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에게 있어서 슬혜는 굉장히 벽을 잘 만드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낸 상처에서 흐른 피로 벽을 치는 사람. 슬혜가 실제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문득 느낀 것이다. 인간관계가 맺어지는 이유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주원이라고 해도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순 없다. 결국은 그 또한 인간이기에. 하지만 주원이 가진 또다른 재능은, 늑대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재능은 상대방에게서 필요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닌, 함께 있음으로서 그것만으로도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진 모르겠지만.
주원이 우산 밖에서 비를 맞는동안 슬혜는 그를 바라보았다. 주원을 바라보는 슬원은 미소짓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미소인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어떤 감정인지. 주원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비가 내리는데도 맑아보이는 하늘과, 저물어가는 석양 뿐이었다.
"좋아하는 음식? 단거! 고기도 좋아하고, 매운 것도 좋아하고, 쓴건 싫어해. 하지만 적당히 쓴건 좋을지도 모르겠어. 나물은 좀 싫을지도. 김치는 좋아해!"
주원은 폴짝거리며 그녀의 옆으로 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묻는 그녀의 말에 곧대로 대답해 주었다. 이런 일련의 행동이, 벽 너머의 상대를 밖으로 당기기 위한 행동으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 벽 바깥에서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틀리다고 할 수는 없겠지.
"슬혜는 좋아하는거 있어? 좋아하는 맛이나, 좋아하는 음식. 혹시 공통되는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호기심이 동하는 부 이름을 보고 선뜻 들어가 보았더니 안에 있는 것은 골든 리트리버같은 선배였지, 문을 열며 아랑은 회상했다. 당연히 부원이 몇 명 있을 줄 알았는데 부장 혼자인 게 의외였고, 1년이 지난 지금도 여태 혼자인 건 더 의외지. 권유는 아직도 가끔 받고 있지만 아직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혹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들어가긴 좀... 그렇지?
“ 저 왔어요~ ”
당연히 반길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잠들어 있었다. 아랑은 살금살금 발걸음 소리를 죽여 그에게 다가갔다. 깊게 잠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머리카락에 손에 살짝 올려본다. 깨어있을 때 퐁퐁 두드려본 적은 있지만, 쓰담쓰담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기회가 있으면 한번 해보고 싶었어! 아랑의 손이 조심조심 움직였다. 폭신폭신한 머리카락은 과연 쓰다듬는 재미가 있다. 사람에게 그러면 실례되는 생각이지만 꼭 잠자고 있는 골든 리트리버를 몰래 쓰다듬는 기분이다. 잠깐 만지는 건데 깨진 않겠지? 안 깨면 좋겠다.
주원은 어떻게든 선생에게 담판을 통해 따낸 부실 - 사실은 여러가지 뒷공작이 있기도 했지만 - 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깊게 소파에서 자는 이유는 어젯밤 우연히 재미있는 만화책을 발견해 한 권만, 한 권만 하고 읽다가 꼭두새벽 최신권까지 읽어버린 탓이었다. 최신권까지 읽은 뒤에도 "이 뒤에 어떻게 되는건데에에에!" 하고 오열하던 주원은 1,2시간쯤 자고 학교에 와 수업 내내 졸다가, 점심시간 자고, 또 오후 수업 내내 졸다가(!!!)수업이 끝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굳이 부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엔 곧바로 반길법한 아랑의 목소리에도 아주 깊게 잠든 주원은 쌔근쌔근 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어있을 뿐이었다. 아랑이 주원의 머리에 손을 올려도 깊게 잠든 주원의 반응은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쓰다듬는 것 만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간혹가다 "으히히.. 더는 못먹어.." 하고 잠꼬대를 할 뿐이었다. 무언가 먹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남한테 안좋은 말은 하나도 못하면서 나한테는 잘만 내뱉는 모습을 보면 어지간히 미움 받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항상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그 모습이 좋았지만 그렇기에 헤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있다고 역겨워하면서도 정작 가장 가면을 두껍게 쓴건 나 자신이니까. 가장 가식적인건 나일지도.
" 딱히 못되게 군 적은 없는데. 내가 괴롭힌적도 없잖아? "
어깨를 으쓱하면서 답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그녀에게 괴롭기는 하겠지만 내가 나서서 괴롭히거나 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비단 사하 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괴롭힌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물론 내 재능을 이용한 적은 여러번이지만 나쁜 방향으로 이용한 것은 학교에 들어와서는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게 있을수도 있지만.
" 원래부터 아둥바둥 사는 몸이라서 항상 피곤한데. "
자두맛 사탕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고서는 살짝 웃어보이고는 원래 앉아있던 자리에 가서 다시 앉았다. 곧 아르바이트를 갈 시간이었기에 짐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늘어놓은 것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돈이 없는 인생은 참 거지 같다니까. 그렇게 학생회실을 나가기 위해서 그녀의 옆을 지나가려다가 말했다.
너무 오래 만지면 양인 것을 들킬 테니까, 아랑은 손을 떼려고 생각했다. 더는 못 먹어, 라는 잠꼬대에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이 사람은 꿈도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모양이다. 머리카락에서 멀어진 아랑의 손이 주원의 뺨을 콕 가볍게 누르고 떨어진다. 자고 있으니까 칠 수 있는 장난이지. 히힛, 소리 없이 웃고 나서 아랑은 몸을 일으켰다. 어쩔까. 이대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지만, 잠든 사이에 왔다 간 것을 나중에 알면 좀 서운해할 것 같은데 깨워야 할까? 아랑은 소파에서 좀 떨어져서 가방을 열었다. 작게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안 깨면 산타처럼 머리맡에 과자만 놔두고 사라져 버려야지.
지금은 12월이 아니지만. 깨고 난 후에 머리맡에 과자가 놓여 있는 걸 알게 된다면 산타가 다녀갔다고 생각하려나, 설마? 컵솜사탕을 고른 아랑은 주원의 머리맡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주원이 깨면서 몸부림쳐 떨어지더라도... 무사할 간식이겠지! 아마!
>>605 팔 잡아당겨서 그대로 주원이 품에 떨어지는 것도 ok입니다! ㅇ< 아랑이 무게 정도 떨어져도.... (약간 무거워 하려나?) 잡아당겨서 품에 떨어질 정도의 힘으로 잡아당겨도 되고~ 넘어지진 않을 정도로 약한 힘으로 잡아당기는 것도 됩니다! 원하는 대로 고르세요 '▽'
아랑이 주원의 머리를 만지자 주원은 "으히히.. 맛있어.." 하는 잠꼬대를 내었다. 혹시 머리를 쓰다듬은 것이 무언가 관련이 있는 것이었을까? 어찌됐든, 아랑이 쓰다듬는 주원의 머리는 굉장히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울 것이었다. 만지다보면 계속 쓰다듬고 싶어질 정도로. 아랑은 이번엔 자는 주원의 볼을 가볍게 콕 찌른다. 그러자 주원은 "으응.. 후히.." 하고 신음소리 뒤 무언가 즐거운 것인지 히죽거렸다.
아랑은 무언가 꺼내려는 것인지 소파에서 조금 떨어져 가방을 열기 시작했다. 그 때. 아랑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주원이 조금씩 의식을 되찾은 것이었다. 아마 볼을 콕 찌른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몽롱한 의식속에서도 주원은 컨디션이 회복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 부실에서 자고 있었지. 그런데 너무 많이 잤나? 개운해지는 것 같아. 그나저나 누가 있는 것 같은데..'
주원은 정신이 돌아온 상태에서도 자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눈을 팔로 가리고 있는 탓에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발걸음과 발소리. 그리고 조심스런 몸짓에 주원은 부실을 찾은 것이 아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일어나 인사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주원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 모양인지 그대로 일어나지 않고 자던 자세를 유지했다.아랑이 주원의 옆까지 와서 머리맡에 컵솜사탕을 올려놓고 팔을 거두려는 그 순간
주원은 아랑의 팔을 잡고 약한 힘을 주고 홱 당겼다. 포옥하고 자고있는 주원 위로 떨어질 수 있을 정도로.
"부실에 도둑이 들었나 했더니. 아랑양. 이게 무슨 일인지?"
자는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는지, 평소와는 다른 잠긴 목소리로 아랑에게 말을 걸었다. 장난기 가득한 말투는 그대로였지만, 힘 없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낮고 중후하게 울렸다. 주원은 그제서야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치우고 눈을 떠 아랑을 마주보았다. 자고 일어나서인지 부스스하고, 눈에 힘이 들어가있지 않았다. 의식해서 눈을 크게 뜨지 않은 탓인지 평소보다도 날카로워보이는 인상이었다. 어쩌면 이제서야 좀 늑대다워 보인다고 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