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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자신의 인생관을 자랑스레 공표하는 당신이 재밌게 느껴졌을까, 생각해보면 그 어떤 때에도, 자신이 부정적인 면모를 내비칠 때에도 당신은 꾸준히 격려하면서 그녀를 보듬어주었고, 그러면서도 일정한 선은 지키며 과하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쩌면 방황하는 동안은 조금씩 위로를 받았으며, 방황하지 않기로 한 때부터는 당신에게 도움을 주려고도 했다.
용케도 자신이 넘지 말라고 하는 선을 넘진 않은 당신이었기에 그 어느때도 그녀가 진심으로 화낸적은 없었고, 그렇기에 더 감사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단 선배뿐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도, 조금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특유의 눈밭 위 강아지같은 얼빠진 행동만 아니라면...
"후후후후~ 머시기 협약을 제네바 협약처럼 얘기하진 말아주세요~"
하여간 이상한 부분에서 어긋나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엉뚱한 당신의 모습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자꾸 그렇게 틈을 보이는 버릇이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괴롭히고 싶은 것 아닐까?
...아무래도 좋다. 뭐든 전긍정인 사람을 보는건, 그런 사람과 친해지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그런 당신이라 해도 분명 말못할 고민은 있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녀가 그것을 케어해줄만한 차례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
언젠가, 당신이 직접 말을 꺼내기 전까지 기다려줄 뿐일까.
"앗,"
탁 놓아버린 손에 의지라도 했는지 그대로 튕겨 자신쪽으로 고꾸라지는 당신을 어떻게든 받아내려 했을까? 저보다 큰, 그것도 남정네를 받을만한 힘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녀는 요령껏 그를 받아내었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팔로 막으려 했지만, 어떻게든 당신의 급소는 피한 채 부딪힌 충격으로 아프지 않도록 받아냈을까,
산들고등학교의 학생회실은 수업이 끝나고 학교의 모든 일정이 끝나는 시간까지 사람이 없는 경우는 잘 없다. 누군가는 서류를 처리하고 있을수도 있고 누군가는 학생회실에서 학생회 인원들끼리 수다를 떨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시끄러운 곳을 피해서 조용한 곳을 찾아 왔을수도 있다. 그 중에서 나는 첫번째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부학회장이라는 직위에 있기 때문에 해야할 것이 조금 있었다. 그렇게 서류를 대충 끝내고 자리를 뜨려고하니 누군가가 내 책상에 편의점에서 파는 케이크를 올려둔다. 학생회 인원 중 한명이 선물이라면서 주고 간 것.
" 아 고마워. "
저번에 나누어준 샌드위치에 대한 답례라는 것 같다. 나도 공짜로 받은거라서 이런걸 받으면 좀 미안하긴 했지만 주는건 거절하지 않으니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그대로 챙겨들어서 학생회실을 나온다. 아직 아르바이트를 가기엔 시간이 좀 남아서 이걸 어떻게 먹고 갈까 고민하다가 마침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어서 도서실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주로 공부를 학생회실에서 하거나 반에 남아서 하는 편이라서 도서실에 자주 올 일은 없었지만 도서실에 붙박이처럼 있는 한 여학생에 대해서는 잘 아는 편이다. 도서실에 자주 안가는데 도서실에 있는 학생을 잘 안다는건 뭔가 앞뒤가 잘 안맞는 말 같지만-,
" 여전히 내가 없으면 안되는구나? "
떨어지는 책을 손으로 받아내면서 말했다. 고동색의 머리카락이 두갈래로 보기 좋게 땋아져있는 여학생의 이름은 도경아. 내 어릴적 친구였다가 최근에 다시 만나게 된, 어찌보면 소꿉친구인 학생이다. 책을 너무 좋아한단말이지. 이번에도 좋아하는 책에 정신이 팔려서 실수로 떨어뜨린게 틀림 없었다. 나도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경아도 키가 상당히 작은 편이라서 나는 왼손에 들려있는 봉지를 손으로 들어보이며 얘기했다.
유독 눈이 좋은 탓에 선하는 하늘의 집착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하늘의 집요한 시선을 은밀히 따라간다. 먼지를 막기 위해 덮어진 휘장이 거두어져있다. 매끈하게 빛나던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 드러난 하얗고 검은 건반들의 정열들이란. 아마도 하늘은 그걸 보고 있을 것이다. 방음이 되어있는 탓에 음악실안에는 적막이 깔린다.
"난 그보다도 특출나지 못한 관객이라서 듣는 귀가 좋지 못해. 보아하니 피아노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냥 쳐. 그렇게 좋아하면 못치지는 않겠지."
선하가 싫어하는 종류의 연주는 엇나가는 박자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높은 음정도가 될 것이다. 극히 초보가 아니면 잘 하지 않는 실수들이었다. 선하는 자세를 바로잡고 자리에 앉았다. 배꼽위에 올려놓던 손깍지를 책상위로 올리고 허리를 쭉 폈다. 상대가 자신을 신경쓰고 있다면 저 역시 신경써줘야함이 맞았다. 학습된 배려가 선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네 선택에 내가 그다지도 중요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선하가 그리 말하며 말꼬리를 늘였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상대의 행동이 변하는 건 지금 당장 구미당기는 일이 아니었다. "기어코 나를 관객으로 만들어놓겠다는거니? 그래, 듣고 싶어. 대신 날 위해 연주해줘야할거야." 그래서 선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자신을 선택의 갈림길로 이끌었다면 이정도 부탁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음악 자체에는 관심 없을지언정, 그 음악이 저를 위한다면 그 가치가 달라진다. 선하는 빙그레 웃으며 손깍지에 제 턱을 올렸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느낌, 사람들 앞에선 숨어다녔지만 단 둘이 있을 때만큼은 오롯이 자신이 만끽하던 그 온기가 어느샌가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느끼며, 한순간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은 시아였다. 안돼, 이러다 미소가 무너질지도 몰라. 시아는 어떻게든 짓고 있는 미소에 힘을 주어 지켜내며 꼭 감싸안았다.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안아주는 그 팔에, 조심스럽게 힘을 풀어 자신의 몸을 기대어보면서 천천히 슬혜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 ...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런 것 뿐이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것들 뿐이라서. "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그당시의 너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었다면 이렇게 1년이 넘는 세월을 빙빙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말을 입에 삼킨 체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꾸만 뜨거워지는 눈시울 탓에 무너지려는 미소를 애를 쓰며 지켜내려 했다. 왠지 슬혜에게 완전히 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 꾹 참아낸다.
그리곤 자신의 목을 무는 슬혜의 행동에, 그저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을 맡긴다. 그걸로 슬혜가 기뻐할 수 있다면, 기분이 좋아진다면 얼마든지 내어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슬혜가 문 목덜미에서 전해져오는 정신이 아늑해지는 감각에 그저 시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슬혜의 몸에 매달리듯 안는 것 뿐이었다.
용기를 내어 입술을 오물거리던 자신에게 몇번인가 무는 시늉을 해오는 슬혜를 보며 시아는 맑은 웃음을 흘렸다. 왠지 2년 전의 두사람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오늘 하루로 끝날 꿈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은 행복했노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막상 갑자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자신에게서 떨어지려는 슬혜를 바라보며 마음 한켠이 아파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행복했노라 말할 수 있음에도 멀리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역시 그녀 또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리라.
" 어...? "
이젠 슬혜가 돌아가려 떨어졌다고 생각을 하던 시아는 한순간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레 자신의 발치에 무릎을 꿇는 슬혜,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며, 손을 매만지고 예쁘장한 입술이 열리며 흘러나오는 말.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써 짓고 있던 희미한 미소 마저도 사라진 체 멍하니 홀린 것처럼 슬혜를 내려다보던 시아는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주저 앉았다. 애써 무릎을 꿇은 슬혜에겐 미안하지만 한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것이었다.
" .....나 이번엔 다시 놓지 않아도 되는거야..? "
주저앉으면서 큰 소리가 났음에도, 멍하니 슬혜를 바라보고 있던 시아가 천천히 입술을 연다. 파르르 떨려오는 목소리가 지금 시아의 동요를 보여주는 듯 했다. 슬혜에게 내어주지 않은 손을 자꾸만 쥐었다 폈다 했고, 눈을 자꾸만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조용히 속삭였다.
" 나 이번에는 나를 내버려두고 가는 슬혜의 뒷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거야..? 나 이번에는 슬혜가 나를 두고 멀리 가버리는 것을 잡지 못하고 지켜보는 것도 안해도 되는거야..? 이젠 언젠가 슬혜를 만나면 사랑했었다고 제대로 말해주고 싶다는 걸 생각만 하지 않아도 되는거야...? "
더이상 미소를 지을 힘도 없는 것인지, 천천히 일그러지는 얼굴로 시아는 조용히 속삭이듯 물어왔다. 더이상 참지 않아도 되냐고, 더이상 혼자서 아파하지 않아도 되냐고, 이젠 맘 편히 슬혜에게 안길 수 있는 것이냐고, 울먹이며 묻고 있었다. 그자리에는 언제나 부드럽고, 평온하고, 잔잔하던 따스한 소녀는 없었다. 그저 더이상 홀로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여린 소녀가 있었다.
" 놓지 말아줘... 나를 놓지말아줘... 역시 나 그런건 싫으니까.. 그날도 싫다고 말했어야 하는데...응, 몇번이고 몇번이고 마음속으로만 말했었는데... 나...놓지마아... "
싫어, 그런거... 이젠 혼자 아파하는 건 싫어..
시아는 울었다. 슬혜의 손을 혹시라도 이게 꿈이라서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까봐, 두손으로 강하게 움켜쥔 체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슬혜에게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