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구나. 그거면 누가 밑에서 받쳐주면 되지 않을까? 그거정도라면 나도 해줄 수 있겠다."
수영 대회가 끝나면 시간이 남을테니까 그때 한 번 불러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수영을 도와주면서 겸사겸사 스킨십도 하고 친해져보려는 속셈이었다. 흑심이 그득한 것이 머리에 마구니만 가득 든게 틀림없었다. 선하의 속눈썹 사이로 눈동자가 교묘하게 움직인다. 사하의 손을 향해있었다.
"그렇지? 신기해. 이름도 닮았고, 성격도, 취향도..."
은근 슬쩍 단어를 확장시킨다. 어리숙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로 논리적으로 따지면 말이 안되는 결론이었지만, 고개 기울이며 웃는 선하의 얼굴을 보면 반박하기도 애매했다. 손이 깍지를 끼고 파르르 떤다. 눈이 둥글게 접히고 입꼬리고 올라간다. 복도에 줄지은 창문에서 빛이 들어오자 괜히 더 밝아보이는 기분이었다.
"나도 스릴러랑 액션 좋아하는데!"
안타깝게도, 추리나 미스테리는 썩 즐기지 않았다. 짐승이 그런 고차원적인 장르를 제대로 이해할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그 말은 쏙 빼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뽑아서 재잘거렸다.
"그 긴장감을 좋아하나봐. 심장이 막 두근거리고, 온 몸이 떨리기도 하더라."
선하가 느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숨긴 무언가를 찾을 수 없는 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혀를 굴리는 입은 뱀처럼 은밀했다.
"그러고보니 그거 알아? 사람이 공포와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 때가 있대. 그런 걸 흔들다리 효과라 하는 것 같더라. 어쩌면 그래서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지."
손끝으로 유인물의 끝을 쓸어내린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선하가 유인물을 사하의 품에 내어주었다. "동아리에서 영화볼때 나도 불러줄래? 기왕이면 너랑 내가 좋아하는 장르로." 방금 꺼낸 말을 고려하면 의도가 상당히 불순한 제안이었으나 선하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그럼 나는 양이 아닌가보다, 그렇지? 뒷말을 덧붙여 중얼거리는 지구의 목소리는 약간의 빈정거림이 묻어있다. 저를 양으로 착각해 준 것은 꽤 흥미로운 발상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구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진 못했다. 평소의 지구라면 뭐, 응. 아니. 정도의 대답에 곤란한 이야기가 오고가면 슬쩍 자리를 피해 사라지고 없던 학생회장 정도였을까. 애초에 지구를 알려 하기도 전에 차단 시키는 게 대다수였으니 지구를 얕잡아 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고.. 지금은 단순히 그녀의 체취가 마음에 들었고, 그게 또 거슬렸기 때문이다.
저를 경계하는 눈초리의 사하는 영락없이 순진한 양일 뿐이었고. 이때까지 그녀가 늑대라고 생각했던 착각은 무엇 때문이었지? 긴장한 듯한 해보이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과거의 그런 형편없던 생각은 말끔히 지워진다. 움츠러드는 양을 보며 딱히 우월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니. 말은 아끼라고 있는 거지. 제게서 잡혔던 손을 빼내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사하는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혹은 여유를 되찾을 생각이거나.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걸까. 그것은 그녀가 정하는 게 아니었는데.
"사하. 네가 지금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할 처진가."
신경을 건드린 듯 지구는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읊조리더니, 겁이라도 줄 생각인지 사하 뒤에 있는 벽을 뻗은 한 손으로 짚어 그녀를 구석에 완전히 가두려했다. 동급생인 그녀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지만, 안일하게 그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구야 참는 게 일상이었으니 굳이 그녀를 위험한 상황까지 몰고 가진 않을 테지만, 그가 아니었더라면? 평소에 양을 접하는 게 쉽지 않은 늑대였다면? 도발하는 것으로 여유를 부릴 정도로 바보였나 그녀가? 한 순간 픽 웃음 짓는 그녀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다는 욕망이 스쳤지만 낮은 한숨을 길게 내뱉는 것에 그쳤다.
"부탁은 네 역할이지."
그는 애초에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그녀의 부탁을 들어 줄 생각도 없었지만. 담배 한 대 태우려 왔다가 이게 무슨 장난인지. 지구는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도발해대는 그녀를 철없다는 눈빛으로 노려 볼 뿐이었다. 어찌보면 그녀가 늑대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 한편으론 걱정도 되는데, 나는 그녀의 가족도 친구도 뭣도 아니니 오지랖을 넓힐 생각은 없다. 그냥 여기서 충격 요법으로 목덜미 한번 깨물어 주면 정신을 차릴까. 애초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이성을 잃지 않고 참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넌 절대 모르겠지. 지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그녀를 어떻게 가르쳐야하나. 지구는 조금 생각에 빠진 얼굴로 무의식적으로 남은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대어 만지작거리려 하며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교내 정원이나 생각하던 여자는 바깥 이야기가 나오자 반색을 했다. 실외에서 노는 게 더 좋은데 학교는 너무 갑갑하다고. 그러던 차에 해인의 입에서 시내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치뜨고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맞아. 내 감정을 억지로 충족시켜달라고 할 순 없으니까 물었어."
예의상 말이야. 뒷말은 마음 속으로만 했다. 늑대와 양이 가장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결핍을 충족하는 행위는 혼자 하는 게 아니기에 사전 확인은 꼭 필요한 절차니까.
해인의 대답을 듣고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이, 협상이 체결되어 기쁘다는 듯이 느긋하게 마주 웃으며 만족스러운 숨소리를 낸 여자의 머릿속은 다시금 연산으로 분주하다. 기숙사 통금은 열 시 반. 약효는 곧 다하고, 더 지체하면 제때 출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수한 경우의 수를 계산하던 중 귀에 해인의 목소리가 꽂혔다. 여자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켰을 때의 섬짓함을 느끼며 늑대롤 천천히 돌아보았다.
"......"
내 재능이 탐나지? 좀 전 본인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듯한 말. 저지르려던 악행을 꼬집는 말. 그 뒤로 따라오는 말은 가져도 좋다는 말. 허락의, 또는 동의의 뜻. 혹은 둘 다. 아무 말 없이 눈꺼풀만 깜빡이던 양은 해당하는 말에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
"누군가 다치는 걸 싫어하는구나. 알아둘게."
내가 다칠 것 같거나, 이미 다친 경우엔 예외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로 팔짱을 끼웠다. 전자의 경우에 아끼고 아껴서 네 능력을 사용해달라고 부탁할 순 있겠지만 내 사사로운 복수에 너를 이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이상으로 줄 수 있는 건 아직 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끈을 입에 문 채 머리를 틀어 묶었다.
"또 두 가지 옵션이 있어. 이번엔 고르는 재미 있을걸."
머릴 높게 묶고 네 옆으로 자리를 옮겨 의자에 앉았다. 맥박이 뛰는 부위가 드러나면 향이 조금이라도 나지 않을까 싶어서. 고개도 설레설레 흔들어 보았다.
"야자를 마치고 와서 억제제의 효과가 거의 없어졌을 때 먹기. 두 번째. 지금은 거의 안 느껴지겠지만 꽉꽉 물고 씹어서 배어 있는 단물이라도 마시기. 아, 통금 시간은 사감 선생님한테 미리 말할 거니까 걱정 말고."
본인을 음식에 비유하는 묘사를 쓸데없이 잘했다는 생각에 잠깐 해탈해지려고 했으나 지독한 외로움이 충족될 수 있다는 희망이 그것을 가려주는 듯했다. 전자의 경우 충족치는 보장되지만 기다려야 하고, 후자의 경우 깔끔히 끝내고 야자를 하러 갈 수 있지만 입맛만 돋우는 결과를 부를 수도 있다. 지금 냄새 나? 여자는 눈으로 물으며 해인을 쳐다보았다.
선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사하가 선하를 돌아봤다. 천사라도 본 얼굴이다. 대회준비 때문에 바쁠 텐데. 물론 도와주겠다는 건 나중에 한가할 때겠지만. 그래도 그때는 쉬어야……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물론 대답은 감사의 인사다. 선하가 베풀어준 호의를 넙죽 받겠다는 뜻이다.
"네가 도와주면 나도 든든하지."
10년 친구는 된 것처럼 말한다. 근데 정말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지. 이렇게 짧은 시간에 갑자기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게. …물론 혼자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게, 우리 은근히 닮은 점이 많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도대체 어떤 애길래 매해 이름 바꿔부르는 애들이 있는지.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선하의 웃는 얼굴을 보곤 홀린듯 납득하며 끄덕였다.
영화 이야기를 하는 선하의 말에 사하가 반색했다. 좋아하는 장르가 겹쳐 기뻤다. 물론 사하가 말하는 영화는 잘 만든 것들을 넘어서 괴작, 혹은 망작으로 불리는 것까지 포괄하는 개념이었지만.
"맞아. 나도 그래서 좋아하는데. 영화 취향은 진짜 많이 닮았네."
사하가 웃으며 말했다. 느긋하게 말을 이어가는 선하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듣기에 좋았다. 잘 들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까. 사하는 맞장구 치듯 사이사이 끄덕이며 들었다.
"아, 들어본 것 같아. 운동할 때도 비슷한 일 생긴대. 심장 빨리 뛰어서."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를 덧붙인다. 단순히 심장이 빨리 뛰는 걸 사랑에 빠진 걸로 착각하다니. 사람이 참 섬세한 듯 하면서도 단순하다 싶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으니 어느새 교실 앞이었다. 혼자 왔다면 더 빨리 오기야 했겠지만, 오늘처럼 즐거운 일은 생기지 않았겠지. 사하가 선하에게서 유인물을 받아들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재밌게 왔어. 놀러가겠다는 말도, 간식 사주겠다는 말도 진짜니까 꼭 또 봐."
<네 말대로 같이 영화도 보자.> 덧붙인 사하가 웃으며 선하에게 손을 흔들었다.
// 이걸로 막레해도 좋아~! 당연히 더 이어줘도 좋구! 선하주 편한대로 해줘 '-^ 아까 인사했지만 굿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