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보는 것을 딱히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칼 교수가 그런 말을 해도 특별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정말 확인차 둘러본 것이기에. 있다고 해서 곤란하지도 않고, 없다고 해서 아쉽거나 하지도 않다. 라고 하면 역시 100% 진심은 아니긴 하지만.
"?"
수업에나 집중하자고 생각하며 에반스 교수를 보고 있으니 오, 이 무슨 뜻밖의 소식인지. 그녀는 역사서에서 봤던 글귀를 떠올렸다. 그레이엄 가문과 그린폴드 가문은 사촌지간이라던 글귀. 지금 수업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잠시 잡생각을 밀어 머릿속을 비우고 수업으로 신경을 기울였다.
픽시들로 인해 시야가 어지러운 것도 잠시였다. 눈앞을 가리는 픽시를 손으로 휘휘 저어 물러내고 에반스 교수의 설명을 들으니, 굳이? 라는 의문이 드는 마법이었다. 밧줄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가 그렇게 클까. 의외로 클지도 모르겠다. 보이면 자를 수 있고, 보이지 않으면 쉽게 풀 수 없을테니.
"쯧."
주문이야 어찌 되었든 이것들을 치우는데는 쓸만한 듯 싶다. 그녀는 달려드는 픽시 한마리를 피하곤 그 녀석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알려주면 안되는 주문을 알려주는 이유가 뭔지, 단태는 칼 교수님과 에반스 교수님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책상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주문이라는 말을 듣고나자 책상을 두드리던 단태의 손이 내려가더니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 빛난다. 인카서러스와 비슷하지만 밧줄이 보이지 않는 주문이라는 에반스 교수님의 설명은 단태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 반짝임이 더 강해졌다. 픽시가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에 오, 하고 감탄하다가 눈을 깜빡인다. 임페리오에 걸린 사람을 포박하는데 쓰는 용도의 마법-인데 이게 가문의 주문이라고?
"브라키아반도."
생각에 잠겨 있던 단태는 걸고 있는 목걸이를 노리는 것처럼 날아오는 픽시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생소한 주문이라 한번에 성공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dice 1 2. = 1
내가 누누히 말했지.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가면서도, 쉽게 당신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이 내기는 승산이 있을지 없을지조차 불분명한 그런 내용의 것이니까. 일개 인간보다 인간 이상인 그 존재가 자신보다 훨씬 앞서서 악수를 두게 된다면 자신이 내기에서 이길 확률은 0에 수렴했다.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에 주양은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 한껏 더 끌어안아줄 뿐이다. 내기의 결과가 최악으로 치닫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자신이 내기에 목숨을 판돈으로 건 것이 원인이었으니. 그러니까 당신이 충분히 중요시할만하다고 생각하며 당신의 어깨에 슬쩍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다 뒤로 물러나고. 한참 말 없이 있던 주양은 어깨를 으쓱였다.
"무섭지 않아. 최악의 상황이 오면..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만나도 상관 없고. 그 대신, 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만약 내가 내기에서 져서 MA가 내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찾아온다면, 그때 내 곁을 지켜주지 않을래? 내 마지막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하고 싶거든."
주양 자신이. 자신의 내깃돈보다도 훨씬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바라는 소원은 딱 이거 하나뿐이었다. 그것 이상으로 바라는 것은 없었다. 단지.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아무도 없는 것만 아니라면. 그렇다면 자신은 언제든지 환영이었으니까. 목걸이를 매만지는 당신을 바라보며 사랑스럽다는 듯 한껏 웃어보이던 주양은 당신이 귀에 한 귀걸이가 훨씬 더 잘 보일수 있도록, 당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후후.. 그런 셈이지? 내가 죽어있든. 살아있든. 언제나 너의 곁에서 함께할거라는 뜻이기도 해."
동시에. 자신이 내기에서 이길 경우 당신은 영원히 자신만의 것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물건이라는 앙큼한 생각도 숨어 있었다. 조금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의 폭을 넓힌 영향인지 주양의 눈빛이 생기를 되찾고 살짝 빛났다. 감정적으로 구는 건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항상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건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이제는 조금 긍정적인 쪽으로. 평소 다른 사람들의 앞에 내비치던 평소같은 모습의 서주양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이젠 내가 애매하게 말해도 척하면 착이네? 맞아. 그 뜻이야~ 우리 여보네 룸메이트한테는 나중에 내가 잘 말해줄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당신을 방으로 부른 것부터 오늘은 같이 곁잠을 자기 위한 것이었기도 하니까. 불안한 내기를 앞두고. 제 연인을 품에 안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안심되는 일은 없을테니까. 항상 혼자였으니, 지금만큼은 자신이 마음 편하게 기댈만한 사람이 필요했으니가. 행여나 당신의 룸메이트가 외박으로 꼬투리를 잡을 기세가 보인다면 그 즉시 일주일마다 기숙사 점수 5점 차감으로 응징하겠다는 투지를 활활 불태우며 주양은 짓궂게 웃었다.
"음.. 지금 당장 알려야 한다면. 내가 편지를 써서 보내는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여보?"
오늘도 어김없이 수업시간이 돌아왔다. 그것과의 내기에서 이긴 다음이라 주양의 발걸음은 한껏 가벼워진 상태. 이젠 어떤 탈이 오더라도. 그 어떤 위험이 도사리게 되더라도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을 손에 넣은 오만한 자의 콧대는, 그렇게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는 것이었다.
난 좋은 사람이랑 어울리는 사람이 못되니까.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주양을 향해 말하며 단태는 샐쭉-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 웃음을 지은 채 이야기했다. 거리는 누가 먼저 다가오든지, 금방이라도 입맞출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으나 쉽게 거리를 두지 않는 주양의 행동처럼 단태또한 쉽게 입맞추지 않았다. 고개를 내젖는 행동에 단태가 붉은 암적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어깨에 고개를 묻는 주양이 더 잘 기댈 수 있도록 머리를 살짝 기울이면서 능청스럽게 낄낄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보면, 네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가 되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여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졸업을 하기 전이기는 하지만 우리네 가문의 명맥을 잇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나는 누군가를 만날 수 밖에 없기는 해." 하고 작고 낮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단태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순혈가문의 명맥은 그렇게 유지되는 것이니까.
"약속했던대로 네 마지막은 내가 지켜볼 거야. 그리고 이후에 만나는 사람이 누구던지 간에 너는 내가 죽는 순간까지 좋아하던 유일한 사람이 될테지."
조금은 기뻐해도 된다. 단태는 그렇게 말하고는 평소와 다르게 건조하고 메마른, 느릿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신의 머리를 넘겨주자, 주양의 턱을 감싸서 입맞출 것처럼 끌어당겼다. 다만 단태는 주양에게 입맞추지 않고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던 것도 잠시, 목과 어깨를 몇번 지그시 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하고 입맞추기까지 했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강도가 강한 편이였고, 진심을 담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정도로.
"악령이든 원귀든 상관없으니까 죽는다면 유령이 되어서 내 옆에 머물러 있어야할거야. 내 옆에 함께할 거라면 그정도는 해줘야하지 않겠어, 자기야?"
생기를 되찾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주양의 말에 단태는 자신이 물었던 부위를 손으로 가볍게 문질러주며 히죽-하니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듣던 단태는 감싸서 붙잡고 있던 주양의 턱을 붙잡은 채 이번에는 당연하다는 듯,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스치는 것처럼 맞댔다가 떨어졌다. 깜빡이던 암적색 눈동자에 잠깐 빛이 반짝였다가 사라진다.
"굳이 편지까지 보낼 필요는 없을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우리 달링은, 내 손만 잡고 잘 생각일테지? 이럴 줄 알았으면 교복이라도 미리 챙겨올걸 그랬네."
단태는 한손으로는 침대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주양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예의 헤죽이는 웃음을 지으며 찡긋, 윙크를 해보였다.
에반스 교수님이 손가락을 튕기자 지팡이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 등 뒤로 향하면서 결박되는 느낌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강제적인 움직임이여서 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인카서러스에 당하는 게 이런 기분인가. 그래도 그 결박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태는 잠시 결박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손목을 문지르며 떨어진 지팡이를 아씨오 주문을 외워서 다시 손에 들었다.
"...네?"
에반스 교수님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이 단태가 되물으려다가 봄바르다를 계속 날릴거라는 말과 함께 겨눠지는 지팡이에 자연스럽게 마주 지팡이를 겨눴다. "교수님을 공격하는 건 영 내키지 않는데-" 하고 중얼거린 것도 잠시였고 단태는 주문을 외웠다.
방금 주문은 그저 시범이었는지 에반스 교수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그녀의 몸이 결박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결박되었다. 손이 뒤로 묶이며 움직여지지 않는다 싶더니 에반스 교수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고서야 풀려났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인카서러스와 차이를 알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것 역시 강점이기도 하고.
숙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풀려난 팔을 움직여보다가, 에반스 교수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수업이라면 해버리면 되는거지.
"브라키아반도."
이제 갓 익히기 시작한 주문을 지팡이 없이, 무언으로 할 만한 재주는 그녀에게 없었으니. 정석적으로 지팡이를 휘둘러 에반스 교수의 다리를 묶어 넘어뜨리려는 시도를 한다. 뭐, 본인이 어둠의 마법사라고 생각하랬으니까 말이지.
그는 매달리는 반동에 밀려 몸을 돌리다 그대로 한 바퀴를 빙 돌고는 말했다. 어깨를 톡톡 두드리던 손으로 엄지를 척 올려 보이는데, 사람 하나를 매달고 있는 자세로 그러느라 폼이 꽤 우스웠다. 사고를 안 쳤다 하면 남들에겐 별것 아닌 표준이겠지만, 그동안 그것을 최선을 다해 성칭한 결과는 제법 나쁘지 않다. 그는 알지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면을 크게 쳐주는 말이 호감을 사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그 결과가 스스럼없이 매미처럼 매달리는 사이라면 좋은 일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나 동물, 심지어는 낯선 장소에 들어가는 일에도 용기를 끌어모아야 하는 성격을 지닌 택영이 이 정도로 태연하게 남을 대하는 일은 잘 없으니 그 역시 이노리를 꽤 친하게 생각한다는 증거였다.
간단한 안부 인사 같은 것이 끝나자 이노리는 문카프와 무어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정말로 저런 몇 마디 울음소리로 말이 통하는가 싶기도 했다. 불신이 아닌 감탄의 의미로 말이다. 뾰로롭 삐로롭, 몇 마디 울음소리가 오가는 동안 그도 덩달아 집중해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빙글빙글 돌던 이노리가 척 멈추어서고 꺼낸 말에 그는 힘 빠지게 웃었다.
"진짜요. 아가 성격이 좋네……."
뒷문장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해달라는데 피하기도 미안하다. 커다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얼굴이 귀여워서 내심은 먼저 다가와주길 기대하기도 했고. 조심조심한 동작으로 택영은 팔을 뻗었다. 허리를 조금 숙이고 문카프가 놀라지 않도록 팔을 천천히 두르자 복슬복슬한 털이 목 부근을 간지럽혔다.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감각이다. 무언갈 굳세게 각오라도 한 듯 꾹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수 초가 흐르고, 그는 천천히 몸을 떼어 일으켰다. 잠시 우물쭈물 말이 없더니 조금 머뭇거리다 이노리를 바라보며 쑥스레 웃는 얼굴을 한다. 그렇게 설택영은 성공적으로 문카프와 교감을 나누는 데 성공하였다…….
앗, 그러고보니 이게 아닌데. 하마터면 훈훈하게 넘어갈 뻔했다. 주변에서 하나 둘 달라붙기 시작하는 시선이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참. 이 친구랑은 실내보다는 야외로 가는 기 나아 빔더. 복도에서 뛰댕기면 사람들이 놀래요."
가장 좋은 해결책은 숲으로 돌려보내는 것이겠지만 우선은 밖으로 나가는 게 먼저일 듯했다. 둘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말하려 했지만 그렇게 들렸을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