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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라도 도경아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를 찾을 일이 있거든, 도서실로 가보라. 이건 산들고에 재학하는 학생이나 재직 중인 선생님이라면 대부분 아는 사실이다. 그만큼 경아가 도서실에 있는 풍경은 당연하다. 도서실에 책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고 책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 것만큼이나, 그 소녀는 종이로 만든 숲 사이에 어울린다. 그 자체로 하나의 나무인 것마냥.
오늘도 해는 동쪽에서 뜨고, 경아는 수많은 이야기꾼 사이를 방황하다 한 권을 고른다. 오랫동안 보고 싶었으나 바로 대출에 대출을 거듭하여 전산 상으로만 마주하던 책이었다. 어쩌면 오늘은 운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책장 가장 위쪽에 있어 그대로는 손이 닿지 않는 탓에, 경아는 낮은 사다리를 가져온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서 손을 뻗는다. 몇번의 헛손질이 이어지자 경아는 발꿈치를 약간 든다. 겨우 손 끝에 책이 닿자 환한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그러나 닿는 것에만 지나치게 신경썼는지, 앗 하는 사이에 책을 놓치려 한다. 얼굴에 낭패감이 스친다. 경아는 오랜 경험으로 자신의 운동신경이 어느 정도인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땅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책을 줍게 되고 말 테다.
//한 번 뒤엎었더니 느리기도 느리고 짧으면서 뭣도 없는 선레가 되어버렸네요...답레는 편하게 주세요, 해인주.
>>289 사실 내가 일상을 그다지 돌려보질 않아서 음악실 상황도 한번밖에 없었어. 제각각 다 다른 장소였거든! 아마 뒤뜰이면 하늘이가 이어폰을 떨어뜨려서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찾고 있을 것 같고, 음악실이라면 피아노를 혼자서 연주하고 있다거나, 혹은 사용하기로 한 대가로서 음악실을 혼자서 정리하러 왔다거나 그럴 것 같네.
편한 쪽으로 시작해둬도 좋을 것 같아! 사실 난 어느 쪽이라도 정말 편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아. 그리고 하늘주는 꼭 짜야 하는 선관이 아니면 굳이 먼저 막 찌르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사실 지금 접점이 있는 캐릭터가 아직은 제로인 것 같아서. (같은 반 제외) 선관은 못 찌르고 있긴 한데... 혹시나 이런 관계, 저런 관계에 하늘이 저 녀석이 있으면 조금 분위기나 구색은 맞춰질 것 같다 하는 것이 있으면 얘기해주면 땡큐야.
사실 여기 참치들 내가 생각도 못한 선관 관계를 새벽에 막 이야기하고 있어서 호텔에서 관전하다가 창의력에 박수를 쳐서 친구놈이 너 뭐함? 이러더라. (시선회피)
아랑의 발언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이 매우 드문 문하의 관심을 끌어당기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것은 문하가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던 전면적인 부정이었으니까. 그래서 문하는 마치 누가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귀를 뒤로 젖히고 있다가 손길을 떼며 입을 여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다시 귀를 쫑긋 그 사람을 향해 돌리는 개처럼 아랑에게 집중했다.
아랑은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으나, 아랑의 손길이 떨렸던 이유를 전달하는 데에는 충분한 말을 했다. 문하는 가만히, 멍하니, 새까맣게 죽은 눈으로 아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랑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일순간, 그 새까만 심연 한가운데에서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을 것이다.
아랑이 떨리는 한숨 내뱉듯 내려놓은 말이 끝나자, 문하는 잠깐 주저했다.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아주 조심스레 한 발짝을 내딛어 아랑에게
다가갔다.
그는 다시 무릎을 구부려서 아랑과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혹시 겁쟁이로 보이냐는 질문에, 문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이것은 문하가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그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렇지만, 오늘 하루-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문하는 예외를 두기로 했다. 옛 상처가 덧나서 아직도 남아 그 고통에 떨고 있는 당신이 왜인지, 작년의 자신의 모습과 겹쳐보여서. 그는 잠깐 눈을 감고는, 떴다.
"...아파해도 돼."
그는 아프다는 느낌을 잊어버렸다.
"울어도 돼."
그는 우는 법도 잊어버렸다.
"엄살부려도 되고, 무서워해도 돼."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마저 잊어버렸다.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고 기대도 돼."
그는 마음을 기댈 곳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네 잘못이라거나, 자신이 약해 보인다고 자책하지만 마."
그에게 남은 것은 그가 그 스스로에게 남기는 상처뿐이었다.
"그게 정말로 스스로를 죽이는 거야."
그는 고요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것들 중 하나도 하지 못한 자신이 이렇게 전락해버리고 말았기에. 인생 헛산 열여덟 살 풋나기의 어설픈 조언일지언정, 문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자신보다 훨씬 상냥하고 훨씬 밝은 당신이, 자신에게 아직도 이런 조그만 친절을 나누어줄 정도로 아직 행복한 삶에 많이 가까운 당신이, 혹여나 상처가 잘못 덧나서 자신처럼 마음을 잃거나 하지 않았으면 해서.
문자그대로 급식을 해치우고 매점에 들려 끝내주게 멋진 간식 타임을 즐겼다. 선하는 다먹은 아이스크림의 나무스틱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품을 쩍 했다. 날이 따뜻하고 배가 부르면 잠이 온다더니 딱 그짝이었다. 마침 5교시가 음악 시간이었으니 미리 음악실에 들려 낮잠이나 즐길까하는 계획이 있다.
선하는 음악실 앞에 서서 몸을 쭉 뺀다. 평소 잠겨있을 음악실 문이 열려져있는 상태였다.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선하가 고개를 기울인다.
"안녕."
선하는 철로 된 문을 아예 열며 음악실로 들어섰어. 순해보이는 인상을 보아하니 시끄러운 성정은 아닐것이다. 계산을 마친 후 태평히 인사를 건넨다. 분명 친절한 음성이었으나 자세나 태도는 느슨하기 그지 없었다. 의자를 꺼내 제 몸을 앉히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힘을 주지 않은 탓에 몸이 주루륵 내려간다. 겨우 엉덩이 끝을 의자에 걸친 상태로 눈만 끔뻑이고 있다.
오늘은 방과후에 일정이 있었다. 야자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그 시간대에 대신 이런저런 일정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자신을 가르쳤던 학원 은사를 만나러 가는 일이라던가. 물론 과거 하늘에게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라고 한 그 작자가 아니라 양이라도 키워보겠다고 한 마찬가지로 양인 은사였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ㅡ그래봐야 5년 정도였다.ㅡ 하늘은 그 대신 점심시간에 음악 교사에게 음악실을 써도 되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그러자 깨끗하게 쓰고 정리만 잘 하고 가면 별 상관없다면서 열쇠를 맡겼기에 하늘은 음악실 안으로 들어섰고, 음악실을 정말로 가볍게 정리하며 하늘은 피아노 의자 앞에 앉았다. 두 손을 올려 연주를 하려는 듯, 눈을 감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처음 보는 이의 얼굴이 보였다. 하얀듯 하나 푸른 느낌의 머리카락이 상당히 인상적인 3학년 선배임을 인지하며 하늘은 절로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네. 안녕하세요."
조금은 어색한 느낌으로 이야기를 하며 애써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려고 하며, 하늘은 자신의 뒷목을 괜히 긁었다. 이렇게 되면 어쩌해야 하나. 나가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문뜩 의문이 떠올라 하늘은 덩달아 의자에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역으로 물었다.
"그러는 선배는요? 지금은 점심시간인데 음악실에 무슨 일로? 아. 음악부 사람인가요? 하지만 못 본 것 같은데."
음악부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같은 공간을 쓰려고 하는 이들인만큼 약간의 안면은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바,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없었던 것 같아 의아해하다 하늘은 바로 질문에 대답했다.
"점심시간에 음악실을 써도 된다고 해서요. 정리만 깔끔하게 해두면. 그래서 정리 좀 하다가 피아노를 칠까 해서요. 방해될까요?"
아무렇지 않은 미소로 답했다. 수백 번, 수천 번, 셀 수도 없을 만큼. 언제나 새슬은 ‘이상한 애’였고, 그런 소리를 듣는 데에는 이제 익숙했다. 물론 그런 호칭과 손가락질이 상처가 되어 박힌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슬 자신의 감각이 무뎌진 것인지, 적응하는 게 뛰어났던 것인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것에 일일히 예민하게 반응하면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아마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모양인지도 모른다. 그나마도, 비교적 최근엔 나쁜 의도로 이야기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에 별 대꾸하지 않은 채, 새슬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차박거리는 젖은 발소리와 거리의 소음만이 맴돌 뿐이었다. 빠아앙ㅡ, 찢어지는 경적 소리에 눈을 돌렸다. 그것 외에 무슨 소리가 들렸던가? 글쎄. 새슬의 눈빛이 홀린 듯 트럭 사이를 배회했다.
“ㅡ아.”
잠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린 것은 문하가 말을 걸어왔을 때였다. 허공을 맴돌던 흐린 눈빛이 문하를 바라보며 초점을 바로잡았다. 가만히 웃었다.
“여기, 근처에 공원이 있지.”
행선지를 향해 고개를 돌려 보인다. 저 쪽에 있는, 조그마한 공원. 알아?
“딱 거기까지만.”
거기까지만 함께 해 줘. 그 이상은 비밀이야. 여느 때와 다름 없는 그 특유의 나른한 웃음이었지만, 의미심장한 그늘이 옅게 서려 있었다. 선이라도 긋는 것처럼.
사실, 선하는 문이 잠겨있다면 창문을 통해 들어올 요량이었다. 몇몇 철저한 당번들은 창문을 꼭 잠그고는 했지만 대부분의 당번은 그러지 않음을 알고 있다. 요컨대, 선하가 음악실 문을 먼저 확인하지 않았고 창문을 통해 들어섰다면 굉장히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거란 소리다. 다행히도 선하는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멀쩡히 문을 열고 척척 들어와 손을 살랑살랑 흔든다. 인사에 답해주기 위함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선하가 습관처럼 웃어준다. 마치 버튼을 누르면 작동하는 기계처럼 자연스러운 표정 변화였다.
"그냥. 피곤해서."
질문에 비해 말수가 적다. 그걸 알면서도 선하는 지금 당장 대답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근원 모를 권태가 그렇게 만들었다. 음악실 내부를 훑으며 고개를 돌린다. 자연스럽게 마주친 시선이 어긋났다. 선하의 옆모습에서, 정확히는 허공을 부유하는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피로감이 느껴진다. "...교실은 너무 밝고 시끄럽거든. 음악부는 아니야." 뒤늦게 설명을 덧붙인다.
피아노를 치겠다는 말에 그제야 선하가 힐끗 하늘을 본다. 그러고보니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었지. 마침 피아노도 치기 좋게 세팅되어있는 상태였다. 선하는 방해가 되겠냐는 말에 바로 답하지 않고, 뜬구름잡는 소리를 했다.
"피아노는 잘치니?"
사실 선하는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다. 천성이 그런건지 도무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모든 행위에 친숙하지를 못했다. 문학과 예술이 대표적이었다. 대충 들었을때 감상의 폭 역시 넓지 못했다. 제 신경을 건드리지 못하면 잘치는 음악, 건드리면 못치는 음악으로 나누는 것이 한계였다.
"아니지, 네 실력은 중요하지 않겠네. 여기서 불청객은 나니까. 오히려 내가 물어야겠구나. 내가 네 연주에 방해가 될까?"
음악부는 아니지만 피곤한데 음악실까지 굳이 온 선배.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며 음악실에서 자러 왔다는 결론을 내리며 하늘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실이 밝고 시끄러우니까 음악실로 왔다는 것은 어쩌면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는 의사표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하늘이의 시선이 바로 피아노로 향했고 거기서 좀처럼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고 끈적하게 미련을 남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이 밀렸으면 밀렸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자러 온 선배가 있는데, 물론 선배의 말이라고 해서 다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일단 자신이 음악실을 쓰는 조건은 아무도 쓰는 사람이 없다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오늘은 포기해야하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하늘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건 매번 다를 것 같네요. 저는 특출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서, 결국 제가 그 날 느낀 것과 표현하고 싶은 것을 피아노로 표현하는 것 뿐이니까요. 그렇게 보면 아직 노력할 점이 많네요."
자신의 연주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살며시 회피하며 하늘은 고개를 뒤이어 저었다. 연주에 방해가 될 일이 있을까. 누군가가 본다고 해서 연주가 흐트러질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남의 앞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상대가 피아노를 듣고 싶어하느냐, 듣기 싫어하느냐. 그것이 그에게 있어선 가장 중요했다.
"듣고 싶으신가요?"
짧고 간결하게. 자신이 알고 싶고자 하는 것을 물으며 하늘은 피아노 의자 바로 근처에 섰다. 듣고 싶지 않다면 굳이 연주할 필요는 없었다.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에게 자신의 연주는 소음일 뿐이었고, 서로간에 그런 불편한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하늘은 빠르게 결론지었다.
차라리 이것 또한 환상이라면 좋을까, 아니면 그저 하룻밤의 꿈이기만 해도 좋았다. 분명한 감촉, 더욱 가깝게 밀착되어 서로의 온기가 새어나갈 일 없이 전해지는것 같은 이 감각이 잠깐의 착각이어도 좋다고... 그녀는 지나가듯 그렇게 생각했다.
기억하고 있다는 자신의 말에 일순간 놀란듯, 숨을 멈추다가도 기쁘다는 감정이 가득 배어나오는 속삭임과 다시금 뒷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이대로 몸을 맡기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제대로 웃어보이는 그 모습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흐릿하니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전보다도 더 또렷하게 와닿았다. 덧칠하면 더 부각되어보이는게 이런 느낌일까, 당신을 안고 있는 팔이 무거운듯 하면서도 그렇기에 더 단단하게 안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여전히... 상냥하시네요. 달라진게 없어요..."
변하지 않는다는건 지금만큼은 다행인 걸로 생각하고 싶은 그녀였다. 변하지 않았기에 그런 당신을 마주할 수 있었고, 변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할 수 있었다.
아찔한 향기, 양들은 저마다의 페로몬향이 있다던데 그걸 맡지 못하는 것도, 자신의 향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쉬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에 빠져들듯 들뜬 기분은 무의식적으로 흘려내는 한층 더 달콤한 당신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자신의 틈 사이로 팔을 밀어넣어 더욱 가까이 붙으려하는 몸짓에 당연한듯 응하면서도 그 잠깐동안은 목을 물고있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때에 맞추어 들려오는 목소리, 눅진하게 녹아든 초콜릿처럼, 그러면서도 상큼한 맛의 과육처럼 충분히 자신을 흔들어놓고도 남을 당신의 말에 무어라고 대답했을까,
당신이 어리광부리듯 자신의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훑다가도 이내 오물거리다 떨어질 때까지,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그런 얄미운 감촉을 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듯 몇번인가 무는 시늉을 했을지도 모른다.
"...... 그대야만 노력해선 안되는 걸요..."
다시금 자신의 아랫입술에 입을 맞추고서 비밀을 말하듯 수줍게 속삭이는 당신에게 그녀는 쉽사리 보여줄 수 없었던 차분하고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새까만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다가도 잠깐 서로의 몸을 떨어뜨려 앞에 제대로 서서는 그대로 몸을 굽혀 마치 맹세의 언약을 하듯 무릎을 꿇어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조심스럽게 잡아올린 당신의 가녀린 손을 매만지다가 그제서야 자신이 꺼내야만 하는 꽤 무거운 말을 꺼냈을까,
"저 역시 노력할테니까요... 그대야를 아프게 했던만큼, 슬프게 했던만큼... 멋대로 떨어뜨려버린 이 손을... 다시 잡을 수 있게 해주시겠나요...?
단순한 죄책감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닌, 예전처럼 거짓과 가식으로 칠해지지 않은 저를 받아주실 수 있나요...?
허락해주신다면 그대야... 이번엔 절대로 놓지 않을 거니까요..."
진심을 담을수 없던 과거가 괴로웠던만큼 금방이라도 참을 수 없을것 같았지만, 이미 울상이었던 당신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묵묵하게 맑아진 눈으로 마주오는 시선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