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히 하늘의 시선이 명찰로 향하려고 했다. 3학년이라는 것을 파악했다면 아마 자신도 모르게 조금 몸에 힘을 줬을 것이다. 물론 3학년을 힘들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상이니까 어느정도 예의를 갖출 생각이었다. 아무튼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늘은 괜히 자신의 주머니를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핸드폰, 이어폰, 지갑. 모든 것이 다 제대로 있었기에 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아. 네. 딱히 야자 안해서, 시간은 있는데요. 무슨 일인가요?""
시간이 괜찮냐는 그 말에 하늘은 별 생각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지금부터는 자신의 자유시간이었고, 오늘은 음악실에서 연습할 예정이 없었다. 애초에 다른 동아리가 쓴다는 것 같으니 자신이 쓸 수도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콩쿨도, 대회도 잡혀있지 않았으니, 적당히 군것질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밤이 되면 잠깐 나가서 별을 보다가 돌아와서 잠을 잘 생각이었으니 시간은 널널했다.
야, 너도 할 수 있어,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 익숙한 연호의 속닥거림에 옆구리라도 찔린 양 까르르 웃어대는 새슬이었다. 네 발로 땅을 기어 달리는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늑대처럼 재빠르게 달리지는 못 하겠지만, 양도 어쨌든 본래 네 발로 걷는 생물이니 틀린 모습은 아닌가. 키득거리며 자신의 모습을 고이 접어 묻는다. 호야라서 가능한 걸걸, 하지만 네 발 달리기 시합이 하고 싶다면 연습은 해 볼게.
새슬은 조용히 나무에 기대 앉아서, 소원을 적는 연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휘갈겨 적고, 정말로 간절한(그것은 자신이 소원을 비는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모습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을. 둘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서, 쪽지에 적힌 연호의 소원이 무엇인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벚나무만 한 눈사람ㅡ호야가 그런 소원을 비는 목적은 뭐야?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상상을 제대로 펼쳐 볼 겨를도 없이 연호가 돌아와 앉는다.
소원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물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새슬은 가만히 웃는 것을 택했다. 평소와 다른 연호의 이질적인 모습을 봤기 때문일 수도, 그냥 그리 궁금하지 않았을 수도, 어쩌면 그녀의 단순한 변덕일 수도 있겠지. 호야의 소원, 이뤄지면 좋겠네! 특유의 나른한 어투로 중얼거리면서, 기지개를 쭉 켰을 뿐이다.
“낮잠은 어때~? 나, 조금 졸린데.”
녹빛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이며 연호를 보더니, 헤헤헤, 하는 천진한 웃음소리와 함께 담뿍 휘었다. 봐봐, 날도 좋고, 바람도 솔솔 불고오.
“아님ㅡ 벚나무 위에 올라가서 낮잠자기.”
그것도 싫으면, 꿈 속에서 만나서 하늘 날아보기ㅡ. 장난스레 조잘거리는 목소리에는 이미 하나둘씩 졸음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앗..어..아앗.. 크윽 ㅠ▽ㅠ감..감동..첨에 웹박수 이름에 지구가 들어가있어서 너무 당황했어요 지구? 아 푸른별 지구를 말하는 거구나 싶었는데 진짜 인간 지구였습니다....... 크윽...... 청춘 사이에 끼고 싶어서 찔찔거리는 캡틴을 챙겨주셔서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큰절 받아주세요 센스쟁이..ㅠ▽ㅠ 챙김 받다니 저는 행복한 캡틴입니다.......선물도 센스넘치셔.....그그래서 누구실까요 ㅠㅠ▽ㅠ
주원은 허리를 숙여 명찰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똑바로 읽는다. 그 다음 허리를 편 뒤 하늘을 보다가 "흐음, 흐음." 하고 무언가 고민하더니.
"좋아. 오늘은 너로 정했다!"
하곤 하늘에게 어깨동무를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어두운 얼굴 하고 걷고 있으면 보는 사람들이 걱정한다? 괜찮은가? 하고. 뭔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데, 내가 들어줄게. 아, 내 이름은 남주원. 이미 명찰에서 봤겠지만."
이어 하늘이가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오늘 내가 너의 카운셀러가 되어줄게. 마침 오늘 누군가를 인터뷰할 생각이었거든. 그게 누구든간에. 그런데 넌 어딘가 고민이 있어보이기도 하고, 흥미가 생겼거든. 우리 부실로 가자!"
하곤 막무가내로 하늘을 '아무튼 즐거운 것을 하는 부'의 부실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만약 하늘이가 따라온다면, 하늘이가 따라온 아무튼 즐거운 것을 하는 부는 동아리방 치곤 가장 구석의, 다른 동아리방의 반쯤 되어보이는 크기의 교실일 것이다. 교실이라고 하기도 뭣한것이, 본래는 창고로 쓰려고 했던 남은 방을 동아리실로 쓰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작은 캐비넷, 소파, 의자, 책상 등 필요한 것은 구비되어 있었다. 그덕에 장소는 꽤 협소했지만.
>>270 제게 선물을 보내주신 분은 익명의 모브 여학생이 지구의 마니또가 되어서 보내주셨다 생각하시고 보내주신 것 같은데 (아이디어 진짜 천재같다구 생각합니다..) 그거랑 별개로 마니또가 아니더라도 진짜 익명으로 선물을 줄 수도 있겠죠?ㅎ▽ㅎ 학교니까요! 학교에서 익명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건 자유죠 ㅎ▽ㅎ!!!
하늘은 침착하게 이 순간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위해 침착해지려고 시도했다. 메조피아노, 피아노, 피아니시모, 디미누엔도, 데크레센토, 크레센도, 코모도, 돌체, 트란퀼로. 참으로 많은 음악기호를 떠올리면서 최면을 걸려고 하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가야하는 분위기가 된 것에 하늘은 순간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다시 한 번 음악 기호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려고 했다.
자신의 표정이 어땠는진 모르겠지만 어째서 갑자기 들어주는 사람이 생겼고, 카운셀러가 되어준다고 하고 인터뷰를 한다는 것일까? 그것도 모자라서 부실로 납치 비스무리한 것을 당하는 것에 하늘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어딘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부실 안에 들어가있었고, 그는 더더욱 당황했다. 뭔데? 여기? 여기 정말 동아리 부실 맞아? 책상, 의자, 소파, 캐비넷 등등 있을 것은 있어보였으니 맞는 것 같긴 한데 애초에 여긴 뭐하는 동아리인건데?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하늘은 이야기했다.
"일단 가자고 해서 오긴 했는데. 선배. 카운셀러는 뭐고, 인터뷰는 또 뭔가요? 고민이라니. 고민까지는 아닌데 아무튼 뭐예요? 대체. 여긴 어디고요? 그리고 무슨 인터뷰를 하려는 거예요?"
피아노 관련인가? 그런 김칫국을 먹기도 하면서 하늘은 괜히 머리를 긁적이면서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인터뷰라는 거 여러 번 해보긴 했지만 우선 상대가 인터뷰가 괜찮은지부터 확인을 해야한다고요. 그래서 뭘 알고 싶은 거예요?"
거의 납치하다시피 하늘을 부실로 데려온 주원은 누가 있나 없나 문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좌우를 살핀 뒤 부실의 문을 조심히 닫는다. 이어 캐비넷을 열고 "그게 어딨더라~"하고 뒤적거리던 주원은 적당한 판과 종이. 그리고 펜을 꺼낸 뒤 하늘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찌 보면 카운셀러나 인터뷰가 아닌, 취조처럼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으응? 무슨 인터뷰? 글쎄. 그냥 이것 저것?"
주원에게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그것이 바로 '아무튼 즐거운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눈 앞의 남학생의 이름과 학년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인터뷰를 여러번 해봤다고? 너 대단한 사람인가보구나! 오늘 첫 물고기가 대어일줄이야. 운이 좋은걸?"
주원은 실실 웃으며 펜을 가볍게 돌린다. 그러다 뚜껑을 찰칵 누르고 판 위의 종이를 톡톡 치며 "으음." 하는 소리를 내다가
"이것 저것 알려줄래? 좋아하는거나, 관심 있는거나, 취미라던가, 지금 안고 있는 고민이라던가."
하고 하늘에게 묻는다. 그의 태도는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하늘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것으로 봐선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의미로 하늘은 강하게 두 손을 휘저었다. 이것으로 확실한건 이 선배는 자신에 대해서 알고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 피아노 관련이 아니로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며 괜히 김칫국을 마신 하늘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안한 마음에 오른쪽으로 눈동자를 데굴 굴리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물음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하늘은 주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인터뷰를 한다더니, 이건 그냥 신상 조사가 아닌가 하는 물음에 하늘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딱히 숨기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대답을 해볼까 싶어 하늘은 하나하나 물음에 대답했다.
"피아노를 좋아하고 그 관련으로 관심이 있어요. 취미는 피아노 연주라던가, 자전거 타는거 좋아하고, 음악 듣는거 좋아하고 고민은 프라버시잖아요. 선배가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저는 선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걸요. 그러니까 그건 패스할게요."
살면서 어떻게 사람이 고민 한 번 안하고 살 수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이야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초면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늘로서는 조금 힘든 일이었다. 때로는 그조차도 다른 이에게 민폐가 될 수 있는 법이었다. 설사 이야기한다고 해도 친분이 있는 이, 정말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 그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며 하늘은 괜히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굳이 이야기하라면 왜 이런 것을 묻는지 궁금한데 답해줄 수 있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사적인 개인신상에 대해서 하나하나 질문받는 것은 또 처음이거든요."
주원은 나름 정곡을 찌르는 대답으로 응수했다. 학교에서 인터뷰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면, 성적 우수자. 혹은 특기생일테니까. 그중에서도 특기생으로서 인터뷰를 많이 받았다면, 그것은 정말로 유망주일 뜻일테니까 말이다. 주원은 하늘을 보곤 어딘가의 유망주려나, 하고 생각했다.
"피아노? 피아노 연주? 잠깐, 그러고보니까..."
별로 학교의 소문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선가 2학년중 굉장한 피아니스트가 있다. 라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늑대인지, 양인지, 어느쪽도 아닌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지만 학생들 사이에선 '역시나 늑대겠지.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으니까!'하는 이야기를 쉬는시간에 슬혜에게 연락을 보내던 도중 흘려들었던 기억이 난 것이었다.
"너구나! 그 대단한 2학년의 '늑대 피아니스트'가!"
주원은 실실 웃으며 하늘을 보곤 펜을 휙휙 돌렸다.
"걱정하지 마. 나도 늑대니까. 아, 난 너처럼 대단한건 아니고. 그냥...."
하늘의 태도는 꽤나 주원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주원은 그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하늘의 심기를 건드리는 양 말했다.
"아무튼! 부럽다. 난 너처럼 그렇게 드러나는 '재능'이 아니거든. 이야~ 이런 거물을 만나게 될줄이야. 오늘은 운이 좀 따라주는걸?"
사하가 교실 문을 열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고 책상 쪽을 바라봤다. 존재감을 뽐내는 저 하트무늬 포장지가 제 것이 맞나 싶어서.
올해도 어김없이 마니또 철이 다가왔다. 세 번째면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매번 마주칠 때마다 놀랐다. 당연히 좋은 의미의 놀람이다. 포장지를 뜯기 전, 편지를 먼저 봤다. <선배님이라 해놓고 똑같은 3학년이면 배신감 쩔겠는데.> 대답해줄 사람도 없는데 혼자 중얼거린다. 편지를 가방에 넣고 나서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눈에 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보니까 정 드는 것 같다. 조심조심 뜯어 접힌 자국대로 접어 또 가방에 넣었다. 상자를 여니 나오는 건 자두가 올라간 케이크. <나 자두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지?> 역시 대답은 돌아올 리 없다. 고개를 두리번거린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케이크를 빤히 보던 사하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고민 중이었다. 참고로 행복한 고민이다. 당장 먹어서 지금의 행복을 쟁취할 것이냐, 아껴 먹어 미래에 행복할 것이냐. 고민은 짧다. 사하가 케이크를 한 입 물었다. 막말로 내가 3분 후에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알아. 자두야 원래 좋아하고, 생크림에 박힌 초코칩은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맛있는 거랑 맛있는 거? 당연히 더 맛있는 거. 기대한 것보다 과분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나 방금 하루치 행복 다 채웠는데.
책상을 뒤적거리던 사하가 수첩 한 장을 죽 찢었다. <이불아, 너 뽀송뽀송하겠다. 나 자두 좋아해. 잘 먹었어. 이건 너 먹어.> 쪽지 접어 서랍에 넣고 옆에 새콤달콤 딸기맛 두 개를 놓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