내쉬고서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 아니, 꽤 많이 힘들어. "
고등학교 3학년의 자리에서 입시를 준비하면서 학생회 일까지 병행하는 것은 생각보다도 너무 힘든 일이었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가예가 현명하게 처신했다는 것에 부러웠다. 나도 그냥 2학년때 부회장까지 해버릴껄. 기본적으로 동아리의 중복 가입이 허용되는 산들고등학교였지만 학생회는 중복으로 활동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금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쁘니까. 다른 동아리의 정원만 떡하니 차지하면서 활동은 아무것도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 그래도 경아가 있으니 힘이 나네. "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베베 꼬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웃는다. 그렇게 말하면서 케이크를 작게 한조각 떼어서 입에 넣는다. 달달한 초콜릿의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여러가지 일들로 꼬여서 아프던 머리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는 기분.
situplay>1596278065>987 홍현은 괜찮다는 여자의 말에 안심하며 약을 주웠다. 그렇게 한참 약을 줍다가 잠깐 고개를 들었을때 우연히 보게 된 명찰에서 백가예라는 이름을 본 홍현은 작년 전교 회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조금 놀랐다. 약을 주워주던 가예 선배가 눈썹 끝을 늘어뜨리며 미안함을 표현하자 홍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야.. 약이요? 괜찮아요. 이.. 이건 먹는데 쓸건 아니었고 아직 많으니까요."
그 말이 맞긴 했다. 억제제는 원래 많이 있었고 영양제도 대량으로 사들였던 상태였지만 이대로라면 약을 버릴 것 같아 실험에 꽤나 자주 사용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먼지만 털어내면 쓸 수 있었다.
홍현이 입고 있던 가운에 대해 물어보자 홍현은 자신의 가운을 잠시 보고 말했다.
"제.. 제가 약학부에 소속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저.. 저 약을 실험에 써야 해서 실험 준비 중에 잠깐 나온 거예요.
겁 먹은 얼굴이 제법 볼 만하다. 이런 맛에 악당들이 사람들 협박하고 다니는 거구만. 소소한 깨달음과 함께 뭘 좀 더 해볼까 싶었다가 정말 울기라도 할까 봐 안 하기로 했다. 명찰보면 후배 같은데 괜히 울리게 되면 미안하잖아.
"아닌가. 다쳤나?"
그래도 이걸로 울진 않겠지 싶어서 금세 말 바꾸고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딜 다쳤냐면. <마음이.> 검지로 심장 위치 정확히 가리키며 말한다. 이것도 뻥이다. 부딪힌 데는 따로 있는데 뜬금없이 마음 다칠 일이 어디에 있을까. 부딪힌 곳도 이제 아픈가 안 아픈가 헷갈릴 정도였다. 잡은 손에는 무게가 없다. 거절하기 애매해서 그냥 잡은 것 같았다. 무게가 깃털 같을 리는 없으니까. 나 멀쩡한데, 진짜. 눈 끔뻑이며 일어나 무릎 터는 연호를 바라봤다.
"까진 데 없으니까 밴드는 괜찮아. 근데 호는 해줄래?"
말이 안 맞는다. 흠집 하나 없는 손을 연호 앞에 불쑥 들이민다. 예상한대로 멀쩡한 손이다. 연호를 바라보는 사하의 얼굴은 민망한 기색 하나 없다. 코팅이라도 된 것처럼 반질반질한 얼굴이다.
"근데 네 이름이 연호구나. 나 너 안다?"
<맨날 구석 어디서 뭐 하고 있던데.> 덧붙인 사하가 웃었다. 애매하게 시야에 걸리는 붉은 머리가 꽤 인상적이었다. 그야… 한두 번도 아니고 꽤 자주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