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본가는 여기서 너무 멀어서 통학은 꿈도 못 꿀 수준이니까. 사실 집안꼴이 보기 싫어서 일부러 이사 갈때 따라가지 않은 것도 있었다. 내 선택이니까 후회는 별로 없지만, 아침에 일어날땐 좀 고통스러운게 사실이긴 하다.
" 해외에 외가가 있으신거야? 부자이신가보네. "
확실히 이 학교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다. 사라네 집도 유복한 편이니까. 나만큼 사는 사람은 잘 못본 것 같기는 한데. 사실 부자라는 것보다는 가난한걸 숨기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이해는 간다. 가난은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이니까. 사탕을 권하자 보이는 제스처는 거의 소녀 수준이라서 좀 당황스러웠다. 거의 때묻지 않은 동심을 보는 느낌이랄까.
" 그 사탕이 내리사랑이니까. 후배님의 사랑은 받기 좀 힘들겠는걸. 대신 내년에 들어올 후배들한테 잘해줘. "
그렇게 얘기하고선 나도 사탕을 꺼내 물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고-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어느새 저 멀리 학생회실이 보였다. 학생회실에서 좀 더 가면 서예부니까, 학생회실 앞에서 알려주면 되겠지.
" 강규리라고 했지? 몇 반이야? "
그래도 나쁘지 않은 인상이니까 반 정도는 알아두자는 생각에 물어보았다. 애초에 이런 성격이면 내가 보기 싫어도 눈에 띌 것 같았으니까.
봄비라는 것은 참 얄궂기도 했다. 항상 멋대로 내리고 멋대로 그치곤 했으니 그녀에게 있어선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 자체는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무언가 씻겨내려가는듯한 느낌이 들뿐더러 저렇게 강아지마냥 돌아다니는 그를 볼수도 있었으니, 어느쪽이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녀가 있었기에 지금처럼 조금은 황당하다고 해도 나름 받아들일만한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가요? 이걸 어쩌나... 나물은 몸에 좋은데~?"
살짝 눈썹이 비틀리면서 입을 꾹 다문채 부러 비음을 내는건 누가봐도 은근슬쩍 회유하려는 사람들이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해 조금 화난듯한 표정이 되기도 하고, 결국엔 가볍게 웃어보이는 것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글쎄요~? 저는 딱히 가리는게 없으니까요~ 굳이 꼽자면... 비린걸 좀 싫어하려나요? 그것 말곤 딱히 없네요~"
씁쓸함 사이의 어딘가, 어쩌면 그녀도 그런건 싫어할수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꺼려지는 것은 비릿한 것들이었다. 이따금씩 물던 쇠의 맛도, 어릴적이 생각나게 만드는 흙의 맛도,
......
"어쩌면 공통되는게 더 많지 않을까요? 가리는게 없다는건 늘 그런법이니까요."
모든걸 공평하게 좋아하고, 공평하게 싫어하는건 사람으로서는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에 선을 긋는 그녀였기에 그것은 이미 불편함을 넘어선 일상이었고 선천적인 행동이었다. 온정을 담지 않은 철저한 기호, 호불호가 명확한 행위, 얼핏 스스로를 옥죄는 것 같이 보인다 해도 그녀는 그런 일련의 행동들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경쓰는 것이 적을 수록 그것에 소모하는 정도도 줄어드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매커니즘,
"그나저나... 계속 그렇게 계실 건가요? 제가 비 맞은 강아지 냄새 딱히 안좋아하는거 아실텐데, 이러다가 한 3M쯤 떨어져야 하는거 아닌가요?"
누가 봐도 노골적인 놀림, 하지만 살짝 비죽이는 입이나 그에게 좀더 가까이 우산을 내민 것은 아무리 그녀라고 한들 정도는 있기에 계속 비를 맞고있는 그가 내심 신경쓰인다는 표시임이 분명했다.
마음과 행동에 그만큼의 격차가 있으면 못되게 구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하는 입을 열지 않는다. 제가 느끼는 나쁨의 역치와 해인이 느끼는 것의 차이가 얼마쯤일지 가늠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차이가 어떻든 해인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못 되게 굴 것처럼 말했잖아. …안 한댔지만."
해인을 보던 사하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쉰다. 한 달치 한숨을 오늘 다 쉬는 것 같았다.
"아까 물어봤잖아. 왜 너에 대해서 말 안 하냐고. 난 먼저 너 공격할 마음 없어. 나도 그 정도로 치졸한 사람은 아니야."
지금껏 경계 어린 눈으로 보고, 날카로운 말을 뱉은 사람이 할 말인가 싶다만. 어쨌든 진심은 맞았다. 사하는 다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악의적인 행동엔 똑같이 악의적으로. 피곤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하는 건 그때문이었다. 남에게 날 세우고 적대적으로 구는 게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인지 아니까. 반대로 말하면, 공격하지 않는 상대에게 싸우자 달려들 일은 없다는 뜻이다.
"참, 비위도 좋다. 너는 나 안 불편해?"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그 와중에 사탕에서 자두 맛이 나는 게 괘씸했다. 아무거나 손에 걸리는 걸 줬다고 해도 마음이 변할 것 같지 않았다. 왜 하필 자두인데. 오렌지, 사과, 포도… 사탕 맛이 얼마나 많은데.
학교에서 나오는 학식도 나물은 한 입 먹고 "웩" 하고 남기는 그였지만, 혹시 아는 사람이 만들면 맛이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가벼운 말투고 슬혜에게 부탁을 했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것은 요리를 해달라는 것이었으니까.
"비린거? 그건 나도 잘 못 먹어. 그렇다면 나중에 맛있는거 같이 먹으러 가자!"
슬혜와 달리 주원에겐 맛에 관련된 꺼려지는 추억은 없었다. 기억이 있다면 편식과, 좋아하는 과자를 더 먹고 싶은데 엄마에게 더이상은 안 된다며 빼앗긴 것 정도일까.
"아예 없는건 아니지만, 찾아보면 많을 것 같네. 공통되는 것."
흘러가는 듯이 말하는 말투가 아닌 장난스런 주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차분한 말투로 대답한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 다시 환히 미소지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내가 강아지 같다는건 인정할지 몰라도, 몸이 젖는다고 개 냄새가..."
스스로도 나지 않는다곤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은 스스로 늑대란 것을 자각하고 있으니까. 늑대 스스로는 알 수 없지만 늑대가 아닌 사람은 알 수 있는 냄새가 있을지도. 그것을 들켜도, 들키지 않아도. 라곤 생각했지만 주원은 순순히 우산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시 1인용의 우산에 둘. 우산의 크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주원은 가까이 붙었다간 젖은 옷에서 물기가 튀길까 걱정했는지 슬며시 거리를 두었다. 그 덕에 반대쪽 어깨는 그대로 비를 맞을 수 밖에 없었지만.
확실히 말은 그렇게 해도 행동으로 옮긴 적은 거의 없었다. 내 재능을 그런 곳에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기 때문에. 타인의 인생을 나락으로 보낸 것은 과거에 한 행동만으로 충분했다. 한동안은 재능을 사용하는 것조차 스트레스였으니까.
" ... 아직도 성격은 좋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었는데도 저렇게 말할 정도면 나랑은 비할 바가 안될 정도의 대인배가 아닐까. 아까 나눈 대화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였기에 더욱 모질게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예전의 감정은 희석 되었다고한들 남아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 물론 사하를 울리면 사라한테 엄청 혼나는건 덤일테고. 그렇다고 가만히 맞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기도 했고.
" 전혀 안불편한데? 불편했으면 너가 학생회실에 들어왔을때 모른척 했겠지. "
착잡한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일부러 평소보다 좀 더 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두맛 사탕, 항상 주머니에 넣어다는 것이었다. 항상 주머니의 사탕은 바뀌기 마련이었지만 자두맛 사탕만큼은 항상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물론 다른 사탕들을 다 제치고 자두맛 사탕을 건네준 것은 내 의지는 아니다.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둘까.
" ... 아? 아.. 응.. 그래. "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돌아와서 크게 당황해버렸다. 분명 너랑 같이 가고 싶겠냐면서 모질게 거절하고 나가는 전개를 예상했는데. 물론 사하는 기숙사생이니까 같이 가는건 학교 건물을 나설때까지겠지만 그럼에도 예상과 크게 벗어난 답변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대답을 해버렸다. 끄응,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여버렸다. 그녀가 학생회실을 나서는 것을 보고 나도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서 나왔다.
" 너는 내 재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
이 상황에서 물어볼만한건 아니었지만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의 여자친구였던 사하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