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필요 없는 확인사살까지 당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늑대인 건 이미 알았는데. 도대체 왜 지금껏 양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지구가 덧붙인 말은 들어서 유쾌한 어조는 아니었지만, 딱히 기분 상하지는 않았다. <건방진가?> 궁금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원하는 게 있으면 부탁하는 거잖아. …아, 알았다. 너 배 안 고프구나?"
<그럼 그럴 필요 없지.> 사하가 짧게 덧붙였다. 역시나 납득이 빠르다. 짧은 시간에 나온 것치곤 꽤나 명쾌했다. 사하가 지구를 보며 태연하게 눈을 깜빡였다. 애초에 벽에 붙어있어서 물러설 데도 없었다. 구석에 몰린 양이라기엔 필요 이상으로 겁 먹지 않은 모습이다. 사하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다. 지금은 달이 뜬 밤도 아니고, …물려봤더니 생각보다 별거 없는 것 같던데.
"부탁하면 들어줘?"
부탁은 저만 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왜 자꾸 노려보나 싶기도 하지만, 일단 그냥 넘어갔다. 오히려 은근한 저자세로 실실 웃었다. 들어준다고 하면 뭐 부탁하지. 얼굴 가릴 것 좀 빌려달라 할까. 그러다 들려온 말에 고민하는 기색을 띄우더니, 어깨를 으쓱인다.
"이미 물려봤어."
제 목덜미를 건드리는 손 위로 제 손을 얹으려 했다. 피할 생각 없다면 사하는 지구의 손을 잡아 제가 물렸던 자리를 짚어줬을 것이다. <여기쯤인가.> 긴가민가하다는 듯 말하며.
뭉툭한 손톱으로 긁어서 약간만 붉게 부어오른 정도가 아니라면 아예 30분 안에 낫는 건 무리이지 않을까? 아마 비유겠지만, 응. 그래도 잘못 헛디뎌서 발목이 부러지거나 인대가 늘어나거나 하면 30분 안에 안 낫겠지.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무서운 생각을 하지만, 그에게 딱히 악의가 있는 건 아니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는 것 뿐이다.
"다른 사람보다 튼튼해도 다치긴 하니까 말야. 세상에 안 다치는 사람은 없으니 조심해야 해?"
그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자신이 튼튼하다는 것을 아필했지만, 글쎄. 이현이 말한것과는 논점이 다르다. 어쩌면 이 언쟁은 창과 방패처럼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난 그것도 신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신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믿고 따르고 매달리는 듯한 그런 거라고 나는 생각하거든. 넌 아닐 수도 있지만... 하하."
당차게 말하다가 머쓱한 듯 손으로 목 뒤를 쓸며 바보처럼 웃는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른 거니까, 그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설득할 요량으로 길게 말할 생각은 없다.
"아하하하, 그럼 되겠네! 그렇지만 복도에선 뛰면 안 되니까 그런 데에서는 빨리 걸어가는 정도로 할까!"
마찬가지로 그도 인사하는 걸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짤막한 근황을 주고받고 곧바로 연호에게 다시 집중하는 것을 보면, 그가 그런 사람이란 걸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응? 아하하!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한 살 차이고, 나는 반말 써도 괜찮으니까. 그렇지만 다른 애들 중엔 존대를 더 좋아하는 애들도 있으니까 다음번엔 주의하는 게 좋겠네."
고개를 저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본인을 탓해도 그것을 회피할 명분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늑대의 재능을 이용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을 것이며, 그걸 알고 있는 나마저도 네 재능을 놔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또한 너도 내가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모종의 합의에 동참하고 있으니 놓아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널 찾으라는 말에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받은 만큼은 돌려주는 사람이긴 했지만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인면수심보다 책임 없고 누구나로 대체될 수 있는 안이함이 여자에겐 더 모멸적이다. 그것은 무기명의 질권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기숙사에 먼저 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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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전 먼저 기숙사로 들어가 사감 선생님에게 특별 활동으로 늦을 수 있다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진땀을 뺐다. 따지면 틀린 말도 아니고, 허락을 받지 못했어도 선약을 했기 때문에 점호 이후 빠져나왔을 것이며 벌점을 매긴대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튼 환복을 하고 나온 여자는 기숙사 건물 어귀에서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우르르 나오는 학생들 사이에서 해인과 눈을 마주치자 웃으며 손을 흔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이 시간을 기다렸기에 학교에서 보던 얼굴인데도 퍽 반갑게 느껴졌다.
걸음을 옮겨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기존의 세일러복이 아닌 사복으로 보이는 여름에 입을 법한 슬립 나시 위에 가디건을 걸친 여자가 기숙사 뒤쪽을 가리켰다.
"공부는 잘 했고?"
가볍게 안부를 물으며 뒤쪽을 가리키는 이유는 사람의 이목이 없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누군가 보고 이러쿵저러쿵해대면 곤란해지기 때문일까. 그 후엔 거절해도 된다는 듯 느긋이 손을 내밀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