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 대회 때를 기억하는 걸까, 아무래도 육상부니까. 민규는 저 혼자 막연하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최민규는 농담과 미소에, 농담과 미소로 받아쳐주지 않을 만큼 성격이 굳은 사람은 아니었다. 비슷한 시덥잖은 농담과 함께 작게 웃었다는 의미다. 물론 그 인상 탓에 어색한 미소가 웃음으로 보일지는 미지수다만. 어찌되었든 그 자신에게는 미소다.
"그러면 앞으로 만날 수도 있겠네."
같은 동네라는 것도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부정하지 않으니 아마 같은 동네겠지- 하고 생각해버렸다.
"그렇지? 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슬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곤 소면을 가방 안에 넣었다. 오늘 요리는 유자소바다. 동생이 왜 면에서 이상한 맛이 나냐고 우는 소리를 하며 저녁밥을 반절 이상 남기고, 결국 최민규가 1.5인분을 먹게 되는 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다.
"너는 파스타 해먹으려고?"
무슨 파스타냐, 하는 질문이 숨겨져 있다. 저녁 메뉴 고민이 요즘 최대 고민 중 하나기도 했던지라.
"그나저나 너.. 요리 잘 아나보네. 밥, 너가 해먹는 건가."
보통은 오래 삶아도 안 무르는 펜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보통은. 보통의 고등학생은. 그래서 묻는 것이기도 했다. 너 요리 좋아하냐?
공부도 안 하는 게 뭔 고3이라고. 딱히 공부를 안 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담긴 어투는 아니었다. 공부 말고 다른 게 더 좋은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마 최민규는 그 조합을 아주 맛있게 잘 먹을 것이다. 뭐든지 잘 먹는 편이기도 하고, 옛말 중에 자기가 만든 음식은 괜히 더 맛있단 말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다. 최민규는 쪽지를 주머니 안으로 밀어넣었다. 살 건 다 샀지 않나, 하는 순간이 무언가가 뇌리에 스쳤다. ...아, 고양이... 곁눈질로 반려동물 코너를 한번 쓱 보았다.
"무슨 파스타 먹을 건지 궁금했던 거라, 사실은 말이야."
내가 말을 애매하게 했던가. 돌이켜보니 그런 것도 같다.
"나도... 뭐, 다른 가족들이 다들 요리실력이 변변찮아서.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혀를 작게 찼다. 하지만 마냥 짜증은 아니다. 아주 얕은-민규의 감정은 다 그런 꼬락서니다-애정이라면 애정이 담긴 류였다.
"너 그러면.. 요리부 가면 잘 맞겠는걸."
언젠가 맛있는 냄새가 나서 부실 안을 들여다봤던 적이 있다. 저거 맛있어보이네, 하는 감상과 함께 요리부실 위치까지 알아버렸더랬다. 거기 애들 요리 잘하더라고, 당연한 거지만. 괜한 말을 덧붙였다.
헛웃음을 지어보이는 그에게 어느정도 납득했다는 분위기가 전해지자 그녀 역시 가볍게 빙긋 웃어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학년이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이쪽 학교가 좀 안좋은 소문이 돈다 해도 나름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니 저마다 미래에 대한 계획정도는 생각해둔게 있지 않을까? 물론 그쪽 부분의 이야기라면 말이다.
무언가 집어넣는듯한 그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하자 그 사소한 움직임에도 반응했던 그녀가 천천히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반려동물 코너... 키우는 동물이라도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가볍게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별걸 다 궁금해하시네요~"
빙긋 웃는 미소 끝이 미묘하게 뒤틀렸지만 그건 불쾌함의 의미가 아니었다. 물론 의아함이 다분히 섞여있었지만,
"펜네를 이용한건 뭐든 잘 맞지만... 그렇네요. 오늘은 무난하게 로제쪽일까요?"
다른 가족들이 요리실력이 변변찮아서, 라면서 살짝 불만이 섞인듯 보였지만 그런 그의 표정이 그리 진지하게 보이진 않은걸 생각하면 그 역시 늘상 있던 일이었나보다. 그런 일상도 익숙한듯 정을 느낀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좋지 않을까?
"아, 그러잖아도 요리부랍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요."
이번엔 완만한 호를 그린 눈빛으로 그에게 웃어보이던 그녀는 얼굴을 돌리기가 무섭게 다시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그가 눈길을 준 곳에 대해선 잊지 않고 있었다.
주원의 말에 가볍게 웃은 사하가 말했다. 기본 바탕에 호의를 깔고 있는 사람. 세상 모든 게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는 몰랐지만, 충분히 사랑받고 컸으리라 예상하게 됐다.
영화 내용이 심각해질수록 사하의 눈은 스크린보다는 주원의 얼굴 쪽을 향했다. 오늘의 영화 추천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영화 속 관객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어나 박수를 치는 주원을 보며 과자를 씹었다. 영화보다 이쪽 구경이 더 재밌는 것 같기도 하고. 영화는 보다가 졸았는데 주원의 행동은 워낙 크고 다양해서인지 지루해질 것 같지 않았다. …지루할 수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할지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주원이 안경을 벗었을 때 예감했다. 울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지 마, 응? 내가 잘못했어. 웃기긴 뭐가 웃겨. 하나도 안 웃기네."
말도 제대로 못 잇고 훌쩍이는 걸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너는 반응이 왜 이렇게 재밌어서 매번 거짓말하게 만들고 그래….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내가 미안해. 여기, 젤리 먹을래? 요구르트 맛인데."
앞에 있던 젤리도 건네보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려고도 해봤다.
"…쉿, 쉿. 선생님 온다. 너 선생님이랑 도망가고 싶어?"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리고 몸을 낮춰 책상 위로 엎드렸다. 거짓말로 울려놓고 미안해 한 게 무색하게 또 거짓말이었다.
아이같이 엉엉 울면서도 사하가 하나도 안 웃기다고 다정하게 어루듯 말하자 "마, 맞아! 사하가.. 흐끅, 웃기다고.. 그랬는데.. 흐윽.." 하며 그제서야 사하가 '웃기는 영화'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주원은 충혈된 눈으로 사하를 원망하듯 응시했다. 그렇게 응시하다가도 다시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며 두 팔로 눈물을 닦는다.
"제, 젤리? 흐끅. 요구르트 맛.."
주원이 좋아하는 맛인지 요구르트맛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눈물을 멈추고 젤리를 받아 아앙 하고 입을 크게 벌려 받아먹는다. 우물우물 먹는동안 선생님이 온다는 말에 "우왓!" 하고 놀라며 호들갑스런 몸짓으로 책상 밑으로 들어간다. 업드리듯 웅크린 것이, 상체는 가려졌을지 몰라도 하체는 책상 바깥으로 전부 나와 있었다. 꼭 천적이 보이면 고개를 땅으로 박는 타조와도 같다.
사하가 거짓말로 한 말이 진실이 되었던 것인지 바깥쪽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의 발소리라기보단, 터벅터벅 걷는 일반 학생의 발소리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누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오다 영화감상부의 부실 앞에서 멈춰섰다. 흐르는 정적. 갑작스레 분위기는 감동에서 스릴러로 바뀌고 말았다. 발소리의 주인이 영화감상부 부실의 손잡이를 잡는 소리가 들리고, 주원은 그 소리에 몸을 더 웅크리며 어떻게든 자신을 숨기려 했다. 그래봤자 등의 높이가 올라가 책상이 붕 떴을 뿐, 엉덩이부터 다리까지의 하체는 그대로 드러난 채였지만.
다행히도 발소리의 주인은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점점 멀어지는 소리를 들은 주원은 그 즉시 털썩 하고 몸을 대자로 뻗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아아아...."
그 얼굴엔 언제 울었냐는 듯 평온이 가득하다. 얼굴의 눈물 자국이나 눈이 부은 것은 그대로이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