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올려다보면 잔뜩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살짝 먼지가 낀 너의 무덤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들고 왔던 꽃을 내려둔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혼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 베온은 당신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아. 당신이 연락을 늦게주고 말고는 상관없었던거야. 하지만 그 사람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제일 화가 치밀어오르는 부분은 역시... 손을 뻗어도 잡지 않고 떨어져나간 것 이겠지. "
유감스러웠다.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올라오라고 소리쳐도 상대방이 잡지 않는다는 것은 슬프고도 유감스러웠다. 내가 또 다시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회중시계의 덮개 위에 새겨진 여우와 꽃 모양을 살펴보며, 가볍게 흔들자 붉은 잉크가 움직여 강철 위에 새겨진 여우와 꽃에 스며들었다. 당신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나보다도 빛났었는데,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인 순간이 가장 어둡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왜 너는...
이것은 미련이다.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해도 어쩔수 없는 미련이다. 이미 늦었다, 떠나갔다, 남겨진 이는 살아가야 한다. 이 모든 사실이 진실이지만, 그럼에도 납득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난이도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렇기에 미련을 가지고 머뭇거리는 나를 당신은 못마땅하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회중시계에서 작게 울려퍼지는 째깍 거리는 소리에 맞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 정말 여기까지 와주시고, 감사해서 몸둘바를 모르겠어. "
덩그러니 남겨진 나이젤의 묘비 그리고 그 주변에 피어오른 녹색 풀들이 살랑거리는 그곳에서 나는 당신과 싸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 이건 지난 번 카페에서의 일에 대한 화풀이도 맞고, 남겨진 사람이라는 처지를 공감해주라는 절규도 맞아. 더 쉽게 말해주자면..그냥 내가 찌질한거야. 물론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어, 단지 내가 당신과 싸우고 싶을 뿐이니까. "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저런 것에 의미를 붙여서 꺼려하고 반기는 상징물이 있다고. 헤어지고 흩어진다는 한자와 같은 우산, 곧 필요 없어 폐기되고 잊힐 것이라는 의미의 부채, 이별과 발음이 같은 배 같은 걸 선물로 주는 건 일종의 금기로 속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의 말미엔 괘종시계에 대한 것도 있었다. 괘종시계를 나타내는 종(鐘)은 끝나다, 죽다를 뜻하는 종(終)과 발음이 같아, 보내다, 선물하다를 뜻하는 송(送)과 같이 쓰면 송종(送終). '임종을 맞아 장례를 치른다.'와 같은 발음이 된다고 했었지. 이 소리가 괘종시계의 소리는 아닐지라도, 소리를 크게 울리는 텅 빈 곳에서 나고 있으니 두껍고 무거운 바늘 소리가 겹쳐 울리는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내 발소리에 맞춰 무덤가를 울리는 날카로운 째깍 소리가 날 저승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끌어들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 별 말씀을. "
느낌은 느낌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 금속의 소리로 더럽혀선 안 될 곳을, 누군가의 무덤 근처를 싸움터로 삼는 건 안 될 일이다. 악취미처럼 느껴졌다. 분명 잠든 자도 편히 쉴 수 없게 될 것이다. 얇고 긴 금속 줄 끝에 매달린 은빛 십자가를 따뜻해질 때까지 손바닥 안에 쥐고 있었다. 그의 앞에 도착할 때까지.
" 그래. 나도 너와 싸우고 싶었어. 그러니 이야기는, 싸우고 난 후에도 하고 싶다면 그때 가서 하도록 해. "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보내고 끝을 맺는(送終) 일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용서받을 수 있겠지.
" 선공은 가져가. "
그저 방심만은 아니라, 한 수 유리하게 두려는 것. 빈 손에 나타난 방패를 느슨하게 쥐었다.
선공은 가져가 라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방패를 상대방과 싸우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변칙성.혹은 압도적인 힘 순간 순간 떠오르는 센스를 이용해서 녀석을 쓰러트린다. 단지 그것만을 생각하며 로포텐의 노을을 휘두른다.
노을빛 검신이 반짝이며 그녀의 방패를 향해 내려 쳐지는 순간. 나는 연단의 의념을 검신에 감으며 힘을 주었다.
" 원래는, 유진화를 상대로 쓰려고 했는데 말이야... 이렇게보니 방패들은 하나같이 거슬리내....! "
연단의 의념을 응용하여, 연단이란 과정을 통해 단단해졌다는 결과가 아닌. 연단의 과정 중에 발생하는 강한 충격을 떠올리며 검을 휘두른다.
엘로앙과 싸우면서, 내가 그 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다. 나를 기대하는 여왕으로 부터 나를 지키면서 최대한 힘을 쓰기 위해서 또 위에서 나를 기다리는 만석이나 이카나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법 부터 익혀야했다.
네.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노을을 닮은 검이 묵직하게 내리꽂는 감각이 손을 울렸다. 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강하다. 한 방 한방이 부딪치는 것으로 상대를 무너트려 버릴 만한 기세를 담고 있다. 상대는 검, 둔기처럼 강한 충격을 주는 무기에 속하지 않는 것을 쓰고 있는데도.
" 진화를 알아? 미안하지만, 그애랑 나는 전문 분야가 조금 달라서. 버티기만 하는 거라면 그애가 나보다 낫지. "
가혹한 땅에서 옮겨심은 나무, 신선한 청(靑), 춘(春)의 이파리가 오르기 시작하는 단단한 가지. 휘지 않지만 부러질 때까지 버티는 미련한 단단함. 난 진화만큼의 방패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제자리에서 버티기만 하는 것도 따라가질 못한다. 그 말인즉,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필패한다. 내가 남아 있더라도 방패가 부서지면서 끝나고 말겠지. 하지만 분야가 다르다는 건, 싸우는 방식도 같지 않다는 것이다.
"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너도 충분히 강함을 지니고 있을텐데. "
그 열등감은 만들어낸 것인가, 아니면 묶여 있는 것인가? 흘려낼 수 없는 공격을 방패로 막아내는 걸 포기하고 상대에게 파고들었다. 스친다면, 스치는 정도라면 몸으로 받아낼 수 있다. 튼튼하다는 건 더 과감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몸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이며 몸을 지키던 방패를 옆으로 비킨다. 인간은 무르고 나약하기에 꾸준히 두드려 단단하게 해야 한다. 인간의 몸은 철을 펼쳐 이르는 것처럼, 인간의 삶은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 아니니. 경구가 무거운 숨결이 되어 입을 떠나자 일순, 의념이, 의념을 담은 이 몸이 한 가닥의 찬 불꽃으로 변한다. 상대가 검을 휘두르는 정면으로 파고들고, 비껴놓았던 방패를 끌어당긴다. 그의 왼쪽 어깨를 모서리로 내리찍기 위해. 달려들어 끌어안듯 가까워진다. 너의 공격을 받으며 느꼈다. 나는 반응속도도, 판단력도 너에 비해 부족하다. 신속도, 영성도 부족하겠지. 네가 나의 당황을 노려야 하는 쪽인가? 아니, 내가 너의 당황을 노려야 한다! 공격을 당하는 쪽이 주도권마저 쥐지 못한다면 약자로 전락할 뿐이다! 방어력을 강화하는 의념 발화를 쓰며 굳이 적중을 각오하고 파고든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