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분한것인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자신에게 크루시오를 더 맞지 못한것인지 아니면 더 많이 쓰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탈이 와서 그 녀석을 데려갔기 때문인지. 레오는 감을 못잡겠단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곤 뭐가 됐든 잘 된것 같으니 됐나- 라는 속 편한 생각으로 일관했다. 뭐, 좋은게 좋은거니까. 저렇게 밝은 목소리도 낼 줄 알았구나. 저렇게 기쁜 표정도 지을 줄 알았어. 그럼 지금 나는 어떻지.
" 특별히 챙겨주는거라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챙겨먹어야겠네. "
딱히 좋아하는 음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있으면 먹고 아니면 말고, 굳이 찾아가서 먹지는 않는 그런것. 레오는 별 생각없이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보다 달콤한 것이 의외로 괜찮았을지도. 레오는 뭔가 말하려던것도 도넛을 먹는 것에 입이 막혀 말하지 못하고 잠시간 도넛만 씹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책에서도 도넛이 나올 정도로 이걸 좋아한다고 했었지. 맞아. 책의 내용들.
" 물어볼 것도 있고, 그냥 얘기하고 싶은 것도 있고.. 아, 하나만 더. "
레오는 자연스럽게 하나를 더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책의 내용을 읽고 나름대로 추리라면 추리한 것은 매구가 일부러 불을 지르고 구성원을 몰살한 후에 버니를 만나 탈을 주고 자신의 휘하로 들였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운명처럼 기가막힌 타이밍을 설명할 길이없다. 혹시 모르지, 정말로 운명처럼 기가막힌 우연의 일치일지도. 두 번째는 매구가 탈옥시킨 것인지 아니면 책의 내용대로 특별사면이 이루어진것인지. 둘 중 하나는 거짓을 말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둘 다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버니가 이 모든것을 알고있고 레오의 추리대로 매구가 불을 지르고 구성원을 몰살시킨뒤 특별사면을 이루어냈다면 어떤 의미에선 매구가 버니를 탈옥시킨게 맞는 셈이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책의 내용대로라면 버니는 적어도 누군가에게 '복수'를 이루고 싶다고 했고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에서 읽은 내용과 자신이 아는 것을 토대로라면 대상을 좁힐 수는 있다. 복수라면 자신에게 이루어진 나쁜 일의 원을 찾아 똑같이 보복한다는 의미인데 그녀에게 일어난 나쁜 일이라면 구성원의 몰살과 아즈카반에 끌려간 일 정도다.
우선 전자. 구성원을 몰살시킨 사람. 누구인지 찾을 순 없지만 의심가는 사람은 있다. 자신이 아는 내용이 정답일 경우, 범인은 매구가 된다. 그걸 믿어줄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은 후자. 버니가 아즈카반에 끌려가게 된 이유. 이건 순전히 네 잘못이잖아. 레오는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파와서 윽, 하고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 그냥 누구랑 같이 있고 싶은 기분인데, 학교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수는 없거든. 지금은 별로 같이 있고 싶지도 않고.. 이거 맛있네. "
레오는 도넛을 하나 더 집었다. 적당히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가만히 사색에 잠겼다. 크루시오를 썼을 때 분명 자신의 오랜 라이벌은 그렇게 말했다. 이것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경황이 없어 그냥 넘어갔지만 당장 얼굴보기 껄끄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학생들이 그 교수를 두둔하고 나섰을때 분노하고 화를내고 증오심에 휩싸여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며 주먹을 꽂은 것도 자신이고 먼저 자리를 뜬 것도 자신이다. 역시 다른 사람들을 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 교수는 탈이었다. 탈중 하나였다. 레오가 그 교수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그 교수에 대해 분노하며 믿지 못하는 것은 그 녀석이 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오는? 레오는 탈들 중 하나와 밀회를 가지고 있고 그녀의 숨겨진 패가 되어 교육을 받고있으며 일이 끝난 다음 다른 친구들이 아닌 탈을 찾아와 심경을 토로하며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있다. 결국 탈을 공격한것도 버니의 교육과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평소처럼 굴렀을지도 모르지.
극심한 인지부조화가 찾아왔다.
극심한 불쾌감이 찾아왔다. 그에 따른 방어기제는 자기합리화였는데 레오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다음에 또 탈들이 찾아오면 제대로 스스로를 지키고 공격하기 위해서, 그리고 저주에 대한 방어법을 찾기 위해서 버니와 만나 배울 수 밖에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변호했지만 그렇다면 백혜향 교수또한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변호가 가능했다. 아니야, 그건 거짓말이야. 그걸 어떻게 믿어. 하지만 그런다고해서 남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아, 또 불쾌감이 찾아온다. 인지부조화에 따른 불쾌감과 죄악감이 몸을 덮치면 자기합리화라는 방어기제가 작동해서 잠깐 기분이 나아졌다가 그 자기합리화에서 또 극심한 인지부조화가 찾아온다. 그러면 다시 자기합리화를 거쳐, 또 다시 인지부조화로. 끊어지지 않은 연쇄의 굴레처럼 불쾌감이, 죄악감이, 혐오감이 목을 졸라온다.
" 잠깐 여기 앉아봐. "
레오는 자신이 앉아있던 넓고 평평한 바위를 톡톡 쳤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덤으로 레오는 다른 사람과 맞닿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게 자신의 라이벌이던, 남들보다 체온이 낮은 다른 기숙사의 친구던, 처음 만난 자신에게 친절하다고 말해준 친구이던 아니면 그것이 설사 자신을 죽이려 들었지만 지금은 선배님 노릇을 하고있는 탈이던간에. 레오는 버니가 순순히 앉아준다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허벅지를 베고 누울 생각이었다. 덤으로, 갑자기 하늘이 너무 낮아져 숨쉬기가 힘들었기에 슬며시 손을 잡아 자기 눈을 가리려 들었을것이다.
지난번에 배웠던 문카프의 습성을 다시 떠올려보자. 문카프는 수줍음이 아주 많아 보름이 아닌 날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물이다, 라는 내용이 첫줄에서부터 커다랗게 써져 있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저기서 쪼르르 달려오는 동물은 대체 뭔지 모르겠다. 이노리가 온갖 동물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이노리를 보아온 시간이 있으니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 친화력이 겁 많다는 문카프를 대낮에 학원 안에서 뛰어다니게 할 정도인지는 몰랐다. 안녕이에요?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영혼은 조금 빠져 있었지만 싸늘하지는 않은 표정이다. 황당하면서도 해학적인 상황에 넋이 빠져버린 것이다. 역시나 기대가 무색하게 의미 전달이 잘못되었지만 이노리도 문카프도 멈추었으니 상심하지 말자, 의도했던 결과는 얻어냈으니 말이다.
"예에, 안녕하세요. 오늘도 재미집니꺼."
이노리가 폴짝 뛰며 팔을 뻗자 그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조금 숙여주었다. 이런 일이 한 번은 아니었을 테니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안 그러려 노력은 한다지만 그가 저보다도 조그맣고 아이처럼 천진한 이노리를 알게 모르게 귀엽게 여기고 있어 그런 탓도 있으리라. 그대로 가만히 목석처럼 서 있기도 무엇하여 그는 손을 들어 이노리의 어깨 부근을 톡톡 두드리는 것으로 화답을 했다. 녹색빛 눈이 한쪽을 넌지시 향하며─눈이 마주치자 문카프의 눈망울이 한층 더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말문을 열었다가, "야는 어떻게……." 질문을 던지기도 돌아온 답에 그대로 끊어졌다. 문카프랑 친해진 거, 그래 보이긴 했다. 너무도 명료한 대답에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동자만 조용히 굴린다.
"진짜 만져도 되는교. 그, 야가 싫어할 수도 있지 않심꺼……."
문카프가 울음소리를 내며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녔지만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눈을 돌릴 뿐이다. 언뜻 불편해 피하는 듯 보였지만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물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문카프는 뾰로롭거리는 울음소리도 곱고, 동글동글한 머리도 귀엽지만…… 문제는 택영이 동물에게조차 낯을 가리는 극도의 소심형 인간이었던 것이다. 제 근처를 뛰노는 네발짐승의 깜찍한 모습에 그는 슬쩍 이노리의 눈치를 봤다. 신비한 동물 수업 때는 만나는 동물이야 수업 대상으로 보였기에 스스럼 없이 대할 수 있었는데, 이노리가 데려온 친구로 바라보자니 갑자기 부담감이 생긴 것이다. 흡사 새학기 때 처음 보는 친구를 소개받자 잔뜩 어색해하며 기존의 친구 옆에만 붙어 어색한 시간을 흘려보내려는 내성적인 중학생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