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 펠리체의 등을 쓸어내리려 하며 말했습니다. 그는 할미탈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할미탈은 그런 모습에 속으로 욕을 내뱉었습니다. 지금내가누구때문에이고생을하는데 ' ..... '
그는 지팡이를 휘둘러, 당신들에게 디터니 원액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이노리의 분노를 전부 들었습니다.
' 아쉽게도 주인님은 너희가 우리 중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예상을 못하신 모양이야. 우리도 마찬가지지. 특히, 이매는 주인님이 특별히 아끼시던 녀석이거든. '
조용히, 낮게 말하던 할미탈은 자신의 머리에 꽂힌 지팡이를 빼냈습니다. 공격할 용도는 아닙니다. 그는 다시금 자신의 머리를 틀어 올려 묶었습니다.
' 주인님은, 타인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시거든. 쓸모가 있는 상태에서 죽어버리면, 그것에 분노를 느끼시니까 그 분 입장에서는 이게 벌주기 같은 거겠지. 쓸모 있는 도구가 죽었으니까. 너도 알겠지만, 각시의 애완동물은 인간을 먹고 우리는 너희를 죽일 수 없으니까. 주인님 다운 발상이지. '
주인님 다운 발상, 할미탈이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 지금은 무슨 생각이신지 나도 모르겠네. 그저, 이 상황을 하나의 유희로 즐기실지도. 애초에 우리도 왜 이 학원을 골랐는지 모르니까. 아무 의미 없이 골랐는지도 모르고. '
할미탈은 거기까지 말하곤 한숨을 작게 내쉬었습니다.
' 그리고 난, 동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
레오를 동물로 인식한 모양입니다.
' 나도 이 학원 학생들은 제법 마음에 드는데 말이지. 한 번 뿐이지만,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고. '
점술 수업을 떠올린 듯 할미탈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탈을 똑바로 썼습니다.
' 나름 나도 구한다고 구했는데 전부 구하지는 못했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나마, 각시가 나머지 한 마리도 데리고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되도록이면, 내 쪽에서 너희들을 치지 못하게 막기는 해보지. '
정말로 미안한 건지,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습니다. 할미탈도 사라졌습니다. 조용할 뿐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절반을 날렸어요..... 대강 이 정도면., 나름 했다고 생각합니다......(우럭)
한서는 이로하를 기숙사 방에 데려다두고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 옆에 뒀다. 반지는 팔찌와 얇은 은 사슬로 결속 됐는데, 이대로 디터니 원액을 바르면 은이 닿아 상처가 곪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팔찌까지 모조리 빼고나서야 한서는 이로하의 목에 디터니 원액을 바르고 주변의 피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아무리 학교 차원에서 학생을 보호한다고 해도 목에 섹튬셈프라를 쓸 줄은 몰랐다. 분명 아팠겠지! 웃는 모습으로 우는 소리를 낼 때는 몰랐는데,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던 것 같다. 그때는 가주님이 재갈을 채웠다. 혀를 깨물었다고 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을 따라 엉거주춤 비웃기만 했는데 이젠 아니다. 지켜야 할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한서는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아무 일도 없게 해달라는 기도를 끝마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오느라 손에 늘 휘감고 다니던 독특한 형태의 반지를 놓고 나온 것도 몰랐다. 한서가 팔찌와 반지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건 기숙사 방에 돌아온 직후였지만, 이로하가 회복되면 알아서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하지만 팔찌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 버린건 아닐까 싶어서 쓰레기통 주변을 살폈는데도 없었다. 한서는 초조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 했던 거라 그만의 부적이었다. 나쁜 것에서 지켜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잘때도 몸에 떼놓지 않았던 것인데! 결국 한서는 패밀리어를 쓰기로 했다. 마침 패밀리어는 물 한사발을 싹 비우고 기분 좋게 발라당 누워있었다. 한서와 눈을 마주치자 슬슬 시선을 피할 정도로 아주 영민하다. 한서는 패밀리어의 이름을 불렀다. "보리야, 이보리."
패밀리어는 이름을 듣자마자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예감하고 싫다는듯 몸을 이리 틀고 저리 틀어대며 반항했다. 군데군데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는 걸 들어보니 확실히 싫은 것 같다. 하지만 한서가 품속에서 커다란 간식을 꺼내자 좋아서 펄쩍 뛰었다. "네가 로하의 기숙사 방에서 내 팔찌를 찾아오면 이걸 줄게. 다녀와. 알겠지? 들키면 안 돼." 하고 당부했다. 들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에는 도둑으로 몰릴지도 모른다. 내 물건을 찾으러 갔다가 정학이나 퇴학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야, 인마. 이보리. 누가 이런거 물어오래. 응?"
그런데 왜 이렇게 됐지? 한서는 패밀리어의 코에 딱밤을 놓았다. 패밀리어는 불만스럽게 우우 울었다. 다시 돌려놓으라 하기엔 시간이 늦었다. 내일 아침에 몰래 가져다두는 수밖에 없겠다. 한서는 패밀리어를 노려봤다. 하지만 개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에휴, 뭐라도 가져왔다는게 다행이긴 한데."
한서는 약속했던 간식을 입에 물려주며 노트를 손에 쥐었다. 이 안을 절대 열어봐서는 안 될것 같았다. 하지만 이 안에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한서는 한참 고민하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노트를 펼쳤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한서는 최근 순혈주의 사상에서 머글과 혼혈을 위하는 개혁파의 편에 서게 됐다. 하지만 그 이유가 속죄와 살해의 위협 때문이었는데,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그날 기숙사로 돌아와 잠들었다 깨니 뺨에 피가 묻어있던 것도 그렇고, 이로하가 한서를 때렸던 날,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것은 지웠지만 오블리비아테를 썼다는 기억만은 생생하게 남겼던 것도 있다. 그 의문이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용은 예상과 달랐는데, 이것저것을 잡다하게 적어둔 노트였다.
"닭죽이 나왔다. 맛있었다.. 고양이랑 친해졌다, 노마지 친구가 자기한텐 하악질을 하더니 나는 인간 캣닢이라며 이를 갈았다..뭐야, 안심해도 되겠네. 그냥 내일 가져다 둬야. 이건?"
─ 6월 25일, 수업 출석. 어둠의 마법 방어술 - 에반스 그린폴드 크루시아투스 저주의 역마법을 구상중이다. 시전학 전 미리 통각 자체를 차단하는 방향으로 개발하면 될 것 같다. 이론이 들어맞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 마법의 역마법을 개발하면 내 통각이 돌아올 지도 모른다. 마법의 비약적인 발전은 동기라는 이름의 연쇄적인 연결고리가 있기에 이루어진다. 여담이지만 도련님을 때렸다. 그때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노리는 화를 내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려도 참지 않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한서는 한장 뒤로 넘겼다.
─ 금지된 숲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문카프를 관찰하고 싶었지만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또 네 잘못이 아니라는 중얼거림이 들려서 쑥을 피웠다. 고모님은 아무것도 모른다. 알면 또 재갈을 물려서 다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 덕분에 친구가 생겼다. 가끔은 이런 상황도 도움이 되는 법이다. 후부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날이다. 하지만 내 모습을 보면 경멸하겠지. 나는 누군가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시 한장.
─ 세스트럴을 보여주었다. 과연 그 존재가 부단히 노력하여 보이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누군가 죽는 걸 봤다는건 좋은 일이 아니니 함구하기로 했다. 가족의 언급을 할 줄 몰랐다. 순수한 무지는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또 한장.
─ 백정, 홍마노, 탈로 추정된다. 한서에게 당한 상처를 치료해줌. 주인이라는 언행을 하였음, 단죄를 자처함, 이노리를 닮았음. 무지한 것으로 추정됨. 사탕은 왜 입으로 넘겨주는 거지? 비밀을 유지해주는 대가로 당과점에 가서 케이크 한판, 사탕과 젤리를 사줬다. 이정도면 좋은 거래다. 혜향 교수의 패밀리어로 추정. 나중에 만나면 떠봐야하나?
─ 교수가 탈이 맞았으니 패밀리어는 백정이 맞다. 읽었던 책에서 나온 배신자가 교수가 맞았다. 죽여서는 안 된다. 원내의 흉흉한 사건이나 시선으로 보아 이 교수는 위협을 받을 것이 뻔하다. 지켜야 한다. 조만간 계약을 청해야겠다. 거절한다면 거절할 수 없게 만들면 된다. 나는 졸업해서 후부키로 돌아가야 한다.
대체 왜 후부키에 이렇게 집착하는 거지? 한서는 다음장을 넘겼다.
─ 택영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미안해진다. 나를 보면 경멸할게 뻔하다. 속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쌓아온 신뢰가 무너지겠지. 괜찮다. 감내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이리 남에게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평생 이노리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니, 나는 이미 이노리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노리가 되기로 맹세하지 않았나. 여담. 문카프도 후부키의 친화력이 통하는 날임을 깨달음.
문카프가 원내를 뛰어다녔다는데 로하의 짓이었구나 싶어 뒤로 넘긴다.
─ 즐거우면 됐다.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사상을 접해도 그 사람의 선택이다. 파멸할 길을 걷는다면 단 한번 막아서주고 그래도 간다 하면 작별을 고하는게 당연하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라. 날 경멸해도 상관 없다. 죄인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덕분에 들개를 길들였다. 한서가 졸업 이후 온건파를 모조리 몰살하면 관심이 돌아갈 것이다. 그 틈을 타 나는 후부키로 돌아가면 된다. 나는 이씨 가문에 있으면 해만 될 뿐이다.
또 한장. 홀린듯이 한서의 눈과 손이 바삐 움직였다.
─ 위험하다. 원내의 초빙교수로 탈이 들어왔다. 이런 기본적인 위협조차 지키지 못한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하루 빨리 기숙사 점수를 올려서 외박을 신청해야한다. 이대로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끝날게 뻔하다. 그 새끼를 찾아야 한다. 찾으면 이노리..나? 모르겠다. 찾아서 뭘 어떻게 해야하지? 죽여야 하나? 하지만 그 사람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 발렌타인은 아직도 연락이 없다. 아무래도 시체로 발견된 건 아닌 것 같다. 살아있다면 끝까지 찾아낼 것이다.
아! 그때 점성술 교수가 초빙 교수라고 했는데. 설마. 한서는 다시 뒤로 넘겼다.
─ 내기를 좋아하는 후배. 연인이 있다. 기필코 찾아서 간식을 배불리 먹여줄 것이다. 많은 것을 배웠다. 서로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 안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지만 아이를 아끼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이를 아끼는 것은 이노리에 국한된 것이라 내가 아니니, 이노리의 모습으로나마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너를 아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너는 이미 져버린 꽃이다. 나는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
그리워 하는 건가? 다시 한장. 이번 장은 휘갈겨 썼다. 일기같지 않고 추측만 난무하는 글에 한서는 아찔함을 느꼈다. 대체 뭘 이렇게 많이 써둔 걸까? 해서는 안 되는 일임에도 계속 한글자씩 읽게 됐다.
─ 윤현성. 현궁의 수치. 사감을 공격 ->아바다 케다브라까지 서슴지 않음. ─ 원내에 탈이 넷? 백정(패밀리어), 중(혜향 교수, 아군?), 윤의 패밀리어, 저번에 출입한 할미탈. 이번에도 계속 온다면 확정. ─ 윤의 패밀리어로 변신하고 있던 크루시오를 맞았음. 고통이 느껴져서 이후 섹튬셈프라로 실험한 결과 여전함. 크루시오에 국한된 것으로 추정. 역마법을 개발해서 빨리 내 통증을 되찾아야 함.
"말도 안 돼...그때 섹튬셈프라를 목에 썼던 이유가 고작 통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한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다시 내용에 집중한다. 왜 통증을 되찾으려 하는걸까 하는 의문을 뒤로 한다. 지금은 내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 대치 끝, 이매의 자살. -> 시체가 환히 웃었던걸 보니 본인이 행복할 선택을 한 것 같음. 좋은 일, 본받을 것. 사인은 경추 골절로 인한 즉사로 추정. 목을 잡아 뜯던 순간 골절된 것일 가능성 높음. 과다출혈 가능성 없음. 주양의 기도 이후로 자살, 신? 무슨 사이? 신관? ─ 매구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원내를 공격하는가? -> 백정을 원내에 들여보낸 이유는? 중에 대한 것을 모르나? 알고도 받아준 것인가? 어느쪽이든 석연치 않음. 원내에 무언가 있거나 불만이 있는 것이 분명함.
신관이니 뭐니 하는 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저 읽으면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윤 -> 의심. 지금까지 들어온 소문과 본것을 종합하면 탈끼리의 사이는 그렇게 좋지 않음. 당장 이매라고 불렸던 윤의 패밀리어와 현성만 봐도 서로 친해보이진 않았음 그런데 왜 집착하는 거지? 양반이라 불렸다는 탈도 윤에게서 손 떼라는 말을 했다고 학생 사이에서 말이 나돔. 수상함. 그때 현성의 공격에 윤도 괴로워 했다고 말했음. -> 내가 모습이 변했을 때 임페리오에 맞았는데도 사감은 전부 신경 X? 탈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건 맞는 것 같지만 사감까지 불신할 정도의 인물? 아니면 상황이 상황이었나? 윤조차 탈이라면 원내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내부자가 가장 깊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죽거나 죽이는 건 누군가의 선택이라 넘겨야 하지만 내 행복도 위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윤과 탈이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한서는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쭉 빼들어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기숙사 방 안이라 누군가에게 들킬 상황은 아니지만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비밀을 알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사실 누구나 이런 의심은 가지고 있었다. 지난번에 윤이 현성이 공격받자 같이 고통스러워 했다는 것도 그렇고, 이상한 소문도 낟돌았다. 학생이 이렇게 의심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 이로하마저 이렇게 의심을 한다는 건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한서가 아는 이로하는 늘 덤덤하고 차분하면서, 의심 한치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서는 마법으로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 두렵다. 나는 언제까지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걸까. 이대로라면 죽을 지도 모른다. 새삼 후부키로 돌아가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 차라리 죽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까봐 두렵다. 더이상 네가 없는 삶은 의미가 없는걸 불현듯 깨닫기도 했다. 내가 후부키로 돌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내가 네 삶을 살고 있는데 내가 돌아가서 내 삶을 제대로 살 수나 있을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네 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어야 했는데… 아니다. 그랬다간 너도 나와 같이 수백번의 선행을 하더라도 한번의 악행이 평생이 남을 것이다. 너는 여린 사람이니 내가 대신 이 죄의 값을 다 이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악인이 되는게 좋겠다. 미안해, 이노리. 내가 이런 사람이라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우리가 행복하려면, 자연보다 더 잔인한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 뿐이야. 내가 여기서 강하게 살아남을게. 그리고 그새끼를 꼭 찾아서 네 복수를 해줄게. 금지된 마법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반드시 복수할게.
한서는 마른 침을 삼키며 다음 장을 넘겼다. 노트가 손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한서는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는 공포에 젖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 이걸 찾는다면 다 읽으신 것이 분명하지요. 함구하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제 눈에 띄지 마십시오.
반절 남은 자리를 파내고 그 속에 팔찌와 반지가 담겨있다. 패밀리어의 모습이던 이로하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뒤에서 한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같은 기숙사의, 한학년 위의 학생 대표가 내지르는 노호에 단태는 슬몃 눈썹을 찡그렸다. 미약하게 남아있는 두통 때문이었다. 낮게 신음을 삼키고 있다가 들려오는 연인의 말에 슬그머니 입가를 당겨서 히죽 웃었다.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괜찮아."
할미탈이 전달하는 디터니 원액을 보던 단태의 눈동자가 샐쭉 가늘어지고 이내 머리를 기대고 슬슬 문지를 뿐이었다. "컨디션이 좀 안좋을 뿐이니까." 경계하는 것처럼 주위를 맴도는 검은 표범이 레오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할미탈의 대답을 듣던 단태는 자신의 품에서 주양을 놓아주고난 뒤에 다시 눈과 눈 사이를 손으로 눌렀다.
할미탈이 사라지고, 원내는 조용해졌다.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단태는 숲 안쪽에서 스멀스멀 풍겨오는 피냄새에 그저 시선을 줬다가 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복수. 참 좋은 어감이다. 비록 이렇게 사소한 것이 될지라도 이후 그 어떤 방법으로든 복수를 받는다면 기분이 더더욱 아찔해지기 마련이니까.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아찔함을 한껏 만끽하기 위함이라면. 그 어떤 복수라도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주양의 입꼬리가 슥 올라가고, 한껏 오만해진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았다.
"좋아요~ 어떤 방법으로 복수해도 좋아. 내가 예상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방법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기대할게요?"
물론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해도 당신이 떠올리고 있는 돈쭐내주겠다는 생각을 예상하지는 못한 상태였으니. 만약 그 사실을 안다면 분명 크게 웃어재끼고 말 것이었다. 괜히 쓸데없이 분위기를 잡고 이야기하는 버릇은 여전해 주양에게 조금의 뻔뻔함마저 얹어주고 있었다.
"어색하지 않다니 다행이예요~ 아직은 조금, 저한테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다 보니 영 어색해보이면 어쩌나 했거든요! .. 어머나?"
자신의 소소한 걱정을 조금이나마 털어놓고서, 당신이 내미는 새끼손가락을 잠깐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주양은 이윽고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이렇게까지 하니 더더욱 동생같다는 느낌이 커지려고 하고 있었다. 분명 선배인데 말이지. 웃음을 가라앉히고 손가락을 걸며 약속이라고 말하고는 가볍게 눈을 찡긋였다.
"만약 또 병을 엎으면? 그때는 탈주한 감초사탕들이 몰려다니면서복수하고 다닐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꼭 다 드시는거예요~?"
정말 그렇다고 한들 어찌 되었든 사탕일 뿐이니까 눈에 보이는 족족 부숴버리거나 마법으로 녹이면 그만일테니 그저 시덥잖은 농담에 불과한 말일 뿐이었다. 방싯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건 손을 살살 위아래로 흔들고는 풀어주었다.
"아무튼 이제 슬슬 각자 갈 길을 갈 시간이네요~ 저는 라온에서 조금 더 시간을 떼우다가 갈 생각이니까, 기숙사로 가신다면 병 안 깨도록 꼭 조심하세요!"
/막레 가져왔어! 감초빌런 잉이 너무 귀엽구.. 진짜 뭔가 애기애기함 물씬 풍겨서 좋았다! :D 상냥하다니 그것은 과찬..! (숨음) 일상 수고 많았어~~!!
할미탈이 사라진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원내는 금이 가기 직전의 찻잔처럼 평화롭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바뀐다. 타인의 희생에 애도하는 학생도, 분노하는 학생도 있다. 희생자와 만나보지도 못한 학생이면서도 꽃을 헌화하며 훌쩍이거나 아예 목놓아 울기도 했다. 너는 복도를 지나치는데 마련된 추모공간에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늘 그렇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행동하는 부류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다. 할미탈이 사라지자 디터니 원액을 쥐고 저 멀리 던져버리고는 미안하다 사과하며 자리를 박차 떠났다. 그 당시에는 무슨 말을 들어도 심성이 배배 꼬여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빌었다. 하지만 사과를 들으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누군가 죽었는데 도구라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봤다. 너도 한서를 도구로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꼬인 걸까? 할미탈의 말은 꼭 내 주인이 이런 사람이니 불쌍하게 봐달라는 것 같았다. 너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 있는 피해자들은 같잖은 동정 따위를 줄 사람이 아닌데 굳이 그런 말을 했어야 하나 싶다. 너는 그날 감초사탕을 반병이나 비웠고, 오늘은 속도를 높여 금지된 숲 입구를 향해 뛰었다.
매끈한 복도를 지나면 돌과 흙길이 있고, 흙길을 지나면 잡초가 밟힌다. 금지된 숲 근처는 벌써부터 여러 신비한 생물이 우는 소리로 가득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죽었던 장소인데 을씨년스럽긴 커녕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입구에 도착한 너는 지팡이를 꺼낸다. 날카로운 면으로 대뜸 손바닥을 그어 피를 내자 세스트럴이 느릿느릿 걸어나온다. 이제 네 냄새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너는 세스트럴이 상처를 혀로 핥아주자 목을 끌어안는다. 그대로 가만히, 한참을 서있는다.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돌아갈 수 없어. 어떻게 해야할까."
갈기에 고개를 파묻고 몸을 잘게 떤다. 누가 나타나도 너는 가만히 있을 것이다. 고장나고 굳어버린 인형처럼 가만히.
그 날, 숲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혈향은 구역질을 하는 내내 그녀를 괴롭혔다. 괜찮다고 쓸어주는 손길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겨우 숨을 돌리고 기숙사로 돌아왔을 적에도 그녀의 주변에서 향이 가시지 않아 피부가 부르트도록 씻어도 소용이 없어 결국 약에 손댔다. 집에서 보내준 그 약은 잠드는 것 하나에는 특효였다. 그렇게 약에 의지해 사흘을 보냈다.
참혹한 그 날로부터 달이 세번 뜨고 세번 진 후 맞이한 아침에, 그녀는 그 전까지 앓았던게 허무할만치 초연해졌다.
그 전에 있었던 일들에 괴로워했던게 거짓말처럼.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핑계로 수업도 빼먹은 그녀는 낮부터 별궁 구석방에 처박혔다. 뭐, 아픈게 아주 핑계는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피라도 한사발 쏟은 것처럼 안색이 희었고 몸뚱이 역시 옷깃 사이로 붕대가 보였으니까. 붕대는 한쪽 어깨와 가슴팍을 감싸고 있었다. 별다른 습격도 없었는데 왜 그런 꼴을 하고 있는지는, 그녀만이 알고 있을 일이었지.
"......"
누구도 쉬이 찾지 않을 구석의 구석진 방에서 그저 누워만 있던 그녀는 낮잠이라도 잘려는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별궁에 올 적에 걸치고 있던 얇은 겉옷을 담요 삼아 덮고서 무방비하게 늘어져, 눈을 감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금방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다. 그렇게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