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竹刀)도 하나의 칼이라는 사실은 이미 저 멀리에 갖다버린것 같다. 그의 머릿속에서 칼은 무언가를 벨 수 있는 도구... 일테니 이런 뭉툭한 죽도는 칼의 축에 안끼는 것일수도.. 여담이지만 그는 서바이벌을 좋아해서, 서바이벌 나이프도 다룰 줄 알았다. 그러니 그가 좋은꼴 못보는건 이미 정해진 일이겠지.
" 하하! 역시 우리 후배님은 그게 어울려! 딴것보단 실력으로 말하는거! "
어째 옆에서 다른 부원들이 '슨배임이 하시는거 검도 아임다!!!' 라고 할것만 같은 표정이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낼 담력은 없는지 조용히 차가운 눈초리만 보낼 뿐이었다.
" 좋아. 오늘은 8명이나 이겼으니 내가 사주마! "
호련이 나가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있으면 또다시 죽도로 대답을 대신하려 했지만, 아무리 야매 검도라곤 해도 참패한 자들이 항의할 수는 없었는지 얼빠진 얼굴만 하고있는 검도부원들에게 한번 웃어주고서, 검도복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호련을 뒤따라 체육관을 나섰다.
" 으아, 나오니까 시원하다. 안에서 진짜 익어버릴뻔 했다니까. "
나오자마자 앓는소리를 하며 앞으로 넘어오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 체육관은 밖과 다르게 청춘의 열기가 항상 넘치는 곳이었다. 그만큼 동아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일까...
죄 없이 깨끗한 얼굴. 완전히 결백한 사람의 얼굴이다. 남의 속 뒤집어 놓은 줄도 모르고, 도리어 제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사하 입장에선 억울하긴 했다. 아니, 맛 없는 건 안 먹는다며. 난생 듣도 보도 못한 늑대의 취향 얘기를 곧장 받아들여준 건 저인데, 언짢은 기색을 표하니 도통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내가 먹어보라고 했어야 돼? 오늘도 어김없이 생각은 멀쩡한 길 두고 이상한 데로 튀었다.
"글쎄다. 생각해본 적 없는데."
대답은 빨리 나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한대로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애초에 그런 기준도 엄청나게 주관적인 거 아닌가? 무르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그 사람이 진짜 무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겉으로는 실실 웃으면서 다 좋은 척 해도, 속으로는 옆자리 하나도 안 내주는 걸 수도 있는데. 진짜 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슬라임 같은 사람뿐이겠지. 정말로 겉이 물렁물렁한 사람. 앞서 기준이니 어쩌니 하긴 했지만, 아주 솔직한 마음으론 귀찮았다. 그런 거 하나하나 생각하며 살다간 언젠가 머리 터질걸.
"갑자기 바보 소리 들으니까 되게 억울하네."
툴툴대다 조용히 하란 말에 잠깐 입을 다문다. 속도 없이 웃고 사과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약간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멀뚱히 지구가 뻗은 손을 내려다보던 사하는 잠깐 주변을 훑어봤다. 기껏 땡땡이치고 나온 게 좀 아쉬워서 그랬다. 여기 조금만 있으면 어디 그늘 생길 것 같은데. 그래도 일단 잡으라니까 잡는다. <어디 가는데?> 질문이 한 박자 늦게 튀어나왔다.
사물함에 둔 준비물을 챙겨가기 위해 사물함을 열었던 지구는 넣지 않은 물건이 제 사물함에 자리하는 것을 보고 주위를 둘러보다 조용히 사물함을 닫았다. ..아무래도 다른 이의 사물함을 착각해서 연 것 같다고. 사물함에 주르륵 적혀 있는 이름 중 온지구, 제 자리를 다시 찾고 되열었으나 안에 든 물건은 변함 없었다. 요즘 제가 선행을 하고 다녔던가? 그런..기억은 없는데. 뒷머리를 긁적이며 이번엔 메모지부터 꺼내어 읽었다.
<~..... 이따금 소소한 기쁨들이 회장님께 찾아와주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격식을 차려 적힌 말투를 보며.. ..우선 주변에 아는 인물은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주변에 지구를 이렇게 높혀주며 존댓말까지 적어 줄 인물은 없는데. 오히려 선물 하나 못 받았냐며 놀렸으면 놀렸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낱개의 레모나를 꺼내어 곧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시큼한 맛에 미간을 옅게 찡그리며 메모지를 사물함 문 안쪽 중앙에 떡하니 붙여두었다. 그런 중에도 읽었던 메모지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며 무의식적으로 곱씹었다. 인기가 많다. 인기가.. 부학회장이 저를 찾아다니곤 하는 그런 인기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전 학생회장과 다르게 불량하다고 나도는 그런 소문들? 그런류의 인기는 확실히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지구는 그 메모지에 작게 적힌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오늘 치 소소한 기쁨의 몫은 이 사물함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존재감 없는 학생회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그 생각보다 더 기쁜일이라고. 농구공 모양의 그립톡을 꺼내 만지작 거리다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건 여동생들이 곧잘 붙이니까 집가서 부탁해겠다 생각하며. 빼빼로를 그 자리에서 바로 까서는 입 안에 오도독거리며 준비물을 챙겨두고 사물함을 닫았다. 주변에 지나가던 반 친구가 친한척 어깨 동무를 걸어오며 야 한입만~ 하고 치근덕 거려도 지구는 초코가 묻지 않은 과자 뒷부분 조차 나눠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평소처럼 짐을 챙겨 하교하려다가, 자신의 책상에 올려져있는 무언가를 뒤늦게 발견했다. 포장지를 뜯기 전에 편지를 물끄러미 보던 그는, 무언가 함정일지도 모른다며 편지를 햇빛에 비춰보고, 이리저리 뒤집어도 보고, 맛도 보면서(?) 뻘짓을 하고서야 편지와 상자를 열어보았다.
편지는... 신문지를 오려서 이어붙인 독특한 편지였다. 그것만으로도 신기했는데 선물은 닌텐도와 링피트 세트.... 그것도 2개!! 돈이 대체 얼마나 들었을지 짐작도 못하고서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상자 안쪽에 작은 공을 발견하고서 그것을 집어들었다.
삑삑거리는 공을 웃으며 조금 가지고 놀다가, 선물들을 가방에 조심스럽게 집어넣고서 답장을 쓰기로 했다.
[내가 보답할만한 물건이 없어서 아쉽네. 마니또씨만 괜찮다면 다음에 같이 링피트 하자. 혼자보단 둘이하는게 더 재밌지 않겠어?]
"헷―헤에! 그렇죠! 실력... 말해 무엇하리오...! 바로 저임미다! 바로... 저―!"
짠짜잔, 잔짠짠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일단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고 나니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얏호. 그럼 혹시 매점에서 한우도 팝니까?" 바로 옆에 따라붙어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정말로 얻어먹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채끝살이 좋았다.
내가 저렇게 깡을 부렸다간 곧장 무릎을 꿇고 뼈도 안 남을 때까지 혼났겠지만, 부외자인 선배는 마음껏 저런 짓을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살짝 부러웠다. 점잖은 걸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검도부원들은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았지만 다음 번에 대련할 때 나한테 오는 타격에 괜히 힘이 더 실려 있을 것정도는 예측했다.
"호면 쓰면 엄청나게 덥잖아요. 잘도 8번이나 연속으로 대련했네!"
그 말에는 선배가 진다는 경우의 수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머리를 넘기자 흘러내리는 이마의 땀을 닦아 주려고 발꿈치를 살짝 든 채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