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는 조카가 이 가문에 온 이후 아이의 방을 무엇보다 귀한 걸로 채웠는데, 그 정도가 매우 호화찬란하여 마치 귀한 손님을 보는 것 같았다. 이불과 침대는 현아조차 내심 이런 곳에서 잠들면 좋겠다 싶을 정도였고, 바닥은 혹시라도 넘어질까 아주 푹신한 러그를 깔았다. 어찌나 푹신한지 침대 대신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옷은 하나하나 비단까지 귀한 걸로 짜입혀 맞췄고, 음식도 귀한 재료로 보양식을 늘 해먹인 것이다. 조카가 가장 좋아하는 닭죽에는 절대 평범한 재료를 넣지 않았다. 산삼을 구해다 넣었고, 닭도 아주 좋은 것을 직접 잡아다 손질을 했다. 인형을 좋아했다는 말에는 한 가게에 있는 모든 종류를 샀는데, 이건 장난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과는 늘 좋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조카는 음식을 먹으면 먹는 족족 모두 게워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옷은 군말없이 입었지만 인형처럼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않았고, 장난감은 손도 대지 않아 방계나 다른 가문의 자제들에게 전부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인형 하나는 소중하게 여겼는데, 바로 유니콘 인형이다. 제 품에도 다 들어오지 못하는 인형을 어찌나 소중히 여기는지 작달만한 체구로 인형을 끌어안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면 그리도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아는 인형을 사준 밤이 가장 참담했노라 회고했다. 잘 자는지 확인하러 왔을 때 러그가 깔리지 않은 구석 바닥에 웅크려 앉아 인형을 베개삼아 끌어안고 자고 있었던 것이다.
현아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숨죽여 울었다. 비참했기 때문이다. 조카는 믿을 사람이 유니콘 인형 뿐이었고, 자신이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던게 분명하다. 그 생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이 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아는 결국 이 아이의 마음에 닿지 못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 하나 없는 자리에서 홀로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오라버니와 아가씨, 그리고 누리의 피가 바닥을 적시는 걸 봤어도 이렇게 참담하진 못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비참한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아가."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침대 근처로 오더니 어제는 러그에서 편하게 잠들게 됐다. 조금만 지나면 마음을 열고 침대에서 잘 것이라는 상담사의 말에 빌어본 적도 없는 천지신명에게 감사를 표했을 정도였다. 오늘은 침대에서 잠들지 않을까 기대하던 현아는 문을 열었다. 그날따라 유달리 초승달이 예쁘더니만, 방안에 비친 달빛도 그렇게 투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더 잘 보였는데, 현아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입가는 피투성이였는데, 무언가를 잡아먹은 흔적이 아니라는 것은 부르터진 입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제 고모가 와도 혀를 연신 자근자근 깨무는데, 초점없는 눈이 아무곳도 향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것이다. 당연히 현아는 조카를 뜯어 말렸지만 상처가 어찌나 컸는지 실력 좋은 마법사 둘이 와서야 흉터 하나 없이 치료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곧 학교에 가야 하는데 아이가 불안정하여 어쩔 수 없이 재갈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일정도 지났을 때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자해를 멈췄고, 재갈을 물었다는 생각도 감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얌전해졌다. 고분고분 먹었고, 주어진 것을 입었고, 장난감을 품에 안았고, 침대에서 잠든 것이다.
단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에 사람들은 아이가 바뀐 것이 아니냐 저들끼리 농담을 던졌지만 진위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여보자기 하다가도 어느 순간 가시나가. 하면서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당신의 모습에 주양은 다시 한번 아찔함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매번 이렇게 자신에게 이런 새로움을 주는 당신에게, 자신은 어쩌면 큰 걱정을 끼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함께 들어 조금은 미안해지기도 했다. 당신을 마주보고 히죽 웃던 주양은, 아직은 비밀이라는 말과 함께 농담을 마치고. 방금 전 당신의 입맞춤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젖혀 제 어깨에 턱을 올리고 있는 당신의 볼에 가벼이 입을 맞춘 채, 눈을 반쯤 감았다. 어쩌다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기분 좋은 일이니까.
"응. 놀랍지 않아~? 무려 그 MA님과 내기를 한 사람이라니! 그래서 내가 책인데도 흥미롭게 읽었던걸지도 모르겠는걸~?"
뭐. 정확히는 그게 아니라 직접 그것이 등장해서 내게 이야기를 전달해준 것 같지만. 조금은 진지하게, 웃음기가 지워진 목소리로 주양은 차분하게 읊조렸다. 슬슬 진중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되었으니만큼, 웃음기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그리고 MA님은 그럴수 없다는 것에 세상을 걸었어. 내기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흘러갔지. 예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신이 될 수 없었어. 왜냐하면, MA는 처음부터 그 사람을 죽여 그 무엇도 될 수 없게끔 만들 생각이었거든."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절대 그것을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 그런 내용의 책 이야기를. 아니, 정확히는 그런 내용으로 나눴던 대화를 당신에게 전해주며 조금씩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내기라면 언제든 자신 있었고, 자신이 가장 잘 해낼수 있으며, 그 무슨 악수를 두더라도 이겨먹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만큼은 그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찌감치 횃대에 앉아있던 청이 잠들고, 주양은 그쪽을 한 번. 그리고 당신을 한 번 바라보며. 조금은 애잔하게 미소지었다.
"결국 세상은 한번 뒤집어졌어. 아마.. 이건 우리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아주 까마득한 날의 이야기였을거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러고 있을 리도 없잖아?"
안 그래? 하고. 그대로 다시 당신의 볼에 가벼이 입을 맞추며, 한참 열리지 않던 입을 겨우 달싹여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 그리고 MA님은, 그 책을 읽은 나한테 흥미를 느꼈나봐. 나한테도 내기를 걸어오더라고? 내용은.. 우리 학원에 숨어든 쥐가 있는데. 그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느냐 없느냐~ 뭐 대강 이런 내용이었어."
그 쥐가 죽거나 아즈카반으로 쫓겨나면 우리 모두가 죽고 그러지 않으면 살 거라는 말까지 전해주고 나서, 주양은 다시 한껏 몸을 기대어왔다. 오늘따라 이 서늘한 느낌이. 차가운 감촉이, 자꾸만 자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절대. 절대 나는 너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당신에게 보이지 않게끔 앞을 바라보며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나는 보호할 수 있다는 쪽을 골랐어. 우리 여보, 내가 이 내기에... 뭘 판돈으로 걸었는지 알아?"
허리에 두른 손을 살짝 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당신에게 선물해줄 목걸이와 귀걸이가 있는 쪽으로 향해. 그것들을 손에 쥐고는 한참동안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뒤돌아보지 못했다. 이 묘한 감정. 기묘한 감정은, 대체 무엇이길래... 그동안 어떤 행동에도 거리낌이 없으며 당당했던 자신을 이렇게 움츠러들게 만드는가. 살짝 몸이 떨리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손에 쥔 채 다시 뒤를 돌아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에게 돌아와서는, 당신과 마주보는 자세로 무릎 위에 앉았다.
"나는. 너를 걸 수 없었어. 그래서, 내 목숨을 판돈으로 걸었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한 너를. 재앙과의 내기에 함부로 내던질 수 없었어.
자신의 애인-그러니까 굳이 사이를 정의하는 단어를 택해야한다면 말이다-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배불리 먹고 만족하는 짐승처럼 샐쭉-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단태는 비밀이라는 말에 대해 반응하듯, 한쪽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뺨키스를 받고 나서야 불만스러운 것처럼 치켜올라갔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아갔고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양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당신의 뺨과 입가에 짧게 입을 맞췄을 것이다. 그 행동으로 그치지 않고 단태의 입맞춤은 몇번 더 뺨에, 입술에, 그 외에도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교활하기는 하지만 죽이지 않는다거나 하는 조건이 달리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빈틈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신이 되지 못한다, 라는 말은 맞다. 주양에게 입맞추던 단태의 행동이 잠시 멈췄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단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저 표정을 뭐라고 정의하고 어떻게 느껴야할지 고민에 빠진 것이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내기를 했다는 내용을 이야기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내가 미래에 대한 책을 읽은 것보다 네가 읽은 게 더 신기한데."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지만, 그건 동화처럼 전해지는 게 아닌 정말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일 거라고 생각하던 단태는 다시 자신의 뺨에 입맞추는 주양을 마주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학원에 숨어 있는 쥐. 주양을 보던 붉은 암적색 눈동자가 잠시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방음마법을 사용하기를 잘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면 그것만큼 귀찮은 일은 없을테니. 아니, 잠깐만. 단태는 잠시 학원에 숨어 있는 쥐가 자신이 읽은 책에 적혀있던 배신자와 같은지 생각하다가 문득 다시 주양을 바라봤다. 능청스러운 웃음이 자취도 없이 깨끗하게 안면에서 사라진다.
"서주양, 너-."
쥐가 아즈카반으로 쫒겨나면 우리가 죽고, 그러지 않는다면 산다는 말까지 듣던 단태는 웃음기가 없는 메마른 표정으로 자신에게 기대오는 주양의 모습에 팔에 힘을 줬다. 이어지는 말에 단태가 가볍게 웃었다. 그래. 내기에 응했구나. 이름만 불렀다가 이어지지 않은 말이 맴돌았다. 해야할 말이 많은데 고르기가 쉽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자신의 팔을 풀고 일어서기 전에 했던 말을 생각하다가 단태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었다가 조금 거칠게 쓸어내렸다. 이 생각이 아니길 바라지만, 바람일 뿐이다.
"대단하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내가 했던 말을 잊어버린 건지 물어봐야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서주양. 주양아. 내 연인."
자기야. 가라앉은 암적색 눈동자와 다르게, 안면에 웃음을 걸고 단태는 자신을 마주보고 앉은 주양을 올려다보며 그 턱에 손을 대고 끌어당겼다. "나는 내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다고 이야기했잖아." 가까워진 거리에 입맞출 것처럼 단태가 고개까지 올려서 더 거리가 가까워졌다.
"네가 내 손을 잡은 그날부터, 너는 내건데. 누구 마음대로 목숨을 걸어. 응? 그 말을 할 때 내가 돌아버릴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은거야?"
대답해. 대답을 종용하는 단태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서 꼭 짐승이 으르렁대는 것과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