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었다. 어김없이 햇볕은 밝다. 옅게 인상을 찌푸린 사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포기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수리만 따끈따끈한 게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거슬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인기척을 낸 당사자야, 용건이 있으면 올 거고 없으면 제 볼 일 보고 가겠거니 했다.
묻는 말에 대답이랍시고 오래된 노래의 가사를 읽는다. 음절도 없이 읽는 게 성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결국 이마에 딱밤을 맞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여기 다 좋은데 그늘이 너무 없어."
<파라솔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 학생회장 앞이라고 은근슬쩍 제안을 던져본다. 바람 솔솔 부는 파라솔 그늘 아래서 낮잠이나 자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낮잠 아니라도, 뭐… 그냥 앉아서 하늘 구경이나 해. 여름 되면 더워져서 다 때려치고 싶겠지만, 봄까지는 그늘만 있으면 그럭저럭 쾌적할 것 같은데.
"너는 여기서 뭐해?"
궁금한 눈으로 지구를 보며 물었다. 지금 한참 동아리 시간인데, 옥상에서 활동하는 동아리는 없잖아. 학생회실은 따로 있고.
마침 오전 트레이닝을 마치고 와서 당이 딸리던 참이라, 별사탕 정도는 고맙게 먹어두기로 했다. 그냥 설탕맛이 아니라 소다맛이 도는 게 조금 별나다는 생각은 든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더 별난 물건이 별사탕 옆에 있다. 문하는 해마 모양으로 조각된 크리스탈 장식과 옆에 놓인 쪽지를 집어들고 가만히 살펴보았다. ...별다를 건 없다. 그냥 평범한 장식물이다. 문하는 다른 손을 사물함 안쪽으로 깊숙이 찔러넣었다.
언젠가 스포츠용 손목시계를 살 때 그것을 담고 있었던 양철 케이스가 딸려나왔다. 문하는 양철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까마귀 수집품을 방불케 하는 잡다한 잡동사니가 몇 개인가 들어있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한 소라껍질, 빛을 서서히 잃어가는 외국 동전, 낡은 드림캐쳐... 문하는 그 양철 케이스 안에 그 크리스탈 해마를 집어넣고는 케이스를 닫았다.
데이트라는 말에 하하, 호흡 섞인 웃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도 좋지. 교내 데이트가 되려나? 모처럼 하는 데이트가 학교 안이라니, 고삼이란."
여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치 자조하는 말투로 말했다. 반은 농담이 섞여 있고 반은 진심이 섞인 투였다. 여자에게 해인은 싱거운 치레도 진심인 것처럼 들리게 하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아, 지금도 재능을 사용하는 중이려나. 흑색과 백색 사이 어드매에 있을 색상의 눈동자로 시선을 피하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백가예는 재능은 쓰임새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강해인이 지레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진행되던 행동을 억지로 멎게 한 것처럼 좀 전보다 경직된 턱끝을 응시하다가 보라색 머리카락에서 손을 뗀다. 이 머리카락은 염색이려나. 다탁 하나만을 최소한의 방벽 삼아 사이에 두고 늑대와 양이 있었다. 오늘치 약은 아침에 복용하고 온 상태라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을 거라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굶주렸다고 해도 달려들지 않을 걸 알아, 늑대야. 흔든다는 표현은 호전적으로 들리네. 어디까지나 옵션을 제시하려던 거였는데..."
너한텐 그렇게 보이지 않겠구나, 빠르게 생각의 속도를 높인 여자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를 앞에 둔 양이라기엔 지나치게 차분한 태도였으나 숱한 경험으로 평정심을 잃어도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기에 흔들리지 않는 시선과 고른 숨소리, 자연스러운 몸짓을 유지했다. 너도 내가 필요할까? 라는 질문은 어쩐지 다각적으로 들려서 몇 초 정도의 간극을 두다가 대답했다.
"필요해. 앞으로도 계속 필요할 거야."
확신이 깃든 목소리였다. 다수의 사람을 제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내 편이라면 그 사람들마저 제 편일 것이요, 적으로 돌린다면 그 사람들마저 내 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백가예는 결과적으로 본인마저 늑대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잠시 미안함을 느꼈지만 결국 이기적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또한 나는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일 테니까. 중요한 건 너도 내가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결론을 굳히듯 고개를 끄덕이며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린다.
"페로몬 억제되어 있는 건 느껴질 테고... 약발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야자 끝나고 볼까, 내일 아침에 볼까."
빨리 보는 게 좋겠지? 불에 장작을 넣듯 부추기며 상체를 네 쪽으로 가까이 기울이며 은밀히 말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더 아닐 테고. 아니여야 될 텐데. 뒷말은 삼켰다. 운도 나쁘다는 중얼거림이 귀에 들어와 지구의 눈이 가늘어지긴 했지만 곧 이어지는 사하의 헛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가 왜이렇게 칠칠맞지? 일부러 이러나? 게다가 그녀와는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애초에 친한 인물이 몇 없는 거지만.. 가까이 다가간 그녀의 행색을 보니 정수리와 머리 끝 색이 달라 기억하기 쉬운, 동급생의 은사하였다. 기억하는 게 맞다면.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딱밤을 맞았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형편 좋은 소리를 하고 있는 사하는 무시하고, 지구는 날카롭게 뜬 눈으로 "잠깐." 이라고 중얼거리며 웅크리고 있는 사하의 얇은 손을 불쑥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제 코 끝에 가까이 가져다대어 강아지처럼 킁킁 냄새를 맡더니 결국 사하를 묘하게 노려보는 듯한 눈빛으로 잡아당긴 그녀의 손등에 턱을 괴려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확인 사살을 해버렸으니 그녀가 도망갈 곳은 없겠고. 마침 옥상이겠다 구석진 곳이겠다 먹어 버려도 상관은 없을 텐데. 어쨌든 그녀는 꽤 맛있어보였고, 바닐라향은 지구가 좋아하는 추억의 것이었다.
"너, 늑대 아니었나?"
건조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건네진다. 그의 얼굴은 꽤 피로해보였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지만 그렇다고 불의를 지나치는 성격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피곤한 사람. 사하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왠지 장난이 치고 싶어지기도 하는데, 그럴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였던 것 같고. 나름의 갈등에 빠지며 욕구를 참아내고 입술을 달싹이듯 핥았다. 날카롭게 뜬 눈과 꽤 신경질적인 말투는 평소의 땡땡이 치기를 좋아하던 나른한 학생회장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으려나.
능청스레 대꾸한다. 만약 찾아온다면 정말 선심써서 도와주겠다는 투였다. 유한 얼굴로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우습다. 그렇지만 잘 보이고 싶은 애 앞에서 허세정도는 부릴 수 있지 않을까? 안 그래보이면서 엄청 겉멋을 신경쓴다. 정작 찾아왔을 때 당장 도와줄 확신도 없는 주제에 낯짝이 두껍다.
"왜 힘 빼기가 힘든 거야? 음, 심리적 요인인 것 같으니까 그것부터 시작해보자."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하다는 듯 제법 공들이고 있었다. 사하의 고민은 눈치채지 못한다. 만일 알았대 해도 어차피 친구 몇 없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 찔릴 일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 자신 있나봐?"
으쓱해하는 사하의 모습에 불쑥 못된 생각이 치고 들어온다. 선하가 입꼬리를 만지작거린다. 마사지의 일환으로 혹여나 제 속내가 튀어나올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얌전히 주는 거 받아먹을까 싶었는데, 이것저것 집어서 울상지게 만들면 어쩔까 싶다. 곤란해 하려나? 화내려나? 어느쪽이건 관계가 틀어질만한 일이었다. 간식 사준다는 친구에게 이것저것 사서 곤란하게 만드는 건 일반적으로 무례했으니까. "곧 수업 시작하니까, 나중에. 나중에 사줘..." 느린 템포로 말했다. 걸음 역시 한층 느려졌기에 약간 뒤로 쳐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영화감상부 좋지. 사실 나도 영화는 아무거나 잘 봐."
아무거나 잘 보는게 아니라, 뭘 틀어주던 상관 없다는 표현이 맞았다. 덜 자극적인 것보다는 자극적인 영화를 더 즐겨하긴 했던 것 같긴 한데... 그게 중요한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