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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슬혜에게 당했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과 슬혜만이 안고 가야할 일이었으니까. 슬혜에게는 어쩌면 앞날을 막을지도 모를 치부일지도 모르는 그 일을 떠들고 다닐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다 슬혜의 앞에 방해물이 되어버린다면, 그 고통을 시아는 견뎌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마음에 그것을 품은 체, 1년이 넘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일주일 정도 집에서 그저 아프다고 둘러대며 쉬기는 했지만, 몸을 추스르고 슬혜가 없는 일상으로 돌아와 여태까지 살아왔다. 잊은 듯, 잊지 않은 듯 지내왔던 그 시간들은 슬혜를 만나자 마자 무너져내렸고,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릴 때가 찾아왔다는 것처럼 시아의 감각을 일깨웠다.
" 응? "
한순간 입술이 달싹이며 소리를 내는 슬혜를 바라보며 시아는 여전히 미소를 머그믄 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바라보았다. 편하게 말을 해도 좋다는 듯, 자신을 탓하는 말도, 비난하는 말도, 헐뜯는 말도 상관없다는 듯 차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말을 하는 시아 역시도 용기가 필요했다. 애초에 시아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망부석도, 흘러가는 물도 아니었다. 그녀 역시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녀가 애정을 품었던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아무렇지 않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애정을 품었다면 그런 것까지 감싸안아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용기를 낸다. 두려움에 떨려오는 팔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손이 새하얗게 변하도록 감싸쥔 체로.
" 읏.. "
그러다 슬혜가 자신의 양팔을 잡곤 벽쪽으로 밀쳐오자 벽과 부딪치면서 작은 소리를 낸 시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곤 바라본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놀란 표정을 지우곤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 ... 그래서 슬혜가 편해질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난 괜찮아. 응, 나는 그렇다면 받아줄 수 있어. "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몸을 맞닿은 체 거친 숨을 내쉬는 슬혜에게 상냥하게 대답을 돌려준다. 단 한번도 너와 마주하고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 그렇게 말하는 듯, 눈을 마주하고 있는 시아의 눈은 흔들리지 않고, 물기를 머금은 체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 울고 있는,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은 그 모순된 광경을 보여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보였다.
" 왜 없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사람을 그렇게 멍청하다고, 잊어버리라고 욕하고 으름장을 놓는 사람도 있다면.. 이렇게 그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법이잖아? "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를 쓰는 슬혜를 바라보며 곱게 눈을 접어보인 시아가 천천히 손을 뻗어 예전의 두사람으로 돌아간 것처럼 천천히 뺨으로 손을 가져간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내려앉은 손을 움직여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상냥하게 대답을 돌려준다.
" 나에게 '현슬혜'는 몇년 전부터 그런 존재였어. 네가 나와 사귀는 것을 모두에게 감추고 다닐 때에도, 그걸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는 동안 느껴지는 슬픔과 서운함을 감당하고 품을 때도, 그러면서도 너와 만나서 시간을 보낼 때면 이세상 모든 것을 잊고 너만 보였던 그 황홀함도, 네게 버림 받으면서 온갖 욕을 듣고, 네 자그마한 손에 맞아 상처가 날 때 느껴지는 고통도 결국은 네가 소중해서 그 모든 감정들도 소중했어. "
또르르, 투명한 눈물 몇방울이 흘러내린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여 슬혜를 바라보던 시아는 길었던 말을 끊고는 잠시 숨을 고른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천천히 내뱉는 달콤한 숨결이 흔들리는 것은 분명 그녀 역시도 감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 같아 보였다.
" 그 모든 걸 소중하게 여길 정도로 넌 내게 엄청나게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네게 나는 어떤 존재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존재가 아니리도 모르지만.. 너와 남들 몰래 사귈 때에도, 비참하게 헤어질 때에도, 지금도 그건 변하지 않았어. "
한때는 문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침 태양이 말갛게 빛나고 사파이어같은 하늘이 아름답던 시절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의 삶의 주인이 자신이 된 것만 같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오만한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탄하게 쭉 뻗은 길에는 목적지가 없었으며, 자신의 삶을 정말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던 한 줄기 빛은 너무도 쉽게 까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내 탓이라고 참회도 해 보았다. 왜 떠났냐고 원망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공허한 바다로 퍼져나갔다가 역조처럼 되돌아와 자신을 후려치고 깎아먹을 뿐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자기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고칠 수 없었다.
어디엔가 제대로 마음을 기댈 곳을 찾는다면 이 상처를 핥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가 곪아터지고 비루먹어 볼품없는 꼬락서니가 된 비참한 떠돌이개를, 누군가 동정어린 시선으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을지언정, 누가 다가오려고나 할까. 누가 기꺼이 들여보내줄까. 스스로의 피와 삭막한 마음에서 흘러내린 고름으로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터럭을 누가 안아주고 싶어할까. 볼썽사나운 떠돌이 개에게 돌아오는 것은 손가락질과 돌팔매질뿐이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길도 잃고 주인도 잃어버린 유기견 역할. 꼴사납게 청승떠는 구남친 역할. 재수없이 마주친 불행 역할. 이야기 전개에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기용하는 꼴보기 싫은 악역 혹은 엑스트라 역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역할. 멋진 주인공의 손에 통쾌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보스 역할. 구원 없이, 이야기에 쓰이다 버려지는, 그저그런 장치 역할.
오늘 일정을 마치고 조금 있다가 집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을건데 다들 마니또 재밌게 즐기는 것 같아서 함박미소야! 다들 예상하는 마니또 적중하길 바라고 하늘이가 누구의 마니또인진 7시간 뒤를 기약하자구! 사실 예상하는 이들 많을 것 같긴 한데 암튼 잠깐 갱신이야! 안녕안넝! 다시 가볼게!
책상 위에 올라간 건 아마 폭죽. 그리고 빨간색 라이터. 도대체 학생이 이런 걸 왜 가지고 있는 거야. <…너 담배피니?> 얼굴 보면 뺨 잡고 늘리면서 물어봐야 하나. 근데 또 속눈썹 올리려 쓸 수도 있고, 친구 생일초 켜느라 쓴 거 넘겨준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단 편지 읽으려면 라이터 써야 하니까 필요는 했다. 그래도 실내에선 좀 그러니까, 옥상으로. 적당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종이 아래를 살살 그을리자 글씨가 나타났다. 조금 오래 대고 있어서 군데군데 구멍이 났지만, 읽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비밀편지의 내용. 사하가 웃었다. 엄청나게 경박스러운 웃음이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찔끔 났다. 손가락 끝으로 눈가를 훑고선 편지를 다시 읽는다. 레몬냄새 솔솔 나는데 내용은 살벌하다. 미처 정리 못한 잔웃음이 피실피실 샜다. 또 길기는 엄청 길다. <쓰느라 고생 좀 했겠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샜다. 그와중에 뒷면엔 농담이라고 써 있다. 이거 받고 화 낼까 봐 걱정 좀 했나. 이런 걸로 화 안 내는데. 아직도 웃겨서 계속 들여다보다가 쉬는 시간 끝나는 종이 울렸다. 그 소리에 편지 일곱 장을 두고 고민하던 마음이 안 쓰는 쪽으로 확 기운다. 행운이든 불행이든, 선물로 받았으니 전부 제가 갖기로 했다.
사하가 옥상 문을 열고 교실로 돌아가는 걸음을 뗐다. 그나저나 폭죽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폭죽 터뜨릴 수 있는 장소 찾으려면 얼마나 개고생을 해야 하는 줄 아니. 근처에 바닷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걸 어쩌나, 고민하다 이 정중하고 괘씸한 마니또를 잡아다 같이 보기로 마음 먹는다. 장소 결정도 머리 하나보단 둘이 낫겠지. 또, 혼자 보기엔 아까운 풍경이잖아. 계단을 내려가는 가벼운 걸음에 기대감이 섞였다. 즐거운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