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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란게 그런 것일까, 당신을 억지로 떼어놓은 주제에 아직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본다는 것은 분명 신의 조롱이었다. 버릇처럼 다가가서 괜찮은지, 무슨 일은 없는지 물어보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당신과 멀어지기로 한건 그녀 자신의 선택이었으니까, 그게 1년남짓한 기간만에 무너지는 것도 우습지만 꽤 볼거리는 되겠지. 말 그대로 희극이었다.
"조용하니까요. 학교에 이런 빈곳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그래도 다시금 진정된 것인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던 당신이 잠깐 되물었을까, 솔직하게 말해서 가장 궁금한 것이었지만 딱히 대답해주지 않아도, 얼버무려도, 무시하고 넘겨도 좋을 일이었다. 그 어떤쪽이든 자신은 그 대답을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천히 문쪽으로 다가가 조용히 닫고서 다시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을까? 가까워질 때마다 무의식적인 뒷걸음질이 쳐졌지만 그런데도 간격만큼은 딱 다섯걸음 정도로 일정했다. 당신쪽으로부터 비춰져오는 스포트라이트의 열기가 전해진듯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그녀의 얼굴이 살짝 발갛게 물들었을무렵, 커튼의 작은 틈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에 잠시 눈길을 주다가도 또다시 가까워져 이제는 두걸음밖에 남지 않은 거리에서 좀 더 환한 미소가 전해졌다.
"...괜한 걱정이니까요. 그런거,"
이제 한걸음, 행여 옆으로 빠져나가려고 해도 퇴로조차 사라져버린 가까운 거리에서 전해진 말은 지난 날의 만행을 상기시키듯 자신을 후벼파고도 남을,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스푼으로 아직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푸딩을 가차없이 뭉개버리는 것 같았다.
물론 둘 다 자신이 들고 있다는건 변하지 않았지만,
"......"
솔직히 기가 찼을까, 듣고나니 헛웃음이 나오는 그녀였다. 당신에게 했던 생각을 그대로 돌려받는, 하지만 무언가가 더 얹어진 기분이 들었다.
"뭐, 이렇게 마주치기 전까지는 행복했네요."
괴로운 부분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당신을 가까이함으로서 주변에서 전해지는 싸늘한 시선, 규율에 얽매인 이들의 질타, 당신을 만나고 있을 때는 더없이 행복했지만 무대 앞에선 관객들의 시선이 고기를 자르는 날붙이처럼 깊게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밀회는 짜릿했지만, 현실은 따가웠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오바다 얘! 손잡는건 그렇다쳐도 키스라고? 말도 안돼~" "쟤내 설마 '이거'아냐?" "쟤는 뭐가 좋다고 저런 음침한 애랑 어울려다닌대? 성격도 나쁜거 같은데." "알빠? 착하니까 그런 거겠지~"
'고정관념' 모두가 그것에 얽매여있었다.
"친구랑 애인의 구분은 확실히 해야하지 않겠어? 뭐? 여자애?" "왜, 결혼이라도 하게? 양이랑 양끼리 하는건 그렇다쳐도?" "댁의 따님이 어떤 여자아이하고 어울려다닌다던데, 사실입니까?"
"이젠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거짓말은 못하기에 돌려말했다. 사실은 그 어느 때도 행복하지 않았지만, 전보다도 더 작아진것 같은 당신의 모습은 그녀를 괴롭게 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좀처럼 눈을 맞추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면서도 시선만큼은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지금 어떤 몰골인지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은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평소보다 험악하고 아파 뵈는 꼴을 하고서도 아프다는 티를 내지 않는 게... 아랑의 가슴 속 일부분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미간과 눈썹 그리고 눈동자의 모양까지 엄격하게 굳어졌지만, 입술의 모양은 뾰로통해 결과적으로 하나도 무섭지 않은 깜찍한 낯짝이 문하를 빤하게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지.
" 너 지금 얼굴 엉망이거드은...? "
화내고 참견할 사이는 아니란 걸 알지만.
" 반창고랑 연고 정도로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으니까 병원 가야지. "
그치만 역시 걱정은 되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원래 내버려 둘 수 없는 쪽에서 먼저 손을 뻗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자기 자리로 자박자박 돌아가려다가 대답하기 위해 멈추어 섰다면, 아랑이 책상을 피해 걸어와 평소보다 아주 살짝 가까운 거리에 멈추어 섰을 것이다. 당신의 옷소매를 쥘 것처럼 손을 뻗었지만, 1cm을 남기고 허공을 쥐었다. 이윽고 뻗지 않은 손의 반창고 상자가 살짝 구겨졌다.
" 잡는 건 역시 싫지? "
옷자락을 질질 끌고서라도 양호실이든 병원이든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으, 짧게 앓는듯한 소리를 낸 아랑이 문하를 똑바로 바라봤다.
" 난 지금 네가 걱정이 되고, 이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은데, 네가 귀찮지 않을 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 좀 알려주지 않을래? “
무언가가 끓었다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결국 지금 내보일 수 있는 건 절제된 상냥함 정도겠지. 허공을 쥐었던 손도, 반창고 상자를 구겼던 손도 천천히 뒤로 보내 뒷짐을 진다. 문하를 보고 있던 시선도 천천히 내려간다.
“ ...부탁할게. ”
부탁이란 말을 하면서 빤하게 쳐다보면, 좀 부담스럽겠지. 그래서 내려간 시선이 걱정을 담고서 발치 부근을 맴돈다. ...당장 보이는 건 얼굴의 상처뿐이지만, 몸은... 몸도 다쳐있을 거 같은데. 역시 병원에 보내고 싶다...
하지만 저 애가 가진 제일 큰 상처는 얼굴의 상처도 아니고, 몸의 상처도 아니고, 마음이나 영혼 쪽의 상처일 거 같은데, 그건 진짜 어떡하지...? 그것은 의사 혼자 치료할 수 있는 영역의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른다 해서 저절로 회복되는 류의 것은.... 아닐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아주 어렵다.
문하주의 힌트는 잘 보았습니다... (받아먹음) (그러나 제대로 소화하진 못한듯하다) 새벽의 졸림취주와 점심의 배고픈 아랑주가 힘을 합쳐 써보아서 글이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머리 싸맴2)
반창고 범벅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요.... k- 사람이 문하 병원 보내야 해... 소리치고 있습니다... 8ㅁ8 왜 병원 안 가.... 글구 왜 통각 못 느끼는데요.... ㅇ<-< 너무 다치면 통각 못 느낌인가, 이거저거 무감각해진 편이라서 통각 못 느끼는 건가 모르겠다.. 흑흑
안녕하세요 여러분 배고픈 점심입니다... <:3 (꼬르륵) 모두 점심은 잘 먹었나요! 아랑주는 답레 먼저 올려놓고 좀 나중에 올게요~ 나중에 뵈요~
+금아랑 하나도 안 무섭게 생긴 엄격한 얼굴 픽크루... https://picrew.me/image_maker/186583 는 여기서 만들었습니다. (n번째 픽크루)
+수박씨는 좀 기다려달라... 8ㅁ8 (오늘내로 답레스 못 쓸수도 있을 거 같은 자의 몸부림)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아는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고 말했을 슬혜의 말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을 돌려준다. 누군가의 호의로 만들어진 공간이든, 그저 딱히 관심이 없어서 버려진 공간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두사람이 써먹기 좋으면 될 일이었으니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뒷걸음질을 치는 슬혜,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시아. 두사람은 그럼에도 서서히 가까워져갔다. 아니 시아가 슬혜가 가까워지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 괜한 걱정... 하긴 이젠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닐테니까.. 이런 걱정도 의미없는게 되어버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역시 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구. 나는 예전부터 널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
시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체, 얼굴이 조금 발갛게 물든 슬헤를 바라보며 상냥하게 대답한다. 괜한 걱정이지만, 너와 관련된 일이라면 걱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듯 한없이 덤덤하고 잔잔한 목소리였다. 자신의 행동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평가를 들어도 시아의 어조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수긍과 순응,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들은 마음 한켠에 쌓아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마음 속의 댐 안에.
" ... 마주치기 전까지는.... 행복했구나.. "
잔잔하던 호수에, 슬혜가 던진 말 한마디가 파문을 일으켰다. 슬혜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폭력을 당했을 때처럼, 천천히 떨려오는 손으로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가느다란 팔을 감싸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주 작게 ' 내가 미안해 ' 라는 서글픔이 담긴 말을 흘린다.
" ...1년이나 지났는데도 나는 너의 아픔이고, 너의 고통이고, 너의 치부인거네. "
가녀린 팔을 감싸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파르르 떨리던 고개가 한순간 축 쳐져 바닥을 향한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든 시아는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고통에 파르르 떨려오는 입술을 어떻게든 움직여 웃는 낯을 만들고,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면서도 눈을 곱게 휘어 웃어보이고 있었다. 고통을 쌓아둔 댐이 한순간 흔들리기 시작햇다.
" ... 어쩌면 이렇게 널 만났으니까,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1년이나 지났으니까..너도 나도 떨어져서 지내면서 쉬었으니까..그랬는데 역시 네 입으로 그런말을 들으니까 조금 아프네, 후후.. "
눈물이 새하얀 볼을 타고 흐르고 팔을 감싸쥔 손은 이미 힘을 너무 많이 주었는지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 ..날 만나서 행복하지 않아졌다면, '그날'처럼 날 때리면 조금이나마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
네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은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는 듯 슬헤를 바라보며 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울고 있는 시아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하곤 아이스크림을 가져온다. 아이스크림을 찾던 도중 뒤에서 슬혜의 목소리가 들린다. 밤을 넘기면 곤란하다며, 밥과 물을 두고 추궁했다는 것은 분명 고양이의 이야기겠지. 과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고양이를 키운다는 얘기를 들었었으니까. 너무 늦게까진 곤란할 것이다. 주원은 그것을 염두하도록 했다.
"되게 평가가 좋더라구. 웬만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파는 딸기치즈맛과 그렇게 다르지 않대."
하고 말하며 포장지를 뜯는다. 포장지 안의 아이스크림을 본 그녀의 표정은, 흡사 츄르를 보고 빨리 먹고 싶어하는 고양이의 표정과 비슷하게 보일 정도였다.
"제일 먼저 한 숟가락 먹는 영예를 누리도록 해주마. 자. 아~"
주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한 자신의 숟가락으로 떠 그녀의 입 근처까지 가지고 간다. 카레를 먹여줄 때보다도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아랑을 가만히 바라보던 문하는 손을 들어올려 얼굴에 얹었다. 그리고는 딱히 어디랄 것도 없이 얼굴을 매만져본다.
"...커팅이라도 났나 보네, 주먹에 스쳐서."
얼굴 어딘가에 상처라도 났나 찾아헤매는 듯한 손이었다. ...그래, 당연히 상처가 나 있었다. 거의 열 군데 가까이. 상처가 어디에 나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아무데나 짚어보는 손도 세 번에 한 번은 상처를 정확히 짚을 정도였다. 병원 가야지, 하고 걱정하는 아랑의 말에 문하는 나직이 반복했다.
"말 그대로 스친 상처야."
그 말대로다. 스친 상처들은 하루이틀이면 빨간 자국만 남고 일주일 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다. 멍자국도 일주일 뒤면 거의 눈에 안 띌 정도로 흐려지겠지. 겉보기만 요란할 뿐 그것들은 하잘것없는 생채기에 불과했다. 오늘 있었던 6회 18라운드의 로테이션 매치 내내 문하는 단 한 번의 클린히트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문하의 권투 스타일은 방어와 회피, 반격 위주의... 능력이 아까울 정도로 수비적인 스타일이었으니까. 문하가 그런 수비적인 스타일을 갖추도록 계기를 제공한 누군가가 예전에 있었다. 링 위에서 글러브에 살짝 긁혀 커팅만 나도 울면서 잔소리하고 멱살을 잡아가며 소독약이니 연고니 하는 것들을 부산스럽게 발라주던 누군가가.
그래서 그때는, 정말로 커팅 하나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노 데미지 플레이를 지향했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게 끝나버린 지금, 적어도 권투만큼은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하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마음놓고, 좀더 공격에 무게를 실었는데.
평소보다 몇 밀리미터 정도 더 가까운 간격에서 멈춰선 아랑을 바라보며, 문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생기없는 검은 눈동자를 아랑에게 그대로 둔 채로, 아랑의 눈높이와 자신의 머리높이가 비슷해질 때까지.
"상처가 어디어디 나 있는데."
아랑과 눈높이를 맞춘 문하는 가만히 말을 건넸다. 아랑이 동정심을 가능한 한 마음껏 베풀 수 있도록.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었다. 그녀는 변함없이 당신을 비꼬았고, 그런 당신은 변함없이 그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는 좀 익숙해질 때도 되었을텐데, 전혀 그러질 못하는가보다. 지난 1년간, 그녀는 학습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솔직해지지도 못했으며, 알기 쉽게 말하지도 못했고, 당신의 감정에 제대로 답하지도 못했으며, 뒤늦게 깨달은 그것조차도 희미했었다.
아무리 당신을 다시만나 잊고 있던 감정이 화한다 한들, 그것을 멋대로 내비칠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희미한 미소,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가 언제나 그래왔듯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노라 밝혀왔다. 과연 자신은 그런 걱정, 관심, 호의를 받을수 있는 존재인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제팔을 힘주어 감싸쥐는 것도, 파르르 떨면서도 눈물이 맺힌 채 웃고있는 것까지... 모든게 자신의 망상인것 같았다.
"아... ㄴ..."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수많은 젤로 속에서 목이 막혀 숨이 끊어졌으면, 할 정도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서글픔이 담긴 소리가 작게 퍼질 때도, 서로 쉴만큼 쉬었으니 이제 다시 돌아갈 때도 되지 않았냐는듯한 당신의 말에도 제대로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단지 당신이 팔을 감싸고 있는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주고 있다는 것에 시선이 갔고 지금이 행복하지 않다면 자신을 때려 감정을 풀어내서라도 행복해지라는 당신의 말에 그녀는 우선 꽉잡은 손을 떼어 다시 움츠러들지 못하도록 양 팔을 잡은채 벽쪽으로 밀치려 했다.
"제정신이에요? 저보고 똑같은 짓을 또 하라구요?"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두번다시 저지르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억지로라도 떼어놓기 위해서 손을 들었던 것이기에, 그럼에도 그때의 자신이 느꼈던 희열감이 지금 떠올리면 너무나도 역겨웠기에...
이번에는 그녀가 당신에게 가까워진 형태가 되었을까? 약간의 거리감에도 여전히 닿아있는 몸, 그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보이는 시야는 확실하게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얼굴로만 나타나지 않을뿐, 평소같지 않은 불규칙적인 심장박동과 가다듬어지지 않은 숨결이 닿을 정도로 맞닿은 상황에서 그녀는 한참동안 그렇게 당신을 몰아세우다가 힘이 풀린듯 자조섞인 한숨을 흘려냈다.
"...진심인가요?"
짓이겨버린 푸딩을 입에 대충 털어넣은듯, 이미 굳어버린 설탕시럽이 날카롭게 벼려져 입속을 찌르는듯한 착각 속에서도 그녀는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멍청하게... 잊어버리라고 으름장을 놓은 사람에게 정말 끝까지... 그렇게 바보같이 걱정하는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멋대로 세운 신념에 차츰차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또 다시 그런 일을 저지를까 두려운 마음에 세운 벽인데도, 당신의 말 한마디에 보기좋게 커다란 구멍이 나버렸다. 쐐기처럼 박혀드는 지극히 이타적인 당신의 말과 행동이
지난날, 슬혜에게 당했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과 슬혜만이 안고 가야할 일이었으니까. 슬혜에게는 어쩌면 앞날을 막을지도 모를 치부일지도 모르는 그 일을 떠들고 다닐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다 슬혜의 앞에 방해물이 되어버린다면, 그 고통을 시아는 견뎌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마음에 그것을 품은 체, 1년이 넘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일주일 정도 집에서 그저 아프다고 둘러대며 쉬기는 했지만, 몸을 추스르고 슬혜가 없는 일상으로 돌아와 여태까지 살아왔다. 잊은 듯, 잊지 않은 듯 지내왔던 그 시간들은 슬혜를 만나자 마자 무너져내렸고,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릴 때가 찾아왔다는 것처럼 시아의 감각을 일깨웠다.
" 응? "
한순간 입술이 달싹이며 소리를 내는 슬혜를 바라보며 시아는 여전히 미소를 머그믄 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바라보았다. 편하게 말을 해도 좋다는 듯, 자신을 탓하는 말도, 비난하는 말도, 헐뜯는 말도 상관없다는 듯 차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말을 하는 시아 역시도 용기가 필요했다. 애초에 시아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망부석도, 흘러가는 물도 아니었다. 그녀 역시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녀가 애정을 품었던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아무렇지 않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애정을 품었다면 그런 것까지 감싸안아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용기를 낸다. 두려움에 떨려오는 팔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손이 새하얗게 변하도록 감싸쥔 체로.
" 읏.. "
그러다 슬혜가 자신의 양팔을 잡곤 벽쪽으로 밀쳐오자 벽과 부딪치면서 작은 소리를 낸 시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곤 바라본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놀란 표정을 지우곤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 ... 그래서 슬혜가 편해질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난 괜찮아. 응, 나는 그렇다면 받아줄 수 있어. "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몸을 맞닿은 체 거친 숨을 내쉬는 슬혜에게 상냥하게 대답을 돌려준다. 단 한번도 너와 마주하고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 그렇게 말하는 듯, 눈을 마주하고 있는 시아의 눈은 흔들리지 않고, 물기를 머금은 체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 울고 있는,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은 그 모순된 광경을 보여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보였다.
" 왜 없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사람을 그렇게 멍청하다고, 잊어버리라고 욕하고 으름장을 놓는 사람도 있다면.. 이렇게 그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법이잖아? "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를 쓰는 슬혜를 바라보며 곱게 눈을 접어보인 시아가 천천히 손을 뻗어 예전의 두사람으로 돌아간 것처럼 천천히 뺨으로 손을 가져간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내려앉은 손을 움직여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상냥하게 대답을 돌려준다.
" 나에게 '현슬혜'는 몇년 전부터 그런 존재였어. 네가 나와 사귀는 것을 모두에게 감추고 다닐 때에도, 그걸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는 동안 느껴지는 슬픔과 서운함을 감당하고 품을 때도, 그러면서도 너와 만나서 시간을 보낼 때면 이세상 모든 것을 잊고 너만 보였던 그 황홀함도, 네게 버림 받으면서 온갖 욕을 듣고, 네 자그마한 손에 맞아 상처가 날 때 느껴지는 고통도 결국은 네가 소중해서 그 모든 감정들도 소중했어. "
또르르, 투명한 눈물 몇방울이 흘러내린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여 슬혜를 바라보던 시아는 길었던 말을 끊고는 잠시 숨을 고른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천천히 내뱉는 달콤한 숨결이 흔들리는 것은 분명 그녀 역시도 감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 같아 보였다.
" 그 모든 걸 소중하게 여길 정도로 넌 내게 엄청나게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네게 나는 어떤 존재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존재가 아니리도 모르지만.. 너와 남들 몰래 사귈 때에도, 비참하게 헤어질 때에도, 지금도 그건 변하지 않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