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다른 과목을 문제집을 공부하려 했던 걸 수도 있겠지만 오늘만큼은 다른 이유였다. 귀에 익은 것 같기도, 지금껏 전혀 듣지 못해 새로운 것 같기도 한 선율이 귀를 맴돌았던 것이다. 여자는 음미하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결국엔 발걸음을 소리의 진원지로 돌렸다.
누가 피아노를 치고 있네. 현악부실과는 살짝 다른 분위기의 음악실을 둘러보다 피아노 위에 앉아 있는 연주자의 모습에 시선이 꽂혔다. 피아노를 치고 있네, 라며 입 밖으로 내뱉었지만 연주에 심취해 듣지 못한 것 같아 너른 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심취해 있으니 크게 나가지도 않은 음성을 듣지 못하는 건 당연한가. 그도 그럴게 본인의 눈에 상대방은 정말 자신의 연주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다가가는 것도 민망해질 정도로. 그 분위기에 반해 평소같았으면 바닥을 둔탁하게 두드렸을 굽의 소리를 낮추며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완주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쇼팽의 녹턴 2번은 서정성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연주를 발판 삼아 변칙적인 멜로디가 난무하지만 거기에서 비롯된 열렬함을 커버해야하는 난이도 있는 곡이었다. 진정성 있는 칭찬은 아끼는 편이었지만 자리를 떠나기 힘들었다. 악장이 끝을 맺으면 그제야 상대의 시야에 들어갈 만한 위치로 들어간다. 그리고, 너른 미소를 띄운 채 피아노의 몸체에 상체를 기대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한다.
지구의 입꼬리가 조금 실룩였다. 그를 웃게 한 것은, 나의 토끼가 그다지 어리석지 않다는 것. 결말을 모두 읽고 다시 첫장의 첫째줄로 넘기는 멍청한 짓이었다. 토끼가 도망치지 않을 것쯤이란 건 너무도 저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아니,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도망친다 해도 그가 반드시 잡아내었을 것이다. 사건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불량한 학생회장. 그거 정말 모순적이지 않나. 그는 그저 뛰어난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데. 그래, 그는 능숙했다. 무엇이든지. 그 사실이 어쩜 그리도 끔찍하던지. 비릿한 실소를 떨군다.
"토끼는 외로움을 많이 탄다던데."
그녀의 낮은 시선에 검게 담겨있을 지구는, 온데간데 없는 다정한 눈으로 당신을 내려다보고. 아까와는 사뭇 다른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지구는 새슬과 같은 자세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기울여 차가운 파도가 일렁이는 눈빛은 녹빛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홀로 남겨진 토끼는 외로워서 죽어 버리거든."
그런 말을 건네며 그의 너른 손가락이, 웅크리고 있는 새슬의 손등 위를 살금살금 걷다, 저항도 힘도 없이 잡히는 그녀의 한 쪽 손을 부드럽게 잡아들었다.
"그건 싫잖아, 토끼야."
그렇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웃음을 녹이며 그녀의 자그마한 손가락 사이사이로 지구의 너른 손가락이 간질거리며 파고들어간다. 깍지를 꼬옥 낀 손의 서로 다른 체온이 섞여들어가며 지구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눈꼬리를 휜다. 그리곤 단단히 쥔 깍지를 제 품 쪽으로 당기려 하며 가까이 닿을 새슬의 귓가에 나즈막히 속삭였다. "이젠 네가 술래야."
처음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둘째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의 말이 어떻게든 닿았는지, 아니면 그저 약자를 위한 예우였는지... 물불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야성적인 모습 없이 그는 그저 그녀를 일으키려고만 했다. 맞지 않는 것을 배우면 어긋나듯, 그녀의 생각 역시 차츰차츰 틀어지기 시작했다. 양으로서의 본능인 극도의 외로움이 얽혀 평소의 자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후후후... 속보이네요~"
실수로 엎어버렸던 레몬즙처럼 그저 시큼털털하다는 본분만 지키면 될것을, 흠뻑빠진 설탕 탓에 달큰함이 뒤섞인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늑대가 생각하는게 다 그렇죠, 그대야? 먹잇감을 독식하는 건, 모든 맹수의 염원...
...오늘은, 강아지 털냄새는 나지 않네요~ 정말 늑대라도 되어버린 걸까요~"
마치 정말 냄새를 맡는 것처럼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선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무엇이 그리 행복한지. 과해진 감정은 광기라 불리워도 되거늘... 이상하게도 그 선만큼은 넘지 않는, 하지만 누가봐도 위태로운 형태의 군상이었다.
사하의 옆으로 다가가자 이제 내 후각은 바닐라향에만 온 집중을 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짙은 향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머리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갈구하듯이 본능은 계속해서 사하를 어떻게던 잡아먹으라 지시하고 있었다. 나를 책망하는듯한 사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깊은 곳에서 올라는 혐오감과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나는 항상 주변 사람들을 상처밖에 줄 수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 내가 진짜 아무렇지 않아보여? "
잔잔하던 감정의 선은 이미 팽팽해져 있었고 사하의 그 말이 그 선을 한번 톡 건드렸다. 평소 같았으면 한번 요동치고 말았을 그것은 이젠 수없이 요동하며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혐오감, 분노, 죄책감들이 한데 모여 눈물 한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 ... 내가 망친 인생만 수없이도 많았어. 너도 내 옆에 있으면 분명히 망쳐버릴테니까. 나는 그게 두려워. "
뻗어온 손을 잡으며 이어진 사하의 말에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 위로, 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리고 나는 잡은 손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얘기했다.
이기적임을 알고 있다. 나는 지금 단순히 옆에 있을 사람이 필요한 것 뿐이지. 하지만, 하지만... 이미 가느다란 이성은 변명을 늘어놓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정도 기능에 불과하다. 상상친구라면 그 망상의 주인 옆에 있어주는 게 당연한 의무 아니던가. 그래, 그래, 그런 거다. 단순히 그런 이유다.
이미 해는 저물고, 태연한 달이 뻔뻔스레 그 자리를 차지했다. 네 하늘에도 달이 있는가, 그것은 모를 일이다.
"그러게, 아직 졸업은 멀었더라고."
위태롭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드물게 건조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원래 어떻게 웃었지? 그것 또한 모르겠다.
"..앉을까."
대답을 듣기 전에 운동장 스탠드로 향했다. 몸을 떨어트리듯 앉았다. 어차피 따라올 것이라 짐작했다. 최민규의 짐작이 맞다면, 아마 따라올 것이다. 그러길 바랬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
그리고 한쪽 손을 내밀었다. 잡아도 좋아, 하는 무언의 메시지다. 붙들어놓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것을 사용하는 자신을 조금이나마 싫어할 것은 아주 멀지 않은 미래의 일,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
조용히 연주를 마치며 그는 두 손을 가볍게 털어냈다. 다음에는 무슨 곡을 연주해볼까 생각하던 찰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뜨니 보이는 건 허리까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안경을 끼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자연히 명찰로 시야가 향했고 그녀가 3학년이라는 것을 그는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아예 처음 보는 이는 아니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작년 기준으로 전교회장이었으니까.
"아직 부족해요."
말은 그리 하나 좋은 평가에 기분이 나쁠 수 있을까? 그의 입가에 미소가 잠시 흘러내렸다. 허나 입술을 아래로 내려 미소를 잠시 지우면서 그는 숨을 약하게 내쉬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물을 것은 무엇인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정해져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신가요? 음악실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일단 아무도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실 누군가가 쓸 예정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가볍게 용건을 물어보지만 피아노에서 일어서진 않았다. 그 대신 고개는 그녀의 얼굴로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코피를 뚝뚝 흘리며 멍하니 자신을 주시하고 서는 사라. 그 모습을 시아는 잠시 숨을 멈추고 바라본다. 몸이 멀쩡하지 않다는 것은 굳이 저 자그마한 입술 사이에서 말이 나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춘 사이 고개가 기울어진 사라가 천천히 홀린 듯한 발걸음으로 다가왔고, 그것을 지켜보던 시아의 손이 툭 닿았을 때에 상황이 조금이나마 변했다. 자신을 밀어내려는 듯한 손은 힘이 하나도 없이 그저 얹혀진 체로 있었고, 애처로운 목소리가 사라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하.
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사라를 보는 순간, 타오르는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것 같아서 그랬던걸까. 아니면 그저 사라를 본 것이 반가워서 그랬던 것일까.
" 미안, 평소라면 네 말을 들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해줄 수 없을 것 같아. "
그치만 이대로 떨어져버리면 갈증이 심해질 것 같아. 그리고 코피를 줄줄 흘리곤 날 밀어내지도 못하는 너를 이대로 두고 갈 수 있을리가 없잖아. 이성과 본능 사이에 서서 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널 두고 갈 수 없어. 날 위해서도, 널 위해서도. 그러니까 네 말을 듣지 않는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 자, 일단 코피부터 닦고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내 기억엔 여기 근처에 공원이 있었어. "
손수건을 들고 나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를 하면서도, 말라가는 듯한 입술을 혀 끝으로 적신 시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사라의 코피를 조금씩 닦아내며 부드럽게 말을 이어간다. 따뜻한 사라의 피가 가느다란 손 끝을 적시기 시작했지만 손이 더러워지는 것 정도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듯 했다.
" 이럴 때에는 그냥 나한테 기대도 괜찮아, 사라야. "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에 얹혀진 사라의 손을 잡아주려 하면서, 힘없는 사라를 근처 공원으로 이끌려고 했다.
고해告解합니다. 나는 아직도 겨울을 살고 있습니다. 내 몸은 여러 차례 봄꽃을 맞이하였으나 내 정신은 아직도 성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산은 척박합니다. 생명의 가장 선명한 증거, 날숨조차도 희게 맺혀 사라져버리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 곳은 당신이 찾고자 했던 정답이 있는 곳입니다. 나는 당신이 결국 정답을 찾아냈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아니, 나 자신도 그 정답을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그런 뒤에야만 나 자신도 비로소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동백은 아름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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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은 명칭이라 생각한다. 늑대와 양이라, 아주 바보같은 명칭이다. 최민규는 최초로 이러한 이름을 붙인 이를 찾아내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로서는 드문 충동이다. 하지만, 그 만큼 그 이름이 싫었기에. 의도가 명확한 명칭이다. 포식자와 피식자, 먹는 자와 먹히는 자, 먹이사슬의 상위와 하위. 그리고 절대 넘지 못할 벽.
이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의 최민규는 조금 더 풍화하고 침식했다. 점점 더 둥글어졌다. 무른 부분이 깎여나가 단단해졌다. 단단한 것은 체념이었다. 단념이었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저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막연한 것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상반된 것이 공존하는 기묘한 암석.
주원은 굳이 말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그녀 말대로 어쩌면, 아니. 이미 당연히도 그 행동의 뒷면이 훤히 드러나 있을테니까. 마치 '라면먹고 갈래?' 혹은 '우리집에 고양이 있는데 보러 올래?' 같은. 그의 자취방에는 고양이는 없지만, 라면은 있다. 아니. 곧 고양이도 생기겠네.
그녀의 목소리는 혀와 정신마저 녹여버릴 정도로 달콤하고, 그 달콤함을 더욱 원하게 할만큼 상큼함이 뒤따라왔다. 그녀의 정곡을 찌르는 발언에 주원은 그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뱉어내는 거짓은, 분명 그녀라면 눈치챌 테니까.
"변명은 하지 못하겠네. 하지만 거기에 대답하진 않을게."
울먹이기 직전에 목소리를 내려 한 적이 있는가? 조금만 잘못 말해도 목소리가 어그러질 것 같은 그런 때. 조금만 어그러져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떨리는 때. 주원의 경우엔 조금만 어그러져도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그 늑대로서의 '재능'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주원은 품에 얼굴을 파묻어 오는 그녀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이대로 꽉 안아야 할까? 부서버릴 정도로? 도망치지 못하게? 꽉 끌어안은 채로 잔뜩 스스로의 '색'을 칠하고?
"아아.... 하아."
주원은 이 자리에서 행하고 싶은 그 모든 탐욕과 거무죽죽한 감정을 한숨으로 뱉어내고 그녀의 어깨를 잡은 뒤 슬며시 떼어냈다.
"일단, 가자. 날 믿으라고 하진 않아. 나도 날 믿지 못하겠고. 하지만 여기보단 나아."
그는 그녀를 부축하듯 그녀의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해 학교를 나와 자신의, '만약의 상황'을 위한 자취방으로 향했다.
>>335 '만약의 상황'을 위한 자취방은.. 캡틴주가 어마어마한 음란마귀라 그런 것이 연상되어서 그런데.. 자취방으로 같이 향하는 건 슬혜주도 동의한 부분일까요? 아무래도 남녀 청소년 둘이 자취방으로 밤늦게 향하는 것은......ㅇ<-< 그렇고..그런.. 꼭 장소는 상관없겠지만서도요.
아름다운 보름달이 뜨는 밤 아래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작디 작은 달은 왠일로 상심에 빠져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왜 이럴까. 분명 아침에 화가 건네준 억제제 3알을 빠뜨리지 않고 챙겨먹었는데, 혹시 한 알 더 먹어야 했던 걸까? 오늘따라 향이 더 짙은 것 같다는 화의 말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되었던 걸까? 아아, 들키면 안 되는데, 점점 사무치도록 외로워져서, 나도 모르게 그만..
늑대를 찾고 싶어.
그 순간 통제를 잃고 주변에 화악 풀리는 달달하고 포근한 향이 애타게 늑대를 불렀다. 울타리에 애써 가둬두고 있던 감정이 울타리를 뛰쳐나가자 순식간에 이성을 되찾은 그가 뒤늦게라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퍼져나간 향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어쩌지. 가족이 걱정할 텐데. 당분간은 통금 시간이 앞당겨지려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억제제가 든 통을 찾지만 자꾸만 손이 힘없이 미끄러진다. 몇 번 손이 미끄러지고 나서 겨우 찾은 통에는 억제제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 맞다. 좀 전에 만난 아이가 급히 필요하다고 해서 전부 건네주었지. 화나 경호원 씨는 항상 나를 위한 여분의 몫은 남겨두니까 당분간은 둘 중 한쪽을 대동하지 않은 이상은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것조차 무리겠네. 식은땀이 흐르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와중에도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던 그가 어깨를 붙잡히고, 뒤돌아 마주친 얼굴에 새겨진 표정을 보고, 그의 얼굴을 보고 점점 변하는 표정을 보고, 다급하게 나오는 말들을 듣고, 웃었다.
웃었다.
모든 죄를 포용하는 신처럼 웃었다.
아아, 그렇구나. 너에게도 내가 필요하구나. 괜찮단다. 어쩔 수 없는 거잖니? 마침 나에게도 네가 필요하니, 우리 서로 이 아름다운 만월의 밤 아래에서 서로를 위로해주자구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단다. 이 모든 건 너를 유혹한 나의 죄이니, 너에게는 아무 죄도 없단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 그가 신의 유혹에 넘어간 가엾은 늑대의 허리를 감싸고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에 맞춰 등을 토닥인 그가 달처럼 둥글게 휜 눈으로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분명 엄청 혼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편안하고 달콤한 향을 점점 진하게 풀던 그가 말없이 웃고만 있던 입을 조그맣게 열어 귀에 속삭였다.
"배고프면, 먹으렴."
#선하주야말로 불편하시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내일 여행 가서 여행 준비 때문에 바빠 답레가 좀 늦습니다..
아까 해인주가 꽤 명확하게 짚어주셨는데, 다시 불러서 인용해보자면 "그냥 흔히 학생들이 할 것 같은 풋풋한 연애 + 약간의 Deep한 스킨십"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약간의 깊은 스킨십이 뭐에요 할 수 있겠지만 "성적인" 묘사가 되지 않으면 됩니다. 대놓고 노골적인 묘사, 행위가 떠오르는 묘사, 또 정말 죄송하게도 직접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연인사이의 애무로 판단될만한 행동 지양 부탁드립니다.
어색한 기색도 없이 말을 붙이던 것도 너. 위협하던 것도 너. 같이 돌아가자 한 것도 너. 제게 해인은 뭘 하든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것 봐, 또 나만 엉망이잖아. 내가 쌓은 성벽에 있던 작은 문을 너한테는 열어주고 싶었는데, 문은 커녕 선 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게 너잖아. 너를 둘러싼 단단하고 견고한 포장 중 내가 열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잖아.
사하가 빈 손으로 축축한 눈가를 문질렀다. 고개를 젖히는데 헛웃음이 터졌다. 눈물을 떨어뜨리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더라. 무서워서 그랬다고. 애초부터 마음의 크기가 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을 파고드는 외로움이 극심해졌다. 잡아당기는 힘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대로 해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말했다.
아직 부족하다는 말에 하늘이 선배라고 부른 여자는 부정하려는 듯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가 그 끝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소위 늑대 쪽의 타고난 실력가를 따라잡는 것은 힘든 일일지 몰라도 가끔 알음알음 아는 사람을 통해 연주회를 다녀온 사람의 귀에도 수준급의 연주였으니까. 확실했다.
"정말 잘 들었는걸."
약하게 뱉는 숨, 다음에 올 나쁜 일을 예상한다는 듯한 기색이네. 티없는 면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하자니 현악부를 포함한 음악 관련 부서에 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고개를 가볍게 젓는다.
"아니, 난 기숙사에 가던 길에 모처럼 좋은 연주를 들리길래 가까운 곳에서 듣고 싶었어. 들려주는 거 좋아해?"
현악부 공연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 덧붙이며 너의 호불호를 물었다. 공간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기색이라 주관은 있는 애구나 싶어 명찰을 확인하며 살짝 웃는다.
"오늘은 음악실에서 별다른 활동이 없는 걸로 알아. 편하게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반가워, 하늘아. 나는 백가예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