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주 잘 자 ;3 주원주도 졸리면 일찍 코하자..? >>365 화장은 주변 친구들이 얼굴을 캔버스로 쓰려고 할 때 받는 것이다! 물론 오늘은 e스포츠의 날이라는 기분이 들 땐 무난하게 인도어 하기도 하지만. 얘가 또 죽여주는 목석이라 풀메는 누굴 유혹할 때나 하는 거라는 요상한 인식이 있어서 잘 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있구..
끝까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구는 사하가 내어줄 인내심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껏 생각해온 것을 그대로 가감없이 내뱉었다. 그건 걱정보다는 짜증에 가까운 말이었다. 지구가 생각하기에 지금 사하와 나누는 대화는 마치, '밥 굶지마 > 내가? 왜? 밥 말고 다른 건 굶어도 되나?' 그런류의 대화 같았다. 질문의 의도도 뻔하고 대답도 일정한데 굳이 길을 틀어 사람 속이라도 반쯤 죽여 놓을 기세로 작정하고 헛소리를 내뱉는 것. 지구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런 얘기를 설명하면 사하는 또, 내가 이렇게 생각한 거 뿐인데- 같은 대답을 내놓지 않을까. 지쳤으니 포기했다. 자처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이쯤에서 그만둔다.
"약 안 챙겨먹고 페로몬 풍기고 다니는 바보 은사하."
양호실 데려다 줄게. 뒷말은 일부러 끊었다 한 발 늦게 덧붙였다. 바보 은사하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지구에게 있어 은사하는, 좀 더 동족과 비슷한 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보니 그냥.. 그냥 바보 양이잖아. 지구는 손으로 제 이마를 짚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얘기했으면 그녀도 어련히 알아 들었을까, 하지만 또 반박할 것 같다. 그냥 아까 생각한 대로 입에 테이프나 붙이고 데려갈 걸 그랬다. 양들은 제 페로몬을 감지하지 못한다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런데 페로몬의 존재를 깨달았음에도 이 정도로 무방비하게 구는 건 진짜 멍청한 거야 순진한 거야.
양호실은 별관 건물이 아닌 본관 건물에 있었으니 계단을 내려서 좀 더 걸어가야했다. 이 바보를 데리고.. 지구는 한숨쉬며 사하가 잡은 것을 확인하고 그녀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계단을 하나씩 천천히 내려갔다. 다행히 동아리 시간이기 때문에 밖에 나돌아다니는 학생들의 수는 적었고, 또 교실 밖에 있는 학생이라 한들 늑대가 아니여야만 했다.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사하를 보면 정말 별 생각 없어 보이는데. 지구가 괜히 법석인 걸까. 순진하게 뭐가 나쁜 것인지도 모르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은 내 탓인가. 대충 먹어치우고 버려둘 걸 그랬나. 그런 생각도 든다.
"..흘리고 다니지 마."
그래 생각해서 기껏 돌려 말해 충고해주면, 곧이어 등 뒤에서 들려올 여자아이의 찰랑이는 대답은 '내가 언제?' 라든가, '흘린 거 없는데.' 따위겠지. 이번엔 정말 무시하겠다고 생각하며 지구는 놓지않게 사하의 손을 꾹 잡고 계단을 1층까지 내려간다. 생각보다 피곤한 여자애다.
"호호호.. 정말이지, 이 싸람들이 우리 연호 선배 무서운 걸 모르고 덤비니까 그렇게 돼죠."
일단 때려눕혀 버리면 잔심*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까 마음 속으로는 패배라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검도부원 사람들도 나름 억울한 점은 있을 것이다. 나중에 가서 위로해 줘야지. 강자에게 지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 한우 젤리...? 그건 한우 들어간 거임까―?"
군것질은 젤리보다는 과자파! 그렇다 보니 젤리의 맛에 대해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포도 젤리에서 포도 맛이 나고 복숭아 젤리에서 복숭아 맛이 나며, 박카스 맛에서 박카스 맛이 나는 것처럼 한우 젤리에서는 한우 맛이 날까? 그렇담 그건 과연 맛이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원래 목적지와 분위기상 가장 정반대인 장소에 와 버렸다. 물론 바보가 길을 찾아서 도착한 곳이 목적지와 정반대라는 건 오히려 그것 나름대로 당연한 상황이라서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도서관에서는 채끝살을 팔지 않으니까 고기를 못 먹게 되었다는 점이다. 힝 꼬기.
"..이렇게 된 거, 고기나 읽을까요..." 라고 말했다가 한 3초 지나서야 말실수를 깨달았다. "아니, 책이나 읽을까요..."
본심은 아니었다. 내 입에서 나올 리가 없는 말에 나 자신도 놀랐다. 보통 점심쯤에는 배가 고파져서 발이 저절로 매점 쪽으로 향하는데, 오늘은 감이 영 발동을 하지 않아서 나도 패닉에 빠졌나 보다. 평소에는 이렇게 길치가 아닌데!
"아니며언― 교내를 샅샅이 뒤져 볼래요? 곧 있으면 그 뭐야.. 매점.. 주인? 매점 마스터? 어... 상인? 맞다, 상인! 상인 분도 퇴근하실 것 같긴 한데."
어라? 오늘도 무언가 있다. 이번에는 사물함 안쪽이었다. 헤ㅡ 부지런한 친구네. 보물찾기 하는 것 같아. 생각해 보면, 누군가한테 반창고 따위를 선물받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보건 선생님께 가끔 찾아갈 때는 있었지만, 그건 ‘선물받았다’고 칭할 수는 없으니.
흠. 기분 좋게 웃음치며, 새슬이 조그만 종이상자 속에서 반창고 한 무더기를 꺼냈다. 본래의 새슬이라면 웬만큼 눈에 띄는 큰 상처들만 반창고로 덮어 두었겠으나, 선물을 받았으니 사용해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조그마한 상처들에까지도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팔꿈치에, 다리에, 손가락에. 새슬의 팔다리에 조그마한 밴드들이 차곡차곡 늘기 시작했다.
대충 눈에 스치는 곳에 반창고를 모두 붙이고 나니, 이제 상자 속에 남은 반창고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아까운 짓을 했구나 싶었겠지만, 새슬에게는 나름대로의 성의 표시였다. 네가 준 거, 잘 사용하고 있어ㅡ하는 의미의.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으니 이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새슬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반창고가 행동에 거슬리지는 않는지 확인한 뒤, 남은 반창고를 사물함 한 켠에 잘 놓아두기로 했다. 연고는.. 나중에 큰 상처가 나면 발라야지. 구석에 앙증맞게 자리한 작은 선물을 바라본 새슬이 나른하게 웃는다.
이윽고 새슬이 떠난 사물함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새로이 붙어 있었다.
[ 콜라친구 세심하구나. 다치는 게 내 맘대로 조절되진 않지만, 치료는 잘 할게. 주스는 나중에 먹을 거야. 고마워~ 지금 안 먹었다고 시무룩하면 안 돼ㅡ ( ᐛ ) ]
아무래도 그는 호련과 함께 결성하려했던 근대5종부가 결성되지 못한것이 슬펐던 모양이다. 복수... 라고 하기엔 뭔가 애매했지만, 아무튼 8명이나 때려눕혔으니 만족! 이라는 느낌이지 않았을까. ....여담이지만 아마 그렇게 위로해버리면 검도부 부원들은 더 큰 패배감을 맛볼지도...
" 닭발모양 젤리에선 닭발맛이 안났는걸... "
시무룩하게 답변했다. 아무래도 젤리에 고기맛을 표현하는건 더 미래의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가능하긴 하려나...?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젤리의 뭉텅뭉텅한 식감에 한우맛이 곁들여지면 얼마나 끔찍한 괴식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불호는 엄청 갈리겠지.
" ....도서관 사서님도 저녁먹을 시간이니까 시켜먹는거 빌붙으면 되지 않을까? "
심히 멍청한 생각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호련은 그 생각에 동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실현된 순간 끔찍한 파장이 일어나겠지... 여튼 그도 시원하고 맛있는걸 먹지 못해서 시무룩해진게 눈에 보였다. 교내에서 가장 활발한 두명이 시무룩해져있는걸 학생들이 본다면 어떤 반응일까?
호련이 매점 주인을 여러 말들로 부르는 것을 듣고 그는 그만 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매점 마스터라니. 맞는 말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착착 감기는 말이었다.
" 학교 옥상에 올라가면 보이지 않을까? 높은 곳이니까! "
올라갔다 내려오는 동안 퇴근하면 말짱 도루묵이지만... 아니 것보다 별관 옥상에 올라가봐야 매점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냥 한층 내려가!!!!!! 라고 외쳐봤지만 들릴 리가 없다...
오늘의 지구는 평범히 책상 서랍 속 교과서를 꺼내기 위해 손을 넣고 뒤적였다. 그런데 뭔가 뾰족한 게 손끝에 닿는 거 같기도. 아침 조례 전의 소란스러운 시간이었고, 지구는 종이라도 구겨졌나 싶어 상체를 숙이고 안에 든 물건을 꺼내보니.. 분홍색 바람개비. 가. 뭐지? 당황스러움에 바람개비를 재빨리 다시 서랍 안에 넣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바람개비를 꺼내던 지구를 눈치 챈 인물은 없어 보였고. 또, 지구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인물도 없어 보였다. 지구는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서랍 속에 숨어있는 분홍색 바람개비 하나와, 파란색의 바람개비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뭘까. 누군가 동아리 시간에 바람개비를 만들고 넣어 둘 데가 없어 지구의 서랍 안에 넣은 게 아닐까. 지구는 의아함에 볼을 긁적이다 일단 교과서를 마저 꺼내고자 교과서를 서랍 속에서 집어드니 조그만 쪽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람개비를 맡겨 달라는 쪽지가 아닐까 하고 주워들어 펼쳐 읽어보니.
<~..옥상에 올라가서 연기만 보고 있으면 되겠어요? 양손에 들고 바람을 만끽해보세요.>
지구는 제가 양 손에 각각 바람개비 하나씩을 쥐어들고 바람에 맞춰 빙글거리는...까지 상상하고 관뒀다.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지구의 마니또는 그를 꽤 잘 알고 있는 인물인 듯했다. 아마도. 흡연이나 하는 불량스러운 모습이 아닌 지구의 그런 천진한 모습이 진짜 보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나도 벌써 19살인데. 내년이면 성인인데.. 뒷머리를 긁적이다 우선 바람개비를 하복 상의 앞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주머니에 넣으면 바람개비가 부서질 테니까. 앞주머니에 알록달록한 바람개비가 나란히 들어있으니 칙칙한 그도 꽤 귀여워 보이는 것도 같고.. 친구들이 놀린다면 마니또에게 이를 것이라고 할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실 때까지 지구는 가만 멍을 때리다, 쪽지에 적힌 마지막 줄이 생각 나 대충 이면지를 꺼내어 반듯하고 정갈한 글씨를 끄적였다.
<한 손에 하나씩 드는 걸로 하자. 너랑 나.> -🌎
지구 그림까지 대충 그려놓고 이면지를 작게 찢은 뒤 쪽지 모양으로 접은 지구는 잠깐 고민하다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전해질 수 있으려나. 잘 모르겠다. 답변이 안 올 수도 있는 거고. 그리 큰 기대는 하지말자고 생각하며 지구는 손에 턱을 괴고 하품했다. 1교시가 끝나면 옥상에 올라가야겠다.
진지한 얼굴로 추리를 이야기하고 나서, 이제는 연호 선배의 미친 계획에 찬동하기 시작했다. "오오! 혹시 천재에요? 저도 아직 교내를 다 돌아보지는 않아서 언제 한 번 높은 데서 내려다봐야지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잠깐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별관이 생긴 모습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겼더라? 창문을 타고 갈 수 있을까? 아니, 역시 그건 어렵지. 퇴근하는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저번보다 크게 혼난다. 뭔가 매점이 급식실 근처에 있었던 기억은 나는데. 그러다가 손바닥에 주먹을 통 내리치면서 무언가 깨달았다는 얼굴을 했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역시 옥상에 올라가면 매점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언가를 깨달은 것과 논리가 조금이라도 발전하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입학한 지 반 년도 안 된 내가 학교의 구조를 외우라니 너무 가혹한 처사다. 우리 집 화장실 위치도 겨우 외웠는데. 자고로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직감으로 때우며 불의의 위협은 대충 동체시력으로 피하는 내가 학습이라는 걸 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높은 곳에서 살펴본다는 발상 자체가 이례적으로 머리를 쓰는 일인 것이다.
85점도 나쁜건 아니지만, 이해했다고 생각한 단원에서 점수가 이따구로 나오니 씅 안내고 배기겠나, 뭐 그렇게까지 짜증난건 아니고 그냥 쪼끔 심기불편 한 것 뿐이다. 아주 조금, 정말로 조오금.
그는 팔짱을 끼고 게슴츠레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종이비행기라도 만들어 날려버리면 좀 개운할까, 싶었지만 자신 이전에 어떤 놀 줄 아는 선배가 옥상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된통 깨졌단 소문을 기억하곤 볼 안쪽 살을 살짝 씹었다. 종이 비행기는 외국 문물이니 욕먹은 거고, 전통적인 걸 만들어 날리면 혼날리 없지- 의미없는 무의식의 흐름대로 손을 움직여 있는 재료로 연을 만들어 보았다. 뼈대를 대신할 것도 교실엔 없어서 그냥 모양만 연일 뿐인 종이장이지만. 턱을 괴곤 가오리 모양으로 장식한 야매 연을 살펴봤다. 실도 없고, 뼈대를 붙인다 해도, 날순 있으려나? 옆자리 짝궁한테 이거 어떠냐고 물어보자 돌아오는건 영혼없는 '오...' 뿐이였다.
"튕기긴, 멋있잖아?" 마음에 드는 답을 못 듣자, 그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선 옥상으로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이왕 만든거 던져라도 보자는 별 의미 없는 마인드였다. 실내화를 끌며 계단을 올라 슬며시 옥상 문을 열어보니, 벌써 다른 누군가가 연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이때 주원이 옥상 출입구 쪽을 돌아봤다면 황당한 기색의 그를 볼수 있었을거다. 제멋대로 뇌내회로가 돌아가선, 그는 복도에서 몇번 봤을 뿐인 키 큰 금발의 선배에게 묘한 동료애가 느껴졌다. 저 선배도 분명 시험을 망쳤던 걸꺼야! (아님)
보아하니, 저쪽은 준비도 완전 제대로 했는지, 연이 제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여기서 상식인이라면 잘 놀고 계신 선배를 건들이지 않고, 눈치 채시기 전에 빠른 후퇴를 했겠지만 그는 그딴 눈치보단 자기 자신이 즐거움이 더 중요한가보다. 조용히 발걸음을 주원이 있는 쪽으로 옮겼다.
"우와, 제것도 도와줘요 선배님-"
의미 모를 의성어도 넣어가며 기세 좋게 다가간것 치곤 주원과 조금 멀찍히 떨어져선 부탁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초면인 사람한테 완전히 친한척 하는건 너무 쑥스러운가 보다. 가오리 모양 연을 든 손을 살랑거렸다. 다른 한 손은 갈 곳을 잃어 어색하게 허공을 짚은채로...
저지를 벗자 드러나는 맨투맨과 셔츠 조합. 둘 다 사복을 입고 있으니 벌써 밖에서 만난 듯한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허락을 맡고 나왔다고 해도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안되는 신세지만. 슬쩍 웃으며 거부감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인적이 드문 기숙사 뒤뜰로 손을 잡아 이끌었다. 선선한 날씨, 따뜻한 손. 이 손이 누구에겐 안정제일 수도 있을 터다. 궁금하다는 것처럼 손끝이 손바닥에 닿을 때부터 완전히 맞잡을 때까지 네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여자는 흔쾌한 수락과 함께 네 옆자리를 차지하고 이어지는 질문에 고개를 으쓱였다.
"아직 이렇게 입기엔 이르지. 이런 취향이야? 참고해야겠네."
사복이긴 하지만 따뜻해져가는 날씨에도 좀 추워서 몸이 웅크려지는 건 사실이다. 이때 네 가방에서 다시 꺼내지는 저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서 웃으며 기꺼이 받아 무릎에 덮었다. 음, 옷에 남은 네 체온이 마음에 들어 발목을 꼰 채 여전히 얽혀 있는 두 손을 내려다 보았다. 늑대라기엔 한없이 무해해 보이는 손인걸.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고. 감상에 젖어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이렇게 입기 이르다면 이유를 설명해야 할 테니.
"편하게 먹으라고 이렇게 입고 온 건데? 모처럼 해인이가 나랑 충전하는데 포옹이나 하고 가라고 야박하게 굴긴 싫고, 그렇다고 보이는 곳에 흔적이 남으면 곤란하거든."
늑대와 양이 상호 협의 하에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은 채 같이 있는 상황은 줄다리기 같은 것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고 뚜렷했기 때문에 백가예는 팽팽한 줄끝을 틀어쥐고 먼저 잡아당겼다. 꽃향기도, 먹음직스러운 향기도 아닌 마른 흙과 잎을 층층이 쌓아올린 사이에 달디 단 머스크 향이 스며들어 매캐하게 마무리되는 페로몬이 가로등 불빛 아래 불길처럼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늑대마저 삼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양이 해인의 반대편 어깨에 잡지 않은 쪽의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우리 만난지 참 오래 됐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랬더라, 해인아."
그게 나쁘지 않아. 백가예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옷에 걸고 가까운 거리에서 해인의 얼굴을 지그시 주시했다. 언제라도 접촉을 하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