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도 하지...' 그녀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지난 1년간의 공백에서 쌓아올린 벽이 단 하루만에, 아니... 단 하루도 안되어서 무너져내렸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하고 되물어도 알 수 없었다. 당장의 자신이 품었던 마음도 제대로 설명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이 의문을 수학자나 철학자마냥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이렇듯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감정은 그녀에겐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었다.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서 눈을 돌린지 오래되고, 더이상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을즈음, 그녀는 자신의 앞에 쌓아올려진 벽을 보고서 뿌듯해했다.
적어도 당신을 다시 만나기 전까진...
"재밌네요. 이런 상황도, 그대야의 진심이 느껴지는 사랑고백도...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와닿아요...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약을 과하게 먹었을 때처럼...
참 이상하죠? 그대야도 알겠지만... 분명 저는 이런것들을 느낄 수가 없었을텐데..."
그런데도 버젓이 느끼고 있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 감각과 감정 모두가 또렷하게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뻗어진 당신의 팔이 제 목을 감싸왔고 그러면서도 그 손길에 맞게 스르르 바닥에 눕기 시작했다. 교복이야 좀 더러워질 수 있다지만, 그녀는 여느때와같이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당신의 옷이 더럽혀지지 않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드러누울수 있을 배짱 정도는 그녀에겐 얼마든지 있었다.
가까워진 얼굴, 떨리는 목소리, 그러면서도 올곧은 당신의 말들. 당신은 전해지지 않는것 같아 답답해하겠지만, 이미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대야... 이런 제게 가치있다 해줘서, 이런 제게 사랑한다 해줘서..."
이미 그 말 한마디로 속죄받은 기분이거늘, 거듭해서 겹쳐진 입술과 살며시 맞잡은 손의 감촉이 자양분이 되어서 온몸에 흐르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자신에게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사랑받은건 이번이 두번째지만, 처음으로 사랑할수 있었다. 그녀는 확신했다. 당신을... 이시아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대야는 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죠?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니 부디... 저를 마음대로 부려주세요. 하고 싶은 것들 모두, 제게 이야기해주세요. 얼마든지 들을 거고, 얼마든지 따를테니..."
물론 그때의 기억이 한순간에 괜찮은 일로 바뀔리는 없었다. 사람은 그 의심과 서러움을 한번에 거두어낼 수 없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냉정한 그녀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둘중 한사람이 느리다면, 상대의 페이스에 충분히 맞출 준비는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천천히 시작하기로 했다. 비록 무너진건 한순간이라 해도 자신이 받아들일 이 감정을 다시 조립할 필요가 있었고, 당신이 받았던 상처를 조금씩 보듬어줄 필요가 있었다. 굳이 서두르고 싶진 않았다. 서두르다가 또 다시 당신을 상처입히면 모처럼의 의미가 사라질테니,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전엔 하지 않았던, 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익혀나가야 했다. 분명 다시 하는 사랑인데도 그녀는 모든 것이 서투를 것이다. 그도 그럴게, 그동안은 제대로된 표현조차 해본적 없었으니까.
" 앞으로는 더 느끼게 해줄거야.. 나도 더 노력해서 슬혜가 제대로 맘껏 느낄 수 있도록 해줄거야. "
슬혜의 말을 들은 시아가 상냥하게 속삭이며 애틋함을 담은 눈으로 슬혜를 바라보았다. 분명 슬혜의 겉은 지난날의 그녀와 바뀌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 있는 슬혜는 과거의 그녀와는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이렇게 올곧게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슬혜를 보고 있노라면 시아 역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감정을 슬혜가 조금이라도 더 만끽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졌다.
" 나도 고마워.. " " 이런 나를 한번 더 돌아봐줘서, 이런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
분명 두사람은 멀어졌음에도 떨어지지 못 했다. 이렇게 서로를 향한 마음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래서 지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좀 더 전해주기 위해 슬혜를 눕혀선 끌어안은 체 입을 맞추어 간다. 지난날, 바보처럼 적극적으로 슬혜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지 못 했던 것을 반성하듯 열정적으로, 슬혜를 향한 열기를 담아 입을 맞추어 나간다. 슬혜와의 입맞춤은 달콤했고, 뜨거웠고, 머리 깊숙한 곳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다.
맞잡은 두손을 통해 따스한 슬혜의 온기가 타고 올라왔고, 그 온기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고 움켜쥐려는 듯 조금 더 강하게 맞잡아간다. 입술 사이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에 자신을 맡긴 체, 하염없이 입을 맞춰간다.
" 그러면 일단 지금 나를 잔뜩 예뻐해줘. 예전처럼, 그리고 새롭게 날 예뻐해줘.. "
맞추던 입술을 떼어내곤 열기를 띈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아래에 있는 슬혜를 내려다보던 시아는 슬혜의 속삭임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체 속삭인다. 맞잡고 있던 오른 손을 그대로 끌고 와, 슬혜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대곤 그 손에 강아지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부비적거리다 슬혜의 손가락에 쪽하고 입을 맞추어 준다.
" 아직 다들 하교를 할 때까진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래줄 수 있지..? 나, 슬혜한테 예쁨 받고 싶어.. "
슬그머니 슬혜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가로 끌고와 수줍게 자신의 입술을 꾹 누르게 만들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새로 피어난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인 시아는 슬혜가 해주고 싶은대로 예뻐해달라는 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물론 곱게 미소를 짓고 있는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지만.
" 지금은 슬혜한테 잔뜩 예쁨 받고 싶어 "
안될까?
조심스럽게 되묻는 시아 역시 과거와는 다르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슬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슬혜 홀로 노력하는 것만을 보고 있진 않겠다는 듯, 그녀 역시 둘이서 함께 한걸음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