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최악일지도 모른다. 아니, 최악이 분명하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무겁고 엉겨붙은 공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이 '정신을 잃은 척'이라니! 난 제대로 사과해야 했다. 이 사태에 대해서. 그녀의 목에 남긴 상처에 대해서도. 받아들여주었음에도, 끝까지 행하지 못한 것에대해서도.
하지만.
나는 겁쟁이다.
위로 받는 것도 두려워서. 경멸 받는 것도 두려워서.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으리란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 속내가 두려웠다. 내가 읽게 될 그녀의 진심
눈을 감고.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이 상황이 그저, 흘러가기를 바라는동안 그녀는 나의 귓가에 장난스럽게 손님을 초대해 놓고 먼저 잠들어버리면 곤란하다 말한다. 그 말대로다. 지금이라도 나는 고개를 들고, 말해야 했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하지만 마치 내 몸은 누군가에게 속박된 것 같이 손끝도, 입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그래. 거짓말이야. 나 스스로가 나를 묶었을 뿐. 식은땀이 몸을 빠른 속도로 적셔가고 마땅히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누군가가 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목석처럼. 인형처럼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을 뿐이다.
얼어붙어있다기엔, 부끄러움과 수치로 온 몸이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속았을리가 없다. 귓가에 나지막한, 시트러스향이 아직 남은 목소리가 침대에세 자야하지 않겠냐며 속삭인다.
분명 그 만월의 시간은 끝나버렸고, 그녀의 약이. 나의 패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터임에도 나는 왜 아직 그녀로부터 새콤달콤한 향기를 맡아버리고 마는 것일까? 마치 '각인'된 것 같이.
끝까지. 겁쟁이인채로 아무것도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나는. 그저 그녀가 그대로 떠나갈 때 까지 그 자리에 얼어붙은채로. 화끈거릴 수 밖에 없었다.
목 뒤에 손톱자국을 남긴 고양이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자.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그 문을 닫는 것을 기점으로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적어도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 소리쳤어야 했는데, 그만 본능적으로 부끄러움을 그 어색함을 난 참아내지 못한 것이었다.
이 감정을, 이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어떻게든 분출하기 위해 벽을 쿵쾅치고 책상을 쾅쾅 치다 침대에 구르며 이불을 뻥뻥뻥뻥뻥 찬 것은, 비밀이다.
"...열쇠..."
그러고보니, 그녀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열쇠를 돌려달라고? 아니.
사실, 그대로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떻게 처분하든. 슬혜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대로 열쇠를 가져갔다.
베개를 끌어안은 채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지만, 내 눈은 천장을 보는 것이 아닌 방금 전까지의 시간을 계속, 되뇌이며 회상하고 있었다.
안돼. 이쯤 해야한다. 이러다간 층간소음으로 신고당할지도 몰라. 나름 비싼 곳이라 방음은 철저하긴 했지만 그만큼 내 목을 찢을정도로 강하게 소리쳐버린 것이었다.
"아................."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것 쯤은, 알고 있다. 이만큼 뜨거운걸.
아무렇지 않은걸까? 슬혜는? 그저 한 순간의 헤프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단지, 늑대와 양의 단 한 순간의 실수같은? 그냥 서로 위험한 순간에 필요한 것을 주고 받은 사무적인 행위로?
...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고 뭐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해도. 그리고 내가 아닌 그 누군가였어도 똑같은 결과였다고 해도. 아니, 누군가는 나보다 더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었을지 모르더라도.
...그래도, 나였고, 그녀였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안녕. 잘 지냈어? 하고 인사를 하는 행위는, 이제 불가능해.
...이미 일어나버린 이상은. 카펫 위에 포도주를 쏟아버린 이상. 그 자국은 지워지지 않아.
//막레로 갱신! 슬혜주 정말 즐거웠어요. 마치 저한테도 하룻밤 꿈처럼! 으.... 뭔가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게 계속 한으로 남지만... 솔직히 슬혜여서, 슬혜주여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D 지금 일상 끝났는데 다시 돌리고 싶어요. 끝내기 싫다. 으아ㅏㅏㅏㅏㅏㅏㅏ 다음 언제야!
모름지기 사람이란건 태어나서부터 자신의 명을 다할 때까지 무수한 사건들과 상황 속에 휘말린 채로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은 무대요, 주목받는 이는 배우, 그것을 지켜보는 이는 관객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많은 상황 속에서 당연스럽게도 사람은 웃다가도 화내며, 울다가도 즐거워하곤 한다.
주어진 모든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처해진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려움, 연민, 애정, 공포, 행복, 불만, 사랑, 애달픔, 분노... 그 외에도 수많은 가면을 쓰고서 자신에게 할당된 극을 소화해냈다.
하지만 나에겐 그만큼 어려운 것도 없어...
난 진심으로, 지독할정도로 연기에 서투른 편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무대에서 화려한 빛을 뽐내고 있을때, 저마다의 색으로 관객들을 휘어잡을 때, 나는 어둑한 배경 속에서 혼자서 세피아톤으로 삐걱거릴 뿐이었다.
하루는 그런 나에게 또래 나잇대의 배우가 말을 걸어왔다. 그 아이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희극도 비극도 모두 소화해내는 명배우였다.
-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왜 그렇게 힘이 없어? 걱정스러운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 내가 도와줄테니까!
나는 그 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나에게 주어진 극은 블랙코미디로 짜여진 무대가 아니었나? 정해진듯 움직이면서 가끔 멍청한 행동을 하는 모던풍의 시나리오가 아니었나?
마치 자신과 내가 같은 무대에서 연극하는 것마냥 행동하는 모습이 어쩐지 불쾌해서 손을 쳐냈다. 마치 내가 주어진 극의 할당량을 못채우고 있기에,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지도 못하기에 조롱하는 것마냥 느껴졌다.
나는 나의 연기가 당연하다고, 무난하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아니었나보다. 나에게 채워진 색조가, 모노크롬의 배경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세상은 더 다양한 색을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서 얼마나 더 화려해지라는 거야? 여기서 얼마나 더 세련되게 굴라는 거야?
그래서 내 몸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나이에 맞지 않는 분장을 하고, 화려하게 수놓은 옷을 입고서, 단아하게 쪽을 지은 머리카락에도 글리터를 훑어내며 나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고선 나에게 주어진 무대에서, 같은 배우들이 함께 움직이는 세상에서 똑같이 움직였다. 진한 원색은 아니었지만 눈에 띄는 형광빛으로 아름다운 무도회의 한켠에서 사람들과 함께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어쩐지 나에겐 가식처럼 느껴졌다.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억지로 과장된 행동을 하는 것 같았다. 점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맞지도 않는 극에 배정된것 같아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모두들 그런 과장된 나의 모습을 좋아했다. 잔잔한 나의 어릴적과는 다르게 눈에 띄게 변한 세상은 언제나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관객들은 평범함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겐 색이 칠해질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어째서...?
나에겐 그런 모두가 양이었고, 늑대였다. 푹신한 칭찬도, 날카로운 비난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모두와 같은 무대에 서있었다.
그때쯤 깨달았을까? 세상에는 웃지 못할 희극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이 세상을 부정할 수 없음을...
독백에 쓰인 'Ham actor'라는 것은 옛날에 분장을 지울때 쓰는 화장품이 비쌌기에 돼지의 지방질 같은걸로 클렌징효과를 냈다 해서 붙여진 'Hamfatter'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해! 그래서 대부분 연기가 서투른 배우를 칭할때 쓰는 말이기도 하고, 가끔 과장된 연기를 한다고 할때도 쓰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