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을 바라보는 사하의 얼굴엔 웃음이 없다. 사하는 해인의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진심 없이 굴렀던 건 아니라고 했지만, 매순간 진심이었다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사하는 여전히 해인을 알지 못한다. 달 아래서 들은 얘기는 때늦은 고해였을 뿐이다. 그러나 사하는 해인이 끌어가는대로 가서 안긴다. 딱 하나 있는 동아줄을 걷어 찰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자존심 문제를 들먹이는 것도 의미 없었다. 양은 외로우면 죽어. 어쩔 수 없는 거야. 합리화는 언제나 효과적이다.
"나는 네가 옆에 있는 걸로 충분한데."
해인의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인다. 지금처럼 안아주고, 아까처럼 다가와 손 잡아주면 됐다. 그럼 아주 혼자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으니까. 여전히 외로워도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으니까. 근데 너는 다르잖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의 좋은 점은, 잘 알지 못해도 그럭저럭 아는 척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랑의 속마음과는 정말 관계없이 하늘은 음악에 몰두해있었다. 오늘은 이 곡을 연주하고 싶다. 오늘은 음악실 쓸 수 있을까 등등. 한창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갑자기 자신의 몸이 흔들리자 하늘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정말로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몸을 아래로 푹 숙였다.
"으아! 지진이다!!"
허나 당연히 지진이 일어났을린 없었고, 아무런 흔들림도 없다는 것은 둘째치고 벌떡 일어서면서 떨어진 이어폰으로 인해 열린 귓구멍으로 비랑의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하늘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정말로 태연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안녕. 미안해. 미안해. 바로 눈치채지 못해서. 음악을 듣다보니 그만. 점심? 가볍게 해결했어. 그리고 지금은 쉬는 중이야."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괜히 더 환하게 미소를 짓는 모습이 누군가에겐 안쓰럽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관련은 절대로 인정할 생각이 없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자신의 같은 반 친구인 그를 바라보면서 역으로 물었다.
>>462 부탁하면 쳐주기도 하는데 아마 어느 정도의 친분은 필요할거야. 그냥 잘 알지도 못하는데 무작정 와서 쳐달라고 하면 뭐지? 이 사람? 이런 느낌으로 빤히 바라보기만 하고 거절할 가능성도 있어. 혹은 가예처럼 연주할 때 슬쩍 들어와서 연주 칭찬해주고 리퀘스트를 하면 기분이 좋아서 칠 가능성도 높고!
지진이라며 당황하는 하늘의 모습에, 티는 안 나도 오히려 비랑이 더 당황하며 생각합니다. 내가 이 교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놀라는 거면 몰라도 어째서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놀리는 입장에서야 반응이 크면 놀리는 보람이 있지만 이건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조용해졌다 태연하게 다시 앉고 웃으며 말하는 하늘의 말을 듣고 비랑은 깨달았습니다. 당연히 이 모든 게 진짜 오해라는 것이겠죠?
'아뿔싸! 연기에 속았구나. 이렇게 크게 놀라는 반응을 보고 나서 그 아무말 노래를 들었냐고 물어봤자, '놀래키는 것도 모를 만큼 집중하고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아느냐'라는 반응이 돌아오면 대답할 방법이 없어. 진짜로 지진으로 오해할 정도면 엄청 부끄러울 텐데 그런 티도 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니 분명 계획적인 연기지만... 아는 게 없어서 섣불리 심문할 수가 없네. 낭패야.'
어림도 없습니다. 상대의 겉모습 하나로 혼자 심리전을 생각하고 있던 비랑은 본인도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의자를 끌고 와서 앞에 앉고 대답하려다 흠짓합니다. 하늘이는 비랑의 이름을 어떻게 알까요? 그야, 같은 반이니까요. 하지만 비랑이는 하늘이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위기입니다! 설마, 이것까지 읽고? (그렇지 않습니다)
"으, 으음. 오늘은 급식 메뉴가 맘에 안 들어서 아직 안 먹었는데. 그냥 돌아다니면 배고프니까 가방에 있는 과자라도 먹으려고 왔지."
일방적인 오해긴 하지만 심리적 약점을 잡힌데다 완전히 휘말리고 있어요. 비랑이는 하늘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말을 얼버무리며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합니다.
"다른 걸 같이 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교실에 앉아서 음악만 들으면 심심하지 않아?"
그와 동시에 의자에 앉은 상체를 책상 쪽으로 뻗으면서 시선을 내립니다. 책상 위에 명렬표나 이름이 적힌 물건 같은 게 있는지 슬쩍 살피려는 느낌이네요. 좀 가까워져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긴 하겠지만요.
>>499 ???? 양아치는 고작 손 봉쇄한거 가지고 속박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 (다급) 육체적 속박은 어... 본디지 같은 포박같은걸 싫어하는 거구... 손 봉쇄한건 그냥 좀 '아쉽다' 정도? 정신적 속박은... 다들 알만한 집착인데 딱히 주원이가 그정도 발언 한거 같지도 않구?
자신은 괜찮으니 어서 먹으라고 권하면서 하늘은 편안한 어투로 대답했다. 역시 다른 반 아이들보다는 같은 반 아이와 대화하는 것이 조금 더 편해보이나 그것이 절대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그냥 같은 반이니까 조금 더 편하다는 느낌이었고, 그 때문인지 하늘의 표정 역시 조금은 풀려있는 상태였다.
"......?"
갑자기 자신의 책상 쪽으로 상체를 당기는 그 모습에 하늘은 살며시 몸을 뒤로 움직였다. 뭔진 모르지만 갑자기 훅 들어오는 느낌에 당황한 것도 있었으나, 자신의 자리에 뭐가 있나 싶어 그의 시선이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하지만 특별히 보이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우선 하늘은 물음에 대답했다.
"전혀. 난 피아노가 좋아서 말이야. 피아노 곡을 듣다보면 시간이 어느 순간 훅 지나가거든. 아. 지금 들은 곡도 피아노곡이야. 알라딘의 그 유명한 OST를 커버한 곡."
다시 한 번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하늘은 소리없이 웃어보이면서 의구심을 느꼈던 그 부분에 대해서 바로 비랑에게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