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향은 힘이 빠져 늘어진다. 반사적으로 그를 부축하려 하다 한순간 멈칫거리고 만다. 잊어서는 안 된다,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을 지키겠단 미명을 달고 있더라도 저 자는 용서받아선 안 된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쓰러진 교수를 보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해 초조감으로 이가 마구 갈린다. 지팡이를 뺏고 몸의 힘도 빠진 상태라면 사실상 거의 완전하게 제압당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지만 방심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래, 분명히 그럴 테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 아무런 짓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그에게 손을 대지 말아야겠다는, 이유 모르나 너무도 확고한 의지가 뇌리에 가득찬다. 그는 가만히 선 채로 혜향을 바라만 보다 뒤늦게 상황을 깨닫는다.
쓰러져 있던 탈은 사라졌다. 곧 직전까지 느꼈던 감각이 진득한 황홀감이었는 것을 알아차린다. 주먹이 굳게 쥐이며 숨이 깊게 내리쉬어진다. 택영은 혜향의 말에 대답했다. 표정 없는 낯에는 식어서 가라앉은 분노의 찌꺼기만이 남아 잠연하고 있다.
"주면 우얄라꼬예. 여 있는 학생들 전부 당신한테 신뢰를 잃었는데, 걸 말이라꼬 합니꺼?"
꽉 쥔 손아귀에 핏줄이 선다. 말릴 틈도 없이 그는 반대쪽 손으로 양 끝을 마주 잡고 지팡이를 부러뜨려버렸다. 양단된 지팡이의 나무조각이 부스러지며 땅 위로 떨어졌다. 빼앗은 조각들은 사감이나 교장에게 주면 되겠지. 택영은 그것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말했었죠. 도망가지 말라꼬. 감내할 자신이 없었음 첨부터 그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당신이 자길 암만 뚜드려 패봤자 우리 엿 먹이는 짓밖에 안 됩니더. 그이까 다시 말하는데, 치사하게 피할 생각 하지 마소."
그러니까 현재,,,, 처음에는 쥐새끼가 학원에서 나가게 되면 학생들의 목숨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혜향을 잡아두려는 의미에서 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라 했었는데, 점점 의미가 바뀌어서 >사정이 어쨌거나 추종자 집단에서 활동한 혜향을 용서하지 못하겠음. 설령 사정이 있었다한들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더더욱 용서하지 못할 일임. 죄책감을 느껴서인지 도망치고 싶어서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자기 자신을 해하려는 행동은 고통으로 잘못을 피하려는 행동임. 그러니 백혜향 당신은 더는 그 무책임한 짓은 그만두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것.< 이라는 의미로 말하게 됐네.... 아무튼 나도 몰랐는데 얘 화내면 꽤 싸늘하구나..... 🤔
말려진 레오는 멀어지면서도 계속 몸을 버둥거리고 앞으로 튀어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자신을 말리던 이를 팔꿈치로 몇 대 쳤을지도 모르지. 이제와 질문과 답변이 무슨 소용일까, 믿었던 교수님이 적의 일부였는데. 그 동안 계속해서 기만당하고 계속해서 무시당하고 있었을터인데. 그걸 어떻게 참는단말인가. 몇 대 때려준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정말 쳐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뭐..? "
레오는 잠깐 진정한듯 움직임을 줄이고 혜향이 하는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다는 파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대던 레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곤 으르렁대며 이빨을 세웠다.
" 지금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야, 넌 진짜 안되겠다. 이리와. 내가 쳐죽여줄게 이리오라고! "
레오가 애니마구스이기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레오가 소리지르는 모습이 짐승이 포효하듯 목을 긁어내는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목을 긁어가며 소리치고 있었고. 누군가 말리던 그렇지 않던 레오는 또 다시 앞으로 뛰쳐나가려했다. 눈 앞에 보이는게 없다라는것은, 이런 느낌인걸까.
자신이 아는 얼굴과 알지 못하는 얼굴들을 향해 암적색 눈동자를 굴려낸 단태가 잠깐 한쪽에 머물렀다. 시선의 끝에 잡히는 건, 역시나 자신의 연인이었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 학생들이, 셋. 자신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잘생긴 얼굴이 엉망이 되셨네요. 교수님." 지팡이를 거둬들이면서 단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깨트릴 수 없는 맹세를 했다면, 그의 말을 납득할 수 있다. 자신이 봤던 책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가 단태는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깨트릴 수 없는 맹세를 하셨으면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돌아가세요."
지팡이를 아예 집어넣은 뒤에 단태는 팔짱을 끼며 이야기했다. 탈들에게 돌아가라, 라는 말이었다.
"학원에 있는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내기를 위해서라도 교수님은 여기서 돌아가셔야할테니까." 아즈카반에 가게 되는 것도, 그 조건에 맞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단태는 그말만 하고 윤이 붙들고 있는 레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와 우리를 살리야겠다 생각했는데요. 저도 읽었습니더, 당신이 가면 우리가 죽는다는 거."
책으로 알게 된 내용이 이거였던 모양이다.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서 얻는 게 무언가. 어느 쪽도 되지 못할, 가장자리를 떠돌게 될 선택을 할 만치 중한 게 있기라도 했나. 그에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일말의 정이나 인간성은 믿지 않기로 했다. 택영은 눈을 꾹 눌러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려 했다.
"얘기를 좀 해봅시다. 것보단 근본적으로 중요한 기 있지 않심꺼. 맨 첨에, 애초에 왜 탈 쓰는 짓거리를 하기로 했습니꺼. 내사 애매하다 쳐도 순혈 아닌 사람들은 참 유감이 많지 싶은데예."
몸을 계속 버둥거리다 빠져나온 레오는 당연하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달려들었다. 이를 악물고 몸을 던지듯 달려나간 레오는 다시 두 손으로 멱살을 콱 쥐곤 주먹을 쥔 한손을 높이 들곤 혜향을 노려보았다. 주먹은 맹렬한 기세로 떨어지는듯 하다가 힘을 풀고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레오는 다시 멱살을 쥐고 눈을 빛냈다.
" 개소리 집어쳐. 너, 내가 계속 지켜볼거야. 언젠가 둘이 있는 시간이 오면 그 때 보자고. "
신경질적으로 멱살을 푼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를 쓸어넘겼고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입에서 단내가 돌았고 아직 응어리진게 영 풀리지 않았다. 후- 하고 깊게 심호흡을 한 레오는 다시 뒤를 돌아 혜향을 노려보더니 다시 뒤를 돌아 등지고 돌아섰다.
" ..Scheiße!! "
그리곤 주먹을 쥔 손으로 빠르게 퍽 하고 나무를 쳤다. 뭐라도 쳐야 속이 풀리겠다는 기분이었겠지. 레오는 이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되었던 여기 더 있어서 좋을 일은 없을거야.