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는 어깨를 으쓱하곤 뒤를 돌았다. 여기 더 있어봐야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으니 둘이 알아서 상황을 잘 해결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뒤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아야하니까. 정말 가고싶지 않았는지 느린 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던 레오는 대판 싸우고있는 모습을 보곤 머리를 쓸어넘기며 후- 하고 한숨을 쉬곤 그 자리에 털퍽 하고 앉았다.
" 그러니까.. 저걸 도와줘야한다는건데.. 그러면서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라면은.. "
일단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떠오르는 방법이라면 몇 가지 있다. 우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프로테고를 쳐서 우리를 가둬버려 각시에게 공격이 가지 못하게 하는 방법. 네뷸러스를 펼쳐서 우리를 숨긴다는 명목으로 시야를 가려 공격을 막는 방법. 마지막으로 가장 심플하게 표범으로 변해서 달려드는척을 하며 공격을 대신 맞아버리는 방법. 레오는 으으.. 으으으.. 하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머리아프다.
" 이것도 저것도 뭔가 좀 그렇단.. 말이지... 안하고싶지만서도.. 하지만 버니의 명령인걸..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아니면.. "
레오는 그냥 다 쳐죽여버릴까, 하는 말까지 뱉어냈다. 그리곤 마음을 잡았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없으니, 일단 여기서 변신부터. 레오는 옷을 가지런히 정리해 내려놓고 이제는 익숙하게 검은 표범으로 변했다. 달려들어서 한 두대 정도 대신 맞아주면 적어도 의심할 틈은 없겠지. 게다가 이 몸이라면 몇 대 맞더라도 견딜 수 있다. 좋아. 가자.
어두운 숲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표범은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 으르릉 하고 몸을 낮췄다. 타이밍이 제일 중요하다. 아무리 그래도 직격으로 맞으면 견디지 못할수도 있으니 살짝 흘려맞는다는 느낌이라던가, 궤적을 바꾼다는 느낌으로. 몸을 낮추고 학원의 사람들과 각시탈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마법이 캐스팅되는 순간에 눈을 번쩍뜨고 지금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날아올랐다.
황홀함에서 벗어난 주양은 역으로 자신이 제 연인에게 안겨있는 꼴을 보고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상황 파악은 금방 끝났다. 중간에 갑자기 기억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땐 여전히 그 장소였으나 자신의 자세만 바뀌었을 뿐이다. 중간에 기억을 잃을 이유는 역시. 입술을 슬쩍 물어뜯으며, 제 연인의 품 속에서 몸을 꼼지락거렸다.
".. 우리 여보. 내가 여보에게 큰 실수를 범한 것 같은데-"
다음에도 또 내가 조종당하게 된다면 그땐 그 어떤 공격이라도 가해줘. 그렇게 말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자신의 내기 친구가 될지도 모를 선배에게 크루시오가 향하는걸 보며 표정이 살짝 굳었다. 기어코 그렇게, 내 주변 사람들만 근드리겠다는 말이지.
"내 공격때문은 아니지만~ 아까 쿨찐인 척 할때보다 훨씬 볼만한 표정인데! 어때. 아까전보다 훨씬 재밌지~?"
분노로 이글거리는 각시탈의 눈빛을 보면서도 경박스럽게 웃음을 터트리고야 마는 것이었다. 역시 이런 시비와 도발이 없으면 이젠 자기 자신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지팡이를 바로잡아, 다시 각시탈에게 겨누었다.
기껏 마음먹고 손을 휘둘렀는데도 윤은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휘청이는 그의 몸을 받쳐 안으며 그녀는 초조함에 재차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힘조절을 했어도 그정도면 정신 차리기에 충분했을텐데. 뭔가, 뭔가 다른 걸 해야 하는 건가? 잇새로 뭉개지는 입술에서 새빨간 피가 번진다. 창백한 얼굴에 유일하게 색을 띈 입술은 어색하기만 하다.
"......"
애꿎은 입술만 괴롭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론 안 된다. 생각, 생각하자. 전에 같은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그가 어떻게 해서 그녀를 막아줬었지? 소리를 들은 직후에 손으로 귀를 막아줬었다. 하지만 그건 들은 직후였지 지금처럼 이미 홀린 후가 아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어찌어찌 기억을 더듬던 그녀가 떠올린 그 날에 고개를 확 들었다. 설마 그게 통할까 싶은 의구심이 먼저 들었지만 지금은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때리기까지 했는데 그 정도를 못 할까. 좀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숨을 한번 쉬곤 얼마 안 되는 키차이를 좁히려 발꿈치를 들었다. 윤이 넘어지지 않게 꼭 끌어안으면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친다.
얄량한 세 치 혀로 도발이 먹혀든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늘 좋은 결과로 돌아오는 법은 아니다. 상대는 금지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두번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주문 뒤로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저번처럼 울부짖으며 가족을 찾거나 살려달라 빌지 않았다. 모습이 바뀌지도 않았다. 사람은 위기의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곤 한다. 다행히 오늘은 행운이 따르는 날이다.
바닥을 구르는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동안 고통 때문에 몸을 벌벌 떨고 중심을 잃을 뻔 하다가도, 너는 기어이 우뚝 섰다. 가면을 써서 다행이었다. 그 고통을 견디는 시간동안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손톱은 주먹을 파고들었고, 희게 쥔 손에서도 피가 떨어졌다. 너는 그 상황에서도 욕 한번 하지 않는 독한 녀석인 것이다. 그렇지만 충격은 있는지 숨을 몇번 씨근덕댔다.
너는 심호흡을 몇번 하고 평소의 모습을 되찾는다. 이죽이는 모습에 맞장구를 치듯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웃어주며 뒤로 빠르게 물러난다. "이번엔 친구로 안 끝나요?" 하고 도발하면 어떻게 될지 알려주듯 고개를 기울인다. 만약 저 여자가 죽는다면 친구에게 친히 부탁해 이매의 곁으로 보내달라 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묘비에 우리 둘은 평생을 사랑했다 적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누굴 닮아 이런 흉수만 두는 지, 아마 네 친구일 것이다.
"함부로 학생 건드리지 마요? 리덕토."
너는 다시금 리덕토를 날린다. 이번엔 정확하게, 배를 향해서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생각하는 것이, 다음에는 오블리비아테가 좋겠다는 것이다. 어째서냐면 네가 그 마법이 주특기이기도 하지만, 소중한 걸 잃게 해준다는 말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중한 것. 매구에 대한 추억을 죄다 불살라 없애버리면 과연 저 사람은 어떻게 될까?
레오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기껏 들키지않고 의심없이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일단 레오는 분하다는듯 으르렁대고 이빨을 드러냈다. 다시 몸을 추스리곤 상황을 지켜보았다. 프로테고, 네뷸러스. 좋은 방법들이 있었지만 굳이 몸을 던진 이유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이 몸은 어느정도 구른다고 한들 픽 쓰러져버리지 않으니까.
자, 다시 해보자. 레오는 몸을 낮추고 으르렁 하고 낮은 초저주파를 흘렸다. 몸을 던져 우리쪽이 쏘는 마법을 대신 맞아 마법의 궤적을 틀어냄과 동시에 각시탈이 마법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시야를 가려서 우리쪽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면 이거니까.
통증으로 인해 지끈거리며 뇌를 헤집는 정도로 지독하던 두통은 되려 감각 너머로 사라져버려서, 단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주양의 말에 대답을 꽤 오래도록 고민했다. "내가 너를?" 말도 안되는 소리. 각시탈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저런 소리를 하는 입을 막아버렸을텐데. 치켜올렸던 눈썹을 내리고 단태가 느릿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사람을 구할 생각따위 안하고 있다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이 못되거든. 샐쭉- 가늘게 뜬 암적색 눈동자에 검은 표범이 끼어드는 모습과 자신과 같은 기숙사의, 한학년 위의 대표가 크루시오를 맞는 모습. 그리고 기린궁의 여학생에게 주문을 쏘는 각시탈의 모습이 한꺼번에 담겼다.
"프로테고 막시마."
단태는 아직 자신의 품에서 주양을 놓아주지 않고, 아니 되려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흐르는 식은땀에 호흡을 가다듬고 주문을 외웠다.
붉어지는 윤의 얼굴을 보며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길게 고민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게 맞는 방법이라 다행이야. 아직 상황이 끝난게 아님에도 그저 그가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만으로 옅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선배가 가르쳐준 대로 했을 뿐인걸요. 저번에, 이렇게 해줬잖아요."
수척한 얼굴에 미소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기뻤으니까. 그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이 이상의 일은 없으면 좋으련만.
깊디 깊은 숲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공기에서 희미한 철향이 그녀에게 닿는 순간, 미소는 사라지고 창백한 얼굴은 더욱 창백해진다. 동시에 윤을 붙든 손이 한겨울 냉기라도 맞은 것처럼 부들거린다. 떨림을 없애려는 듯 윤을 더욱 세게 붙잡은 그녀는 어떻게 해줄까, 라는 속삭임에 조금은 다급하게, 초조하게 말했다.
"ㅅ..선배도 무사하고, 이미, 이미 많이... 그런 거 같으니까, 오늘은... 이쯤 하면 안 되요? 더 있으면, 더 다치기만 하잖아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해줘요..?"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그저 그런 척을 하는 건지 애매하지만, 이 상황을 끝내주길 원하는 건 확실했다. 그저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을테니.
섹튬셈프라. 오싹한 느낌이 등 언저리를 스치고, 두통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죽기 직전만큼의 고통이 온몸의 핏줄을 타고 퍼지며 머릿속을 가득 매운다. 뒤로 넘어지는 스베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흩어진다. 보이지 않는 파편들에 난도질당한 듯. 노출된 피부 곳곳이 베인 모습은 마치 바닥에 떨어진 낙과 같을까. 스베타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피투성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숨죽여 흐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