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머리 꿇고 미안하다고 하는 것보다, 단지 한마디 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에서 더 많은 슬픔이 느껴진다. 이래서 싫었다. 표정 관리를 좀 더 잘했어야 했을까. 좀 더 둔감해도 될 텐데, 선배는 너무 민감해서 상처 입어버려. 설령 상대가 당신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해도, 당신이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해도 벌어지는 일이겠지. 아마도. 함부로 짐작하면 안 되겠지만...
“ ...그치마안, 소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는 게 좋다, 는 미신도 있으니까요. 바꿔 말하면 이루어진 후에는 말해도 괜찮다는 거겠죠~ ”
되도록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지만, 받았다면 그 상처가 최대한 아프지 않기를. 그리고 빨리 아물기를. 바라며 아랑은 빙긋 미소 지었다.
“ ... ”
이뤄지지 않아도 슬퍼지지 않을 소원을 빌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그건 간절하지 않은 소원이 될 텐데. 어렵다아. 씁쓸함이 배어 나오는 미소란 걸 알지만, 상처 준 사람이 자신이기 때문에 도리어 섣불리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은 어렵고... 슬픈 일이다.
주원이 소원을 써내려도 눈높이에 맞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도리상 눈을 감았다. 의외로 빨리 결정 되었다며, 너도 다 쓰면 함께 내러 가지 않겠냐고 물을 때까지.
“ 그렇게 해요~ ”
평소처럼 방긋 웃으며 펜과 메모지를 받아들고 뒤돌아선 주원의 모습을 잠시 보았다. 소원... 뭐라고 쓰지. 가장 간절한 소원은 따로 있지만, 쉽게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것이기에 올해도 쓰지 않을 예정이었는데.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2-1반의 귀염둥이가 빌만한 적당히 깜찍한 소원을 썼겠지만.
아마 올해의 소원은 적당히 깜찍한 소원은 될 수 없겠다. 귀여운 메모지에 또박또박 소원을 적어 넣었다. 한 번, 또 한 번, 그러고도 또 접을 수 있었다면. 다시 한 번 접었을 메모지에 써진 글자들은 당분간은 벚나무만 알 것이다. 주머니에 넣은 후에.
“선배애. 가요~! ”
밝은 목소리로 주원 선배를 부르고, 벚나무를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염원을 담아 정석대로 소원을 빌었겠지.
>>8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떡해... 글에서 진짜 서러움이 묻어나오는거.... 🤣 >>87 뭉클해지는 글이네요 (´°̥̥̥̥̥̥̥̥ω°̥̥̥̥̥̥̥̥`) 우동이뿐만 아니라 민규도, 다른 아이들도 복잡한 길 사이를 하나쯤은 걷고 있겠죠? 청춘물이라는 밝은 분위기속에 가려서 매번 그런 모습을 찾을순 없겠지만요. 좋은 시 선물해주셔서 고마워요 민규주 😊
착하다는 말에 그제서야 선하는 기쁜 듯 웃었다. 마치 그게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인양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이었다. "고마워." 작지만 분명한 의사표현. 그건 분명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목적를 이룬 소녀는 금방 조용해졌다. 아까보다는 성의 있는 반응이 돌아온다. 경청하는 듯 눈을 말갛게 뜨고 적절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이는 빈도가 높아질거라는 소리다.
"그래, 거짓말은 나쁘지."
순순히 수긍해준다. 자신은 정작 때에 따라 적절히 거짓말을 애용하고 있는 처지였지만 굳이 입밖에 그 사실을 내놓을 정도로 사교성이 없진 않았다. 당장 떠오르는 감상도 안 들키면 그만 아닌가 정도였다.
내가 원하는 게 뭔 줄 알고? 원하는 걸 가지고 있지 않다는 오해를 굳이 풀어주지 않았다. 다만 주원을 스치는 시선에 웃음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칭찬 받고 인정받는 것은 날적에 아로새겨진 각인과도 같아서, 그 별 것 아닌 몇마디 말에 차가운 집착이 느껴질 정도였다.
"으음, 늑대였구나."
늑대라는 말에 선하가 급격히 성의 없어지는 일은 없었다. 양들 앞에서 유독 내숭부리는 기질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대뜸 잘 대화하고 있는 늑대한테 시비를 거는 일은 결코 없었다. 물론 가끔, 아주 이따금씩 그런 충동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실행에 옮긴 적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그럼 넌 곧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대신 선하가 집중한 건 그의 능력과 성향이다. 선하는 솔직해지기로 한다. 괜히 속이기 어렵고 칭찬도 박한 사람에게 잘보이려 노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짓말이 더 좋거든." 넌지시 중얼거린다. 어떻게든 웃음을 지어내던 안면근육이 탄력감을 잃는다. 미소가 거두어지니 한층 무심해진 얼굴이 보인다.
"너, 가만보니 못됐네. 자기만족적인 선행에는 내가 그다지도 중요하지 않잖니. 네 기분을 위해 날 이용했다면 적어도 티는 내지 말았어야지. 나 역시 이렇게 노력했는데 말이야. 안타까운 일이야."
모두에게 주어지는 친절에는 감흥을 잃고 만다. 특별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파문 없이 고요한 얼굴이 맥없이 기울어진다. 동시에 기민하게 주원을 훑어본다. 아, 기분 나쁘게 하고 싶다. 저열하고 원초적인 욕망에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다. 따뜻한 손이 제 손 위로 겹쳐졌으나 선하의 손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 없었다. 비를 흠뻑 맞고 내려간 체온이 여실히 느껴진다.
"터그 놀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지? 짐승이 되게?"
그건 선하의 주종목이었다. 따라 미소지은 선하가 손에 힘을 준다. 헛으로 수영을 한 것은 아닌지 약한 힘은 아니다. 온 힘을 다해 우산을 미는 척하더니 갑자기 제게 우산을 끌었다. 깨져버린 힘의 균형에 차칫하면 누구 하나 넘어질 수 있는 일이었지만 선하는 그런 걸 신경쓸 정도의 문명인은 못된다. 확실한 건 우산이 마구 흔들리며 둘 다 비를 고스란히 맞게 될것이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웃는다.
사라는 입을 뾰족거렸다. 사라의 아버지는 생일선물이나 이런저런 축일을 빌미삼아 사라에게 선물을 주는 일은 잦았지만, 오히려 사라에게 주는 용돈에는 인색한 편이었다.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돈 귀한 걸 가르쳐주는 것이라나. 그렇지만 사라는 자기 처지가 해인에 비하면 천하에 복에 겨운 것을 알았기에 그 이상 투덜대진 않았다.
"아하, 그런 식?"
하며 사라는 거대한 나무를 한번 훑어보았다. 해인은 세 번째로 접하는 일이고, 사라는 두 번째로 접하는 일이다. 사라가 세 번째로 이걸 접할 때는 이 고목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의 기억에도 남아있을까?
사라는 해인보다도 키가 한참 작은 탓에, 그것을 훑어보기 위해 해인보다 고개를 더 많이 움직여야 했다. 결정적으로 그 "구멍" 이라는 게 거의 자기 목 높이께쯤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사라는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으음... 하고 못마땅하게 목을 골랐다. 배사라. 산들고 숏다리 넘버원. 다리가 짧아 슬픈 짐승.
"이루고 싶은 소원이라─"
사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사실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이루어버리면 그만이거든."
그래, 배사라라는 아이는 그랬다. 자신만만하고, 높은 콧대에 걸맞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시건방지고 줏대있는 꼬맹이. 그렇지만 겨우 늑대 한 마리의 능력으로도,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나 하나 발버둥친다고 못 이루는 것들도 있더란 말야..."
하며 사라는 팔에 걸치고 있던 브리프케이스의 지퍼를 열고, 손바닥만한 메모장과 볼펜을 꺼냈다.
"뭐, 고장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고,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말이야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따금은 바보같이 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정작 이런 말을 한 본인은 이따금이 아니라 평상시에 바보라는 점은 잠깐 외면해주자. 사라는 메모장에 뭔가를 슥슥 적어서는, 그것을 꼬깃꼬깃 접어서 북 찢고 나무에 난 옹이구멍 안에 떨어뜨렸다. 쪽지는 곧장 나무구멍 옹이 깊숙한 곳, 손 닿지 못할 곳으로 굴러떨어져내렸다. 사라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쉬며 손을 모아서 소리없이 기도했다. 아주 타이밍좋게도, 산들바람이 불어 사라의 머리카락과 꽃잎이 흩날렸다.
"뭐 이런다고 딱히 당장 뭐가 바뀔 리는 없겠지만... 한 번쯤은 이런 것도 해볼 만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