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연주를 좋아하는 이라면 얼마든지요. 반대로 듣기 싫어하는 이에게는 굳이 연주하지 않지만요."
관심이 있다면 들려주나,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들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어떻게 보자면 그의 가치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어쩌면 무정할 수도 있으나, 굳이 싫다는 이에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내심 보이면서 그는 곧 들려오는 말들에는 소리없는 웃음을 냈다.
"동아리에 들어가면 좀 더 조화롭게 연주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회나 콩쿨 같은 것이 찾아오면... 솔직히 피아노에 집념하게 되거든요. 그러면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잖아요? 그러니까 동아리에는 들어간 적 없어요. 못 들을 수밖에 없죠. 당연히."
피아노를 혼자서 독차지할 순 없고, 자신이 연습하고자 하는 곡만 죽어라 혼자 연습할 순 없는 거 아니겠냐고 말을 덧붙이면서 그는 고개를 살며시 도리도리 저었다. 물론 동아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자신이 그들 입장이라면 자신 같은 부원은 그다지 받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가볍게 치며 반대로 음을 천천히 내렸다.
"이름과 얼굴은 알고 있어요. 작년에 학생회장이었잖아요? 아무튼 마찬가지로 반가워요. 사실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 찾아오는 손님은 드물어서. 아무튼 그렇게 말해줬으니 편하게 있을 참이에요."
물론 그렇다고 온전히 편하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만의 공간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어느 정도 힘이 들어간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는 오히려 되물었다.
금방이라도 물어버릴 것 같은 그를 되려 도발하듯 그녀의 손길이 금빛 머리카락에 엉겨붙으려 했었다. 물론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 안전을 생각한 건지, 아니면 그녀의 스킨십과 가벼운 터치 덕분에 어느정도는 버틸만 했는지, 그리 간단하게 짐승의 영역으로 들어가진 않으려던 그가 어깨를 잡으며 살짝 떼어내자 그녀는 여느때와같은 차분한 미소로 응수했다.
"후후후후... 제 자신도 믿지 못하는데 누굴 믿겠나요? 그래도, 무턱대고 물어뜯는 여느 늑대들 같진 않으셔서 다행이네요... 아아, 어찌나 살벌하던지~ 차라리 독을 머금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는걸요~"
막 나올즈음만해도 축 늘어져있던 그녀의 몸도 이젠 어느정도 괜찮아졌다 볼수 있었다. 일단 맥을 놓지 않을 정도의 갈증은 채워진 기분이었으니까,
"이런 날보다... 조금 더 얌전한 때에 와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방금 눈 앞의 이가 웃었나? 모르겠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몸에 꽂혀오는 시선이 사뭇 다르게 바뀌었다. 살살 달래어 유혹하듯 달콤하게 감겨오는 목소리.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한 번, 저를 대하는 것과는 퍽 다르게 시리게 차가운 마주친 눈동자의 색. 두 번, 손등 위를 지나는 듯 싶더니 단단히 옭아매듯 얽혀오는 손가락. 만들어낸 예쁜 웃음. 세 번, 훅 끼쳐오는 낯선 체향, 날카로운 속삭임.
“....응.”
홀리듯 대답했다. 외로운 건 싫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렇기에 정처 없이 어딘가를 떠돌았다. 생각하기 싫어서. 누군가의 온기에 기대 볼 수도 있었으나, 얄팍한 애정으로 구속당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외로운 토끼가 되어 죽어 버리는 것이 나아, 그렇게 생각했는데. 비참한 것은, 지금 생판 모르는 이의 손에 붙들려 있는데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잡힌 손을 내쳐 버릴 생각은 티끌조차 없고, 조금 더 붙어 있고 싶다는 욕구가 목구멍에 울컥거리는 것. 하. 희미한 실소가 숨소리에 섞여 터져나왔다.
“심술쟁이네. 토끼는 술래 못 해.”
늑대에게 잡히는 순간, 토끼는 먹혀 버리는 거야. 뼈만 남은 채 늑대를 잡으러 뛰어다닐 토끼는 어디에도 없지. 혹여 운 좋게 술래가 된다고 해도, 그건 변덕스런 늑대의 유흥일 텐데. 마찬가지로 속삭였다.
>>379 음.........................제가 54초 정도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본 결과....-▽- 흑흑 놀리지 마세요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가 있을거에요.. >쥐구멍 들어오지 마시오>.
>>380 제가 원래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끼면 주절거림이 심해져서 ㅠ▽ㅠ흑흑.. 제가 혼자 삽질하고 오해하지 않게 상냥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규리주ㅜㅜ.... 다들 너무 착하셔가지구..제가..몸 둘 바 몰라서..혼자..앞구르기 옆구르기 하는 거랍니다.. 규리주가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시면 좋겠네요.
그래. 그는 확실하게 말했다. 도와주겠다고. 그가 다가가는것을 그녀는 막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에 남아있는 최소한의 이성으로,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이성이 조금만 더 남아있었더라면 그녀에게 눈물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을텐데. 지금은 불가능하다는걸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있었다. 구태여 불가능한 꿈을 꾸는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 ......그래. "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의 복잡한 상황을 아랑이 알고있을까, 그런것을 예상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충동을 억누르는것 만으로도 충분히 고생중이었다. 이내 그것마저, 부숴질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아랑이 요구한 대로 그녀의 품 안으로 들어가서 팔을 그녀의 목에 둘러 감싸안으려 했다. 가까워지자 그녀의 향이 참을 수 없을만큼 강해졌다. 코가 그녀의 헤이즐넛 초콜릿 냄새로 절여진것 같았다.
" 대신 너도... "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그의 목이 조금씩 내려갔다. 더 이상 참는건 불가능하다는듯이, 하지만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망설임이 있는 것처럼. 아주아주 천천히.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고개가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내려갔다. 느리지만 확실한 그 움직임은, 그가 어떤 움직임을 취하고 있는지 그녀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 나를 조금 도와줬으면 좋을것 같은데... "
이성. 그래. 그 마지막 이성. 밧줄이 점점 끊어지다가 마침내 한가닥만이 서로를 붙들고 버티는 것처럼,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이 그의 머리를 그곳에서 멈춰세웠다. 반쯤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내려가다가 우뚝 멈춘 머리는, 최대한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듯이 방향을 틀어 그녀의 머리에 기대려고 했다. 그녀의 목에 둘러져있던 팔도 느릿하게 움직여, 그녀의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칼을 쓸어내리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