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서로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거 아니겠어요? 선배의 가치관은 그쪽이고 저는 이쪽이니까요. 일단 걱정해줘서 하는 말이라면 마음은 감사하게 받을게요."
마음은 알겠으나 그 말을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마음은 없다는게 그가 선택한 답이었다. 늑대가 아니라면 늑대가 아닌 존재였을 뿐이고 자신은 쭉 그 자세를 고수했다. 인간이냐 양이냐.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고, 반드시 뭔가를 선택해서 밝혀야만 하는 것일까. 자신은 자신일 뿐이라는 생각에 흔들림은 없었다. 물론 그것은 미숙함일지도 모르고, 어설프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 존재가 크게 알려지고, 점점 커지게 된다고 해도, 저는 저에요."
자신이 양이면 이런 태도가 되고, 자신이 사람이면 저런 태도가 된다면 그렇게 두면 될 일이었다. 양이라는 것을 굳이 비밀로 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자신이 굳이 먼저 말을 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작은 차이 하나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지기에. 그리고 그것을 어린 시절 분명하게 느꼈었기에.
그런 아무래도 좋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적당히 넘겨버리면서 하늘은 가볍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가벼운 모습을 보였다.
새슬이 초콜릿을 집어 앞뒤를 살핀 뒤, 포스트잇을 살며시 떼어냈다. 누구의 글씨인지 머리를 굴려 보지만,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주위를 둘러 보아도 누군가 이 쪽을 살피는 기색은 없고, 그저 각자의 할 일을 하느라 왁자지껄할 뿐.
이런 걸 책상에 올려놓은 사람은 누구일까아.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전교생을 붙잡고 물어보기엔 조금 귀찮으니까. 나중에 할래. 새슬이 초콜릿 봉지를 뜯어 한 입 베어물었다. 파각, 얇은 초콜릿 판이 손쉽게 조각나는 소리. 입 안에 퍼지는 달곰씁슬함, 생글거리며 배어나오는 웃음. 필통에서 작은 네임펜을 꺼내어 책상에 무언가를 뽀득뽀득 적는다.
[ 맛있다ㅡ 고마워ㅡ ( ᐛ ) ]
보겠지. 응. 분명. 한 번 더 조각낸 초콜릿을 입에 물고, 새슬의 발걸음이 교실 밖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없는 주인을 견디는 데 이미 한참 익숙해진 자리에, 검은 글씨만이 낯설게 남아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하늘이는 주원이와는 다른 의견을 고수할 모양이었다. 주원은 이제 되었는지 "걱정, 이랑은 조금 다르지만. 뭐 됐어." 하곤 대답한다. 사람의 수만큼 의견도 천차만별인거니까. 그것 또한 잘 아는 바이기도 했고.
"스스로의 존재가 달라지지는 않지."
다만 타인이 달라질 뿐이지. 라고 주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어찌됐든 정답이란 없는 것이고, 그것은 스스로 메꿔가는 것일 테니까. 아니라면, 아닌 것이겠지.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주위의 사람들에 의해 가치관이 형성되고 스스로의 생각이 굳어간다. 태어난 조건이 다르고, 함께 해온 사람들이 다른만큼 의견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 또한 완벽한 정답은 없을테고.
문하는 차가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관자놀이께가 지끈 아파오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학교가 이렇게 쓰잘데없는 이벤트같은 게 많은지. (※ 캐릭터인 문하의 독립적인 생각이며, 문하주는 산들고와 캡틴의 빵빵한 이벤트진행을 적극 지지합니다.)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하는 핸드폰을 더플백에 푹 쑤셔넣었다. 일주일 정도, 정말이지 귀찮게 됐다. 이런다고 뭔가 바뀔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극적인 전환점 같은 거라도 되기를 바라는 걸까? 기억하건대 작년 이맘때- 하늘이 이렇게까지 삭막하게 잠겨있지는 않았던 무료한 나날들이었다. 지겨운 하루하루에 뭔가 자극이 되지 않을까 시작한 이벤트였건만 별 건 없었다. 그냥, 시답잖은 간식 몇 개만 오갔던 이벤트였지.
누구였는지 모를 그 사람도 내 마니또가 된 게 탐탁치 않았는지 마니또 게임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고, 나도 그 의사를 존중해서 딱히 마니또가 누군지 밝혀내는 데에 열의 따위를 두지 않았다. 그야,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마니또로서 담당하게 된 녀석은 별생각 없는 시커먼 운동부 동기였고. 운동부 동기라고 한다면 이래저래 아무도 모르게 마니또 노릇 해줄 수 있는 게 많으니까 그냥 일주일 정도 운동기구 뒷정리라거나 하는 자질구레한 운동부 잡일에 조금 더 성의를 보여주는 것이 내 마니또 활동의 전부였다.
내가 받은 문자를 보건대, 이번 마니또 게임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딱히, 모르는 이름.
다른 이들은 마니또 놀이에 신이 나서 왁자지껄 몰려다니면서 누가 누구인지 찾아내려고 분투하고, 그 탐정들의 시선을 피해 비밀스레 마니또 역할을 수행하려 모든 노력을 다하고, 마니또인 거 다 보였다면서 누군가를 놀려먹거나 팔을 수도꼭지 모양으로 치켜들며 놀라곤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좋은 친구며 자기 마음을 기대도 좋을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문하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작년의 마니또 이벤트는 문하에게 딱히 무언가 특별하게 여겨질 만한 무언가를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올해의 마니또 이벤트 역시도 문하를 다시 일으켜세워줄 만한 무언가를 가져오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당연하다. 잘 안다. 남들이 청춘이라고 부르면서 마음껏 향유하는 이 나날들은 이미 내게서는 그 주어진 모든 빛과 향을 다 발해버리고 소진되어서 빛이 바래어버렸으며, 이제 내 앞에 남은 것은 삭막한 흑백의 어두운 나날들뿐이라는 것을.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을 거잖아. 내게로 왔다가 금방 나한테서 떠나버릴 거잖아. 나를 이대로 혼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둬.
이번에 지원금이 나온 동아리 회비를 댄스부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지구는 학생회실로 돌아가는 계단을 차근히 올라가고 있었다. 지금은 동아리 활동 시간이라 가득한 동아리 실에는 저마다의 아이들이 제 취미와 특기를 즐기고 있는 참이겠다. 그럼 학생회는 뭐지? 생기부용일까. 알 바는 없었다. 지구는 학생회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음에도 무시하고 계단을 좀 더 올랐다. 저번엔 1층에서 딴청을 피우다 다른 학생과 마주쳐 불화가 생겼으니 오늘은 옥상이겠다. 매일 땡땡이를 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불려간 선생님께서 '이거 댄스부 아이들에게 전해줄래?' 라고 하셨지 돌아오라곤 안하셨으니까. 상관없지.
옥상에 도착한 지구는 익숙하게 문을 따고..가 아니라 오늘은 번거롭지 않게도 열려 있었다. 이미 누가 왔다 간 거겠지. 지구는 익숙하게 난간 쪽으로 가 상체를 기대고 주머니에서 파란곽을 꺼내고 있었다. 커다란 구름들이 흘러가며 그늘을 만들었다가, 다시 맑은 햇살을 비춘다. 은은하게 부는 봄바람은 왠지 단내가 나는 것만 같다. 그것도 마치 구름에서 날 것만 같은 눅진한 바닐라잼의 향. 그거 정말 수상하네. 이미 연초를 입에 물었던 지구는 불을 붙이기 전에 웅얼거리 듯 중얼거리고 난간에서 등을 돌려 옥상 위를 훑었다. 어쩌면 학교 밖에서 타고 오는 향일까. 그렇다기엔 냄새가 뚜렷한 게 근처인 게 분명하다. 옥상이래도 학교 안인데 뭐하는 건지. 휘말리고 싶진 않았지만 일이 더 커지는 게 귀찮았으므로 지구는 뒷머리를 거칠게 긁적거리며 바닐라향이 뚜렷하게 나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확실히 구석으로 가니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잿빛의 소녀가 눈에 띄였다. 그것이 시야에 들어오자 확 풍기는 페로몬의 체취에 지구는 인상을 쓰고 임시 방편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싶었지만 신사적으로 참아 내어야지. 물었던 것을 도로 제자리에 넣어두고 곽은 주머니에 넣었다. 지구는 웅크리고 있는 작은 그녀에게 다가가 같이 쪼그려 앉아 고개를 기울여 그 학생의 숨은 얼굴을 들여다보려하며 입을 열었다.
"뭐하냐."
언뜻 보이는 사하의 이마에 검지와 엄지로 딱밤을 놓으려 시도하며 나른한 목소리로 짧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페로몬의 체취가 진득하게 풍겨와, 지구는 습관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참아야 되지, 내가 또.
결국 혼자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이 그리 좋은 습관은 아니었다. 허나 어쩌겠는가. 적어도 지금의 하늘에게는 주원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기엔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은 그대로지만, 자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지가 마련이다. 그 와중에 늑대임을 부정하는 이유는 그저, 많은 것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믿고 밀어주는 부모님에게도, 자신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준 선생님에게도,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피아노에게도. 그런 속마음은 애써 씹어버리며 하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아리를 하지 않다보니 이런 곳이 있다는건 몰랐는데, 다음에 내키면 또 놀러와도 되나요? 선배의 조언은 별개로 치고, 이렇게 인연이고 알아가는 거 아니겠어요? 아. 부원이 아니면 못 오나요? 아. 그러면 아예 못 들어올 것 같은데. 저, 동아리는 못해서."
부원이 하나. 어쩌면 다른 부원이 정말로 필요할지도 모르나, 자신은 동아리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즐거운 것을 하는 부. 자신이 들어가게 되면 필시 이 선배에게 있어서는 즐겁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하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주원도 더이상 하늘의 의견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는지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였다. 결국 주원의 자기멋대로의 행동에, 자기 의견을 부딪쳤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진심도 있는 법. 미움 받더라도, 이렇게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라고. 주원은 생각했다.
"아냐아냐. 어어어언제든지 와도 된다구? 거기에 조오오오금만 더 인심써서 이름만이라도 올려주지 않을래..? 유령회원이라도 좋으니까..!"
주원은 간절한 얼굴을 하고 두 손을 비비다가 이내 "푸하핫." 하고 웃으며 "장난이야. 하지만 정말 언제든지 와도 되니까. 언제나 있는건 아니지만." 하고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