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행동에 그만큼의 격차가 있으면 못되게 구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하는 입을 열지 않는다. 제가 느끼는 나쁨의 역치와 해인이 느끼는 것의 차이가 얼마쯤일지 가늠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차이가 어떻든 해인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못 되게 굴 것처럼 말했잖아. …안 한댔지만."
해인을 보던 사하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쉰다. 한 달치 한숨을 오늘 다 쉬는 것 같았다.
"아까 물어봤잖아. 왜 너에 대해서 말 안 하냐고. 난 먼저 너 공격할 마음 없어. 나도 그 정도로 치졸한 사람은 아니야."
지금껏 경계 어린 눈으로 보고, 날카로운 말을 뱉은 사람이 할 말인가 싶다만. 어쨌든 진심은 맞았다. 사하는 다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악의적인 행동엔 똑같이 악의적으로. 피곤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하는 건 그때문이었다. 남에게 날 세우고 적대적으로 구는 게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인지 아니까. 반대로 말하면, 공격하지 않는 상대에게 싸우자 달려들 일은 없다는 뜻이다.
"참, 비위도 좋다. 너는 나 안 불편해?"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그 와중에 사탕에서 자두 맛이 나는 게 괘씸했다. 아무거나 손에 걸리는 걸 줬다고 해도 마음이 변할 것 같지 않았다. 왜 하필 자두인데. 오렌지, 사과, 포도… 사탕 맛이 얼마나 많은데.
학교에서 나오는 학식도 나물은 한 입 먹고 "웩" 하고 남기는 그였지만, 혹시 아는 사람이 만들면 맛이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가벼운 말투고 슬혜에게 부탁을 했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것은 요리를 해달라는 것이었으니까.
"비린거? 그건 나도 잘 못 먹어. 그렇다면 나중에 맛있는거 같이 먹으러 가자!"
슬혜와 달리 주원에겐 맛에 관련된 꺼려지는 추억은 없었다. 기억이 있다면 편식과, 좋아하는 과자를 더 먹고 싶은데 엄마에게 더이상은 안 된다며 빼앗긴 것 정도일까.
"아예 없는건 아니지만, 찾아보면 많을 것 같네. 공통되는 것."
흘러가는 듯이 말하는 말투가 아닌 장난스런 주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차분한 말투로 대답한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 다시 환히 미소지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내가 강아지 같다는건 인정할지 몰라도, 몸이 젖는다고 개 냄새가..."
스스로도 나지 않는다곤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은 스스로 늑대란 것을 자각하고 있으니까. 늑대 스스로는 알 수 없지만 늑대가 아닌 사람은 알 수 있는 냄새가 있을지도. 그것을 들켜도, 들키지 않아도. 라곤 생각했지만 주원은 순순히 우산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시 1인용의 우산에 둘. 우산의 크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주원은 가까이 붙었다간 젖은 옷에서 물기가 튀길까 걱정했는지 슬며시 거리를 두었다. 그 덕에 반대쪽 어깨는 그대로 비를 맞을 수 밖에 없었지만.
확실히 말은 그렇게 해도 행동으로 옮긴 적은 거의 없었다. 내 재능을 그런 곳에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기 때문에. 타인의 인생을 나락으로 보낸 것은 과거에 한 행동만으로 충분했다. 한동안은 재능을 사용하는 것조차 스트레스였으니까.
" ... 아직도 성격은 좋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었는데도 저렇게 말할 정도면 나랑은 비할 바가 안될 정도의 대인배가 아닐까. 아까 나눈 대화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였기에 더욱 모질게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예전의 감정은 희석 되었다고한들 남아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 물론 사하를 울리면 사라한테 엄청 혼나는건 덤일테고. 그렇다고 가만히 맞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기도 했고.
" 전혀 안불편한데? 불편했으면 너가 학생회실에 들어왔을때 모른척 했겠지. "
착잡한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일부러 평소보다 좀 더 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두맛 사탕, 항상 주머니에 넣어다는 것이었다. 항상 주머니의 사탕은 바뀌기 마련이었지만 자두맛 사탕만큼은 항상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물론 다른 사탕들을 다 제치고 자두맛 사탕을 건네준 것은 내 의지는 아니다.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둘까.
" ... 아? 아.. 응.. 그래. "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돌아와서 크게 당황해버렸다. 분명 너랑 같이 가고 싶겠냐면서 모질게 거절하고 나가는 전개를 예상했는데. 물론 사하는 기숙사생이니까 같이 가는건 학교 건물을 나설때까지겠지만 그럼에도 예상과 크게 벗어난 답변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대답을 해버렸다. 끄응,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여버렸다. 그녀가 학생회실을 나서는 것을 보고 나도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서 나왔다.
" 너는 내 재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
이 상황에서 물어볼만한건 아니었지만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의 여자친구였던 사하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게 된다면 식도락계에 파란을 일으킬만 하지만... 좋아요, 그정도는 충분히 해드릴 수 있죠."
약간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그녀였지만 못할것도 없었기에 수긍은 빠른 편이었다. 요리부에 있던만큼 그런 부탁은 의외로 자주 있었고,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도 제2의 부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지 않았다면 매일같이 저녁거리를 학교에서 만들어 집으로 가져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같이 가자구요...? ...안될 거야 없지만요. 선배님이라면야 늘상 있는 일이고..."
태연하게 이런 말을 할수 있는 것도 그이기에 가능한 일, 먹을것은 대개 스스로 해결하는 편이라 다른 사람의 음식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거절할 이유조차 없던 그녀였기에 그럭저럭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이 그런 요구를 했다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농담이었는데, 진짜인가봐요?"
물론 보여지는 그의 이미지가 아무리봐도 대형견의 인상이었기에 던진 말이었지만 제법 신경쓰는듯이 말을 흐리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작게 키득거렸다.
순순히 들어왔던만큼 두 사람이 쓰기엔 작을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그녀 역시 조금은 비에 젖어들긴 했지만 그것 또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실제로도 비맞는 것 정도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으니까,
"그렇게나 신경쓰이시는 건가요?"
방금전까지 의도적으로 피한건 자신이면서도, 그새 또 생각이 바뀌었는지 새침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흠뻑 젖어있던 그였기에 물기가 튀는걸 걱정이라도 하는 건지 살짝 거리를 두는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그 벌어진 간격만큼 조금 더 뻗었을까?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반쯤은 비에 맞는게 당연해지긴 해도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니 말이다.
약한 힘으로 잡아당긴 거라고 해도 충분히 품에 떨어질 만한 힘이었다. 아랑은 낯선 것에 놀란 다람쥐 같은 표정으로 당황스레 뜬 눈을 깜박거렸다. 어떡하지이? 이런 것 상정하지 않았는데. 낯이 설다. 평소와 다르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낮고 중후한 것도. 평소보다 날카로워 늑대처럼 보이는 얼굴도.
“ 도둑이 아니고, 산타예요~ 그러니까 놔주면 안 될까요오? ”
산타를 찾을 계절을 아니지만, 이걸로 대충 넘어가 주었으면. 아랑은 눈짓으로 머리맡 솜사탕을 가리켰다. 살짝 곤란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 애교 있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위에 엎어져 있으면... 양인 걸 들키니까 곤란한데,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아랑은 이 자각 없는 늑댕이가 좀 둔감한 편이길 부질없이 바라봤다. 주원이 팔을 붙잡고 있었으면 여전히 잡혀 있었을 것이고, 금방 놔주었다면 재빨리 일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재빨리 일어섰다 해도...
“ 선배애. 좀 더 잘래요~? ”
이런 눈치도 저런 눈치도 은근히 빠른 사람인데. 어쩌지, 짧게 고민하다가 일단 잠을 권유했을 것이다. 잠결이라 생각하고 방금 있었던 일은 잊어버려요~ 라고 바라면서.
해인은 웃었지만 사하는 그러지 못했다. 짜증스러운 얼굴을 감출 수 있었던 것도 열아홉이라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열여덟과 열아홉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딱 일 년 만큼 닳아 없어진 부분이 있을 것이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몇 살을 더 먹어야 웬만한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까. 어려움도 외로움도 모르고 살고 싶었다. 양이 외로움에 취약한 종이란 걸 떠올릴 때마다 떨떠름했다.
"여태 잘도 뻔뻔하게 굴어놓고 놀라는 척 하지 마."
이번에는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 말았다. 먼저 걸음을 옮기자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후회스런 마음이 들었다. 지금 남한테 뻔뻔하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
"잘 쓰면 이롭고 나쁘게 쓰면 해롭고. 다른 재능도 다 그렇겠지만, 네 건 특히나 그렇지 않나."
무심하게 걸음을 옮기며 해인을 본다. <갑자기?> 묻지도 않았는데 표정에서 의아함이 드러났다. 이제 와 내 의견이 중요할 리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