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선하의 뒤쪽에서 비치는 빛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하다. 희망의 빛이다.
"그럼 너한테 배워볼까. 물에 뜨는 거."
장난스럽게 얘기한다. 반쯤은 진심이지만, 나머지 반은 농담이었다. 대회 준비로 바쁜 사람 시간 뺏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놀러가도 방해 안 하고 초심자용 풀에서 벽 잡고 발장구나 조금 치고 있겠지. 많은 시간은 서서 선하 하는 걸 구경하게 될 것이다. 사실 수영장 냄새도 좋아하거든.
"턱까지 오는 물 정돈 괜찮아. 숨 쉴 수 있으니까."
이런 나 제법 용감해요. 칭찬도 아니고 다행이라 했을 뿐인데 금방 우쭐한 태도가 된다. 이상하네. 오늘 처음 만난 건데 꼭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지. 아무리 외부활동이 잦아도 이런 애가 친구가 없는 게 가능한가? 사하가 홀로 고민에 빠졌다. 많고 적고는 주관적이니까, 곧 개인의 판단이겠거니 넘겨버린다.
"못 할 건 없지. 지금도 그럴 수 있는데?"
짐짓 으스대는 표정으로 어깨 으쓱이며 말한다. 지난 번 재벌 놀이의 여파가 덜 가셨나. 근데 거짓말도 아니고, 나쁜 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친구 손에 간식 좀 들려보내겠다는 건데 좀 거들먹거리면 어떤가 싶다.
"말이 그렇게 되네."
사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와 입가가 모두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입술을 꼬집어주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공통점이었다.
"나는 영화감상부. 근데 영화 추천은 너무 기대 안 하는 게 좋아. 나는 아무거나 잘 봐서."
저는 재밌게 봤는데 추천받은 친구들은 미묘한 반응이었던 영화가 꽤 됐다. <못 만든 영화도 욕하면서 보면 재밌던데.> 얘기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만 받아서. 사하가 머쓱하게 웃는다.
무슨 말이 오간 것인진 알 수 없었으나 상담실에서 나온 하늘의 표정은 그리 개운한 편은 아니었다. 어쩌면 심각한 이야기를, 어쩌면 정말로 형식적인 말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개운하지 못한 표정을 관리하려는 듯, 하늘은 자신의 뺨을 톡톡 쳤다. 어느덧 방과 후 시간이었고, 야자가 면제 된 하늘은 얼마든지 집에 갈 수 있었다. 일단 책가방을 가지고 온 후에 생각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은 1층에서 3층을 향해 계단을 오르려고 했다.
3학년 교실이 있는 2층 계단을 지나는 도중, 하늘은 올라가는 것을 멈추고 잠시 창 밖 풍경을 바라봤다. 특별히 뭐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지나다가 잠시 멈춰서서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누군가가 지나가는 것을 못 볼 수도 있는 법이었다. 창가를 향해 걸어가다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며 하늘은 깜짝 놀라 몸을 옆으로 치우려고 했다.
"아. 죄송합니다. 부딪친 곳 없었죠?"
여긴 3학년 교실이 있는 라인. 즉, 여기서 만나는 이는 선배일 확률이 높았다. 하늘은 바로 사과를 하며 고개를 돌려 누구인진 확인하려고 했다. 아는 이라면 괜히 더 사과를 할지도 모르고, 모르는 이라면 더더욱 사과를 할지도 모른다.
오늘의 '아무튼 즐거운 것을 하는 부'의 활동은 바로 인터뷰다. 우연찮게 만나는 학생을 만나 이것 저거 물어보며 학교생활에 관한 것을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고민이 있다면 그 고민을 잘 들어주고.... 그 다음은 바로 '아무튼 즐거운 것을 하는 부'로 입부를 시키는 것이다....! 새카만, 아니 새하얀 속셈을 가지고 복도를 걷던 도중 옆에서 튀어나온 학생과 부딪칠뻔 했지만 주원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 청춘코메디에나 있을 법한 서로 부딪치고 프린트를 떨군 후 줍는걸 도와주는 그런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서로 프린트를 들고 있지도 않았지만.
"어어. 괜찮아. 너는 다친데는 없고?"
주원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기에 가볍게 대꾸하고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잠깐. 우연히라면 지금 아닐까? 좋아. 해보는거야!'하고 가던 길을 멈춰선 뒤 하늘에게 말을 건다.
"너말이야.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
지금 보니, 하늘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운 것 같기도 하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